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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토리노의 돼지와 성육신의 의미최병학 목사의 <문화로 본 성서>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7.07.10 17:43
옥자 포스터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1-33)”
 
1. 인간의 위(胃) 중심주의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및 사람과 관계가 있다.”라고 『교회교의학』 Ⅲ/2에서 선언한 바람에 동물은 당연히 윤리의 주변적 문제가 되었다. ‘신학은 인간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동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는 기독교를 넘어 인류사의 오만이자 상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실현될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결말 없이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즉 아무 목적 없이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자연은 동물과 식물을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하다.”
 
비이성적인 존재들이 이성적인 종(種)을 섬기는 것이 신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아퀴나스도 『이교도에 대한 반론(Summa contra gentiles)』에서 “따라서 인간이 동물을 죽이든 어떻게 하든 그들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까지 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인간중심주의, 신학의 인간학적 전용, 인간의 위(胃) 중심주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수께서도 말 밥통에 오시지 않았던가?
 
2. 영화 <옥자>; 상징의 혼란, 안락과 교란 그 사이
 
봉준호 감독은 인간을 위해 동물이 대량생산돼 희생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영화 <옥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애완견을 안고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고르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냐?”라는 봉감독의 말은 그래서 그냥 흘려 넘길 말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유전자 조작 돼지를 둘러싼 과학영화가 아니라, 옥자라는 모순적 주체를 통해 현대사회의 육식 문제를 건드린 영화였다. 옥자를 통해 동물에게도 슬픔, 고통, 기쁨을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을 부여해 동물과 인간사이의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한 것 같다. 그러나 모순적인 것이, 슈퍼돼지 옥자를 통해 유전자변형생물체(GMO)에 좋은 이미지를 주었으니, 환경운동에는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결국 영화 <옥자>는 첨단기술이 낳은 괴물이 아니라, 가축을 대량생산해 먹는 위중심주의가 낳은 ‘너무나 인간적인’ 동물의 이야기이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란 실재의 세계가 아니며 실재를 은폐한다. 실재는 상징계를 교란하며 상징계가 위협받는 순간 출현한다. 따라서 상징계가 아무리 실재를 은폐하려고 해도 그 균열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다. 미자와 옥자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강원도 산골의 안락한 상징계는 자본과 위중심주의를 만나 위협을 당한다. 실재는 상징의 교란이자 죽음이며 덧없음인데, 파괴의 모습을 띠는 것이다. 사실 실재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발생시킨다. 알렉스를 만나 경험한 옥자의 눈은 이전의 사랑스런 눈이 아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알렉스를 경험한 이후 변해버린 옥자의 맑은 눈동자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실재계로 판명되었던 세계 역시 자본과 위중심주의로 이루어진 하나의 상징체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과 위중심주의의 상징계를 미자와 옥자가 역으로 교란시키는 것이다. 대형마트를 가로지르는 옥자의 저 육중한 몸을 보라. 강원도와 서울, 뉴욕을 넘나드는 미자의 저 찬란한 작은 몸짓을 보라. 자본과 위중심주의의 상징계를 거침없이 미끌어 진다. 그렇다면 상징계 끼리 부딪혔을 때의 혼란과 오해의 착시, 그 끝은 어디인가? 영화 <옥자>를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는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의 개념에 적용하여 주체란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불과하다고 한다. 곧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하나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호명(呼名)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옥자는 미자와 ‘자’자 돌림으로 호명되었기에(따라서 영화에서 닭들은 이름이 없다) 강원도 산골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지위를 획득하여 주체가 되었다. 게다가 미자를 자신의 몸을 던져 구원해주기까지 했다. 따라서 영화 <옥자>는 상징의 혼란과 미자의 안락과 교란, 그 사이를 옥자가 비집고 들어가 읽는 이들의 상징계를 교란시킨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란 허구적인 상징계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허구적 상징을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옥자는 자본과 위중심주의가 만든 싱징계의 산물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여기에 ‘(자연적인) 닭’-백숙을 좋아하는(‘유전자조작 돼지’는 사랑하면서도) 미자의 모습이 안락과 교란 그 사이에 자리 잡는다. 어쩔 수 없는 위중심주의여!
 
3.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과 인류세
 
영화에 보면 미자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송되는 옥자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게 이놈이 타고난 팔자야.” 가축은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것인가? 사실 영화에 나오는 공장식 축산의 역사는 100년 정도이다. 실험동물의 역사도 길게 잡아야 60년 정도. 인간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가 옥자와 동물의 팔자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팔자에도 위계가 있다. 반려동물-농장동물-실험동물-야생동물 등.
 
