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조헌정 목사 설교
꼴찌와 첫째(요나 3:10-4:11, 빌 1:21-30; 마 20:1-16)섬김 안에는 고난, 능동적인 아픔 고난
조헌정 | 승인 2017.09.26 01:32

평등주의자 농장주

포도원 일군과 품삯의 비유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특이한 그러면서도 예수가 추구했던 하느님 나라 운동과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료한 말씀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추수 때가 되자 이른 아침 아마도 6시경 일꾼들이 모이는 장터로 갔습니다. 일할 사람을 찾자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나서자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곤 9시경 다시 공터에 나가서 또 사람을 고용했고, 열두시, 세시, 심지어는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주인으로서는 추수 때를 놓치면 손해가 되니 한 두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주인의 속셈은 딴 데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전연 엉뚱한 곳에서 터집니다. 여섯시가 되자 주인이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고 모두를 모이게 한 다음, 하루 품삯을 주기 시작하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주기 시작합니다. 그래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성서에는 그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 한 가족의 하루치 식량의 값어치가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그들은 한 시간을 일하고 하루치를 받았으니 감지덕지(感之德之) 했겠지요. 이어 세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들도 세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감사했겠지요. 정오에 와서 여섯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자신들을 똑같이 취급한 일에 대해 불만은 있었겠지만, 절반만 일하고 하루치를 받았으니 그들도 어찌되었든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한 사람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설마 자신들에게는 조금 더 주겠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아마 돌아서서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이거 뭐야?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주다니 이거 뭐 잘못된거 아니야? 불만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자기보다 더 먼저 온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기에 일단 참습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꼬박 열 두시간을 일한 저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자 바로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아니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새벽부터 지금까지 12시간을 일한 사람을 똑같이 주다니 이게 말이 되는 법입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정하지 않았소? 내가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말이요? 내 것을 갖고 내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요? 당신은 당신 몫이나 받아 가지고 가시오.”

개인 경쟁 사회에서 공동체 생명 사회로

오늘 어떤 농장에서 이렇게 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주인은 법정에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는 일한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자본주의 경쟁 원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원칙임을 주장하면서 이어 덧붙이기를,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천명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려면 사회가 뒤집어지는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여기서 사회 혁명을 논하는 것은 우리의 대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니 그 논지를 낮추어 ‘모든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루를 살아갈 임금은 받아야 한다’는 사회복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생명의 가치가 경쟁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천년 전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비유의 말씀에서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당시 80% 이상의 백성들이 모두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늦게 나왔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늦잠을 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논외로 하는게 좋겠습니다. 우선은 그때는 다들 걸어 다녔으니 마을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늦게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도 60년대 달동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네팔에 가보면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산꼭대기에 올라갑니다. 물 한번 기르는 일만도 반나절이 너머 걸립니다.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마을 중앙까지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또 누가 있을까요.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장애인들이나 나이든 사람들 자연히 늦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후 3시, 5시에 나온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게으른 사람들이었을까요? 주인이 그들에게 핀잔조로 말합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그러자 그들이 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일거리를 찾고 있는데,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 한국에서 이런 고용시장을 별로 가보지 못해 잘 모릅니다만, 미국에서는 도시 몇몇 장소에 고용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스패니쉬 사람들로 불법체류자들입니다.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 하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서 경험 있는 사람을 먼저 찾고 경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건장한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힘이 없고 나이가 어리면 쓰지를 않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일군이 있습니다. 하나는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일찍 나왔지만, 데려가지 않아 빈둥거리는 사람들. 우선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아이 여럿을 키우는 홀어머니가 아니었을까요?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전쟁터에 나가 죽었든지 거기에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침 식사를 비롯한 빨래 등 집안일을 대강 치우다보면 남들보다는 댓시간 늦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쓰지 않아 빈둥거리는 사람들은 어쩌면 손 하나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아니었을까요?

▲ KTX해고여승무원이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진행하고 있다. ⓒ에큐메니안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들 결코 게으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약자들입니다. 이런 약자들을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복지를 얘기하면, 예전 장로대통령께서는 이를 복지포플리즘이라고 공격을 하였지요. 이는 예수를 인기영합주의자라고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장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를 비롯하여 정적 국정원 공작정치를 한 일로 말미암아 법적 고소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로가 예수님 말씀을 좇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또 하나 우리가 이 비유 말씀 속에서 한번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있는데, 그건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린 장면은 있습니다만, 혹 일찍 일한 사람들 가운데 주인의 처사에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있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형제가 있어 자기는 아침 9시부터 일했는데, 자기 동생이 장애인으로 늦게 나와 일했다면, 그는 한 데나리온을 주는 주인의 처사에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옆집에 사는 홀로된 여성 가장이 오후 늦게 나왔는데,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일군들이 한 마을 가족공동체였다면 불평 대신에 오히려 자신이 돕지 못하는 일가 친척을 포도원 주인이 대신 도와주니 고맙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남한이 영원한 후진국인 이유?