1970년 전후 미국에서 생명논리학, 환경논리학 등의 응용논리학이 생겨났는데, 그 중심에 호주 출신의 피터 싱어가 있었다. 싱어는 응용 논리학을 전개하며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동물들의 팔자를 고치고자, ‘동물해방론’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관계자 전체의 이익을 촉진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이고 이러한 관계자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라고 한다. 따라서 싱어는 ‘관계자’를 ‘인간’에만 한정하지 않고 쾌감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나 지성 등을 가진 전체 동물로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결국 싱어의 기본 사상은 ‘자신이 우연히 속한 집단(종)’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종 중심주의’ 비판이었다. 이것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자의적인 사고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을 특권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운동은 인종차별에서 시작되어 여성차별과 동성애 차별을 거쳐 동물차별을 철폐하는 데까지 나아가자는 것이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준 시기’를 지질시대의 이름으로 구분하여 인류세(Anthropocene)라고 한다. 공식적인 지질시대는 아니나,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한 1800년대 산업혁명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경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인류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지구촌 기후를 변화시켰다는 뜻이다. 가령, 지나친 화석연료 등의 사용으로 온실가스가 증가했으며, 이로 인해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가 발생됐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세 시대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산업의 발달과 환경파괴이며 이제 세상은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먼 시대를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은 ‘휴먼의 종말’이 아니라, ‘특정한 휴먼 개념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류세 시대에 인간중심주의, 혹은 위중심주의가 가진 오만과 싸우고, 초월적인 범주인 휴먼이 주장하는 예외주의와 싸우는 것이다. ‘슬기로운 흙덩이’이자 위험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호모사피엔스의 교만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신의 죽음을 외쳤던 니체였다.
 
4. 니체의 ‘토리노의 말’, 혹은 미자의 ‘토리노의 돼지’
 
1889년 1월 3일 아침 니체는 토리노의 하숙집을 나왔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 마차 대기소에서 난폭한 마부가 자신의 말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니체의 마지막까지 억눌렀던 동정심이 터져 나와 그의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니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말의 목을 감쌌다. 정신을 잃은 니체는 말의 목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니체의 하숙집 주인도 광장으로 내려왔다가 니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옮겼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니체는 이전의 니체가 아니었다.
 
니체의 정신을 무너뜨린 최후의 사건인 ‘채찍질 당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번 읽었던 책의 내용이 되살아난 것인가, 사랑에 실패한 심리적 내상의 표출인가, 아니면 그가 비판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성심의 유발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니체의 ‘동물-되기’​1) 인가?
 
유사한 장면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도 나온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술 취한 농부들이 말을 채찍질로 죽이는 꿈을 꾼다. 그는 동정심을 느껴 죽은 동물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또한 니체는 1869년 바젤 대학에 부임한 후, ‘플라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문헌을 강의하며 피타고라스(그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상시키는 영혼의 윤회설을 믿었다)의 어떤 행위에 관한 크세노파네스의 기록을 자신의 공책에 옮긴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개 한 마리가 얻어맞는 것을 보자 그(피타고라스)는 동정심에 사로잡혀 말했다. ‘채찍을 치우라. 그대가 괴롭히는 것은 내 친구의 혼이다. 그 개가 짖는 소리에 나는 그 혼을 분명히 알아보았다(니체, 341).’”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내용은 니체가 찍은 사진 한 장에 나와 있다. 1882년 5월 니체는 루 살로메, 파울 레와 함께 스위스 루체른의 사진관에서 모형 마차를 세워놓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니체와 레가 마차를 끌고 살로메가 채찍질을 하는 장면인데, 살로메는 니체를 배신하고 떠남으로, 니체는 마부에게 끔찍하게 채찍질을 당한 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채찍질은 니체가 수없이 동일시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는 로마 병사들에게 채찍질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매 맞는 개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피타고라스처럼 채찍질 당하는 말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말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마차에 묶여 있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매여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을 보았던 것일까? 영화 <옥자>는 니체의 고통을 이해할 때 인문학적 상상력의 날개를 단다.
 
<니체와 루 살로메, 파울 레>
이사야는 니체의 고통에 대한 대안을 역지식지(易地食之)로 잘 보여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다른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생각해 본다’는 뜻이고, 역지감지(易地感之)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역지식지란, 상대가 먹는 것을 먹을 수 있는 능력, 곧 ‘약자가 먹는 음식을 강자가 먹는 것’을 말한다. 가령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것이다. 한완상 교수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나아가 상대방과 같은 것을 먹으며 체질까지 바꾸는 소통이 완벽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한다(한완상, 33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11:6-8).”
 
5.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옥자의 친구들: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
 
2000년에 『액체근대』를 출판하고 나서 ‘포스트모던’ 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사실 『포스트모던의 윤리』, 『포스트모던과 불만들』은 각각 1993, 1997년에 출간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로 이해한다. 근대사회는 전기의 ‘견고한(solid) 근대’에서 후기의 ‘유동하는(liquid) 근대’로 이행한 것이다. 이러한 ‘액체적이고 유동하는 근대’라는 호명은 명확한 질서를 갖고 안정된 사회로 보이던 낡고 개체적인 근대가 가볍고 융해된 새로운 근대로 이동한 것을 잘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바우만은 ‘중량 자본주의’에서 ‘경량 자본주의’로, ‘판옵티콘(중앙감시감옥)’에서 ‘포스트판옵티콘(모든 곳이 감시가 되는 감옥)’으로, 곧 집단에서 벗어나 개인주의화된 현대의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생활은 2004년에 나온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에 잘 나와 있다. 바우만에 따르면 인간은 유동하는 상태인 근대 이후의 시대에 쓰이다 버려지고 끝내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다. 세계화로 인해 발생한 ‘경제 이민’이 그 예이다. 유럽에서는 현재 이민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거주 지역은 게토(인간 폐기물의 쓰레기장)화가 되고 있다. 런던과 파리에서 폭동이 빈발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따라서 현대의 소비생활은 유동 상태의 근대에 부합하여 상품을 영속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사서 쓰고 바로 버리는 ‘쓰레기의 문화’가 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쓰레기장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잉여, 여분의 인간들)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또 질서 구축과 경제적 진보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바우만, 22)”
 
“지구가 만원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쓰레기 처리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쓰레기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많이 생산됨에 따라 자국의 쓰레기 처리장과 재활용 수단이 급속하게 부족해지고 있다(바우만, 24).”
 
옥자와 그의 동료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지만 결국은 인간쓰레기들을 통해 유동하는 근대의 쓰레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옥자(와 새끼 돼지 하나)는 황금돼지로 말미암아(자본의 탐욕으로) 살아남았지만, 미자가 살고 있는 강원도 산골도 이제 곧 쓰레기 문화가 침범할 것이다. 인간의 위중심주의를 고치지 못할 때, 인간쓰레기들이 지구의 주인으로 계속해서 남을 때, 그리고 토리노의 말에 대해 니체와 같이 울부짖지 못할 때!
 
옥자를 살려주는 자본주의의 교환인 황금돼지
6. 성육신과 구속의 교리 확대
 
피조물 전체에 창조주께서 가지고 계신 관심을 이해한다면, ‘성육신’, 혹은 ‘구속’과 같은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들은 “단지 인간의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 아니라-남성의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은 더더욱 아니며- ‘모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으로 이해(앤드류 린지, 69)”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육체를 가진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애이며, 연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GM(유전자 조작)동물도 포함이 되는가? 역시나 봉준호 감독은 까다롭다.
 
옥자와 미자

1)들뢰즈/가타리(G. Deleuze/F. Guattari)는 『천개의 고원』에서 ‘동물-되기(devenir-animal)’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윌라드의 쥐-되기, 한스의 말-되기, 에이허브 선장의 고래-되기, 카프카의 쥐-되기, 로렌스의 거북이-되기, 한 문인화가의 물고기-되기 등). 되기, 곧 생성은 우리 삶의 현실성, 즉 고정되어 있는 어떤 본질이나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것을 통해 삶을 전개시키는 것을 말한다. 곧,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의 이행인 것이다. 동물-되기는 나의 신체를 변용시켜 새로운 활동을 생성시키는 것이며, 새로운 감응을 향해 나의 신체에 다른(바깥의) 속도와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되기’란 ‘신화적 질서의 퇴락(등급하락)이 아니라, 탈주선을 그리는 역동적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레벨업이나 레벨다운이 아닌, 신체 본연의 기능에서 탈주선을 그리며 아예 다른 라벨이 붙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동물-되기에서 드러나는 주체들의 의식 상태는 단순하고 기괴하며 악마적이기까지도 하며, 반대로 ‘무’의 체험을 경험하기도 하거나, 아주 고차적인 자연과의 합일 상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이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되기’란 나 이외의 다른 것이 생성되는 것이며, 생성은 기존의 대지화 된 영토를 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되기’는 소수적이며, 모든 되기는 소수화(devenir-minoritaire)일 수 밖에 없다(따라서, ‘남성-되기’, ‘백인-되기’는 없다).

<참고자료>

동물 담당 기자들이 본 영화 ‘옥자’, 「한겨레」 신문 2017.7.10. 20면
들뢰즈/가타리(G. Deleuze/F. Guattari),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앤드류 린지, 장윤재 역, 『동물신학의 탐구』 (대장간, 2014)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역,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새물결, 2008)
프리드리히 니체, 김기선 역,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니체전집1』 (책세상, 2014)
한완상,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후마니타스, 2017)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webam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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