30년 전 미국에 거주할 때,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가보았습니다. 한 반에 한 15명 정도의 아이들이 몇 개의 둥근 책상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앙에 특수의자에 앉은 장애아가 있었습니다. 다른 반을 가보았더니 똑같았습니다. 어느 반에나 장애아가 한 두 명 있었고, 그들은 교실 중앙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전연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 장애인특수학교를 짓는 일로 주민공청회를 열었는데, 다수의 마을 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를 하자 이 어머님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는 동영상이 페북에 나오고 이게 뉴스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남한이 영원히 후진국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 자식 중에는 장애인이 없을지 몰라도 한 다리만 건너면 가까운 친척 혹은 친한 친구네의 자식 중에 있을 수 있고, 앞으로 태어날 자기 손주 중에 있을 수도 있지요. 통계로 보면 10명 중의 한 사람이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진짜 장애인은 다름 아닌 사람을 외면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지요.”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품삯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다음 주가 추석입니다. 요즘은 연휴에 어디를 갈 것인가?에 관심이 가 있었지만, 예전에는 추석 한가위가 갖는 사회적 기능이 무엇이었을까요? 제사에서 살아있는 조상은 3대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예전 같으면 이 후예들은 전부 한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가위 조상제사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자신들이 한 할아버지 밑에 한 가족 촌수로 따져도 십촌 이내라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나누고 베푸는 마을공동체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단순히 조상 제사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자 보호 정신이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큰어머니가 집에 갈 때, 제사 음식만 싸주었겠습니까? 곧 있을 결혼식 준비에 보태라고, 아이들 등록금에 보태라고 돈도 주었겠지요. 산업화에 이은 도시화, 그리고 서구개인주의 물결로 인해 이런 공동체 우리 문화가 모두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오래 전 톨스토이는 오늘의 우리 사회가 겪는 자본주의 욕망의 사회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우리를 야수보다 포악하게 하고, 양심이나 우정, 인간적인 교류,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빼앗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 그러한 비참한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 노예상태를 즐기게 되어 그 같은 상태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왜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와 꼴찌를 집단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자체 교회 건물도 없고 담임 목회자도 없고 숫자도 작으니 교회로 본다면 꼴찌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됩니다.

불붙은 동성애 논쟁

지난 주 남한의 200개가 넘는 장로교단이 저마다 정통임을 주장하면서 102회 총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주요 장로교단마다 저마다의 이슈를 갖고 충돌하였습니다만, 올해는 유난히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논의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간 8개의 장로교단들이 동성애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해오고 있었습니다만, 이번 총회에서 대부분의 장로교단들은 저마다 동성애를 용서할 수 없는 죄로 규정하며 신학교나 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논하는 것조차 금지를 하였고, 동성애 찬성자는 신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미 감리교는 3년 전 동성애 찬성자는 교단에서 축출한다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서구사회나 교회가 용인한다고 해서 우리가 똑같이 따라가야 할 이유는 전연 없지만, 이런 논쟁들은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서구 교회나 사회의 뒤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도 성서고등비평 문제나 용공에 관련한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로 인해 이단 시비가 있어 교단이 분열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교회들은 지금 우리와는 달리 통합이 된 반면에 남한은 뿌리 깊은 남북이념 논쟁으로 인해 통합은커녕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미국도 현재는 트럼프가 오바마의 동성혼 찬성 결의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개신교의 출발이 되는 루터의 독일은 유럽 주위 몇몇 나라들의 뒤를 따라 올해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을 통과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 이상 미국의 주요교단들이 이 동성애에 관련한 다른 성서 해석과 신학 논쟁 그리고 이로 인한 분규와 분열을 지켜보아온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미국에서 목회할 때, 동성애 찬성 발언으로 인해 일부 장로와 집사들이 교회를 떠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주요 개신교 교단들이 동성애자에 대한 내부 정리가 끝난 상태입니다.

제가 속해 있던 미국장로교단도 이로 인해 일부 교회가 교단으로부터 이탈을 하였고, 현재 제가 속해 있는 기장 교단은 남한의 교단 가운데서 가장 진보적 교단이지만, 총회에서 이를 연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의견조차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도 동성애 문제에 관련하여서는 반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도 이 문제에 관련하여서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기에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여러 해 공부를 했었습니다. 

80년대 한참 고민하던 시절 한 미국 젊은이의 발언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심리학자였습니다. 아들의 동성애 기질을 발견한 부모님은 그가 어렸을 때, 저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통해 그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기도와 심리치료는 물론 약물 치료에 심지어는 정신병동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또한 자신이 잘못된 병을 앓는다고 생각하여 바꾸고자 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동성애 성적 지향성이 자신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본래임을 깨닫고 부모님에게 커밍 아웃을 했습니다. 당시 발언할 때, 그는 그 일로 인해 부모님과 만남이 단절된 상태였음을 말하면서 심히 울먹거렸습니다.

얼마 전 경향신문 박경은 기자가 동성애 논쟁이 법무부장관 임명 국회 청문회에서까지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한 기사를 썼는데, 제가 그 기사를 페북에 공유하면서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남한 기독교의 동성애 논쟁 과연 정당한가? 우리 사회의 수십년동안 진행되어온 묻지마 ‘빨갱이’ 수법처럼 교회 쇠퇴에 맞선 자기 방어 기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왜 민주적 토론 방식은 배제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서는 수많은 죄를 언급하고 있는데, 보수교회는 왜 이것 하나에만 목을 거는 것일까? (물론 목회자 세금문제에도 목을 걸었지만 여론의 물매를 맞고 숨을 죽이고 있다.) 하나만 물어보자. 지금 저들은 예수께서 가졌던 소외되고 아파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갖고 접근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의 적대자들인 바리새인 율법학자와 같이 고정된 자기 잣대로 접근하고 있는 것인가?”

아집과 편견의 결과

제1성서의 요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집단 야만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깨우침을 위한 하나의 우화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백성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럴 수는 없다고 여겨 반대쪽으로 배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여차저차하여 바다 속에 빠지고 큰 고기뱃속에서 3일을 머물다가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소리를 치자 그만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는 가축들까지 회개를 하고 베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합니다. 그러자 요나가 그만 배가 아팠습니다. 저 원수들이 못되어야 하는데, 회개를 거부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저 도성이 불타야 하는데, 구원을 받게 되니 배가 아픕니다.

▲ 한 노동자가 노동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피켓을 들고 있다. ⓒ에큐메니안

우리들 주위에는 그런 기독교인들 많습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집단 정죄가 그 하나이며 또한 북한에 대한 집단 정죄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면 겉으로는 안됐다고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그놈들 잘됐다 빨리 망해라 하고 기도하는 요나의 후예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처럼 북한이 잘되어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야훼님, 당장 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며 아집과 편견, 그로 인한 미움과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요즘 북한이 미사일실험과 핵실험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입에 담기 힘든 말 폭탄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첫째와 꼴찌를 세계의 눈으로 보면 첫째는 분명 미국이고 꼴찌는 북한입니다.

북한은 지난 70년동안 적대국인 미국으로부터 경제봉쇄와 전쟁연습에 시달려 왔습니다. 강자의 입장에서는 연습이고 훈련이라고 하지만, 약자 입장에서는 그게 언제 공포탄 대신에 실탄을 쏠지 모르니까 긴장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전협정 대신에 평화협정을 맺자고 계속 요구를 해왔는데, 미국이 이를 계속 깔아뭉개 오자 북한에서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다고 하여 정말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미국과의 담판을 끌어내기 위해 미사일과 핵실험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북미간에 평화협정 대화가 속히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일에 있어 문재인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신무기만 구입하지 말고 대화의 운전대를 잡고 나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태평양을 둘러싼 외교정책은 분명합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진출을 막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일본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도와주었고, 38선 분단을 소련에 제안하고 일본에 이어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와 지금까지 군전시작전권을 쥐고 있습니다. 세계 250개국 중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유인하여 이후 북을 악의 축으로 몰아 남한과 일본에 계속 무기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이번에 밝혀진 얘기이지만, 심지어는 네바다 군사무기 쓰레기장에 버려진 헬기까지 다시 페인트를 칠해 우리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쓰레기 처리장에 처넣었던 무기를 팔아먹는 놈도 나쁜 놈이지만, 그런 줄 알면서도 떡고물에 눈이 어두워 이를 사오는 놈도 나쁜 놈들입니다. 여기에 앞장 선 모든 장성과 정치인들 모두 감옥에 처넣어야 합니다. 이들은 국민을 속이고 선량한 백성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흡혈귀와 다름이 없는 놈들입니다.

저는 이 땅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기도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일을 위해 기도하며 애쓰는 목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 많은 답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 확실한 것은 이 땅에서 꼴찌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 이 땅에서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원수 북한이 아니라, 요! 나! 곧 자신, 미국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남한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난당하는 특권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섬김이라고 할 때, 그 섬김 안에는 고난이 포함되어 있고, 그리고 이 고난은 그냥 당하는 수동적인 아픔이 아니라, 능동적인 아픔,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겪는 일이 아닌 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믿는 자의 특권이라는 바울 선생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헌정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2-313-0179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Copyright © 2017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