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한계 - 에큐메니안

레비나스는 ‘상처입을 가능성(혹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vulnér-abilité)’을 ‘타자의 괴로움에 의해 상처받는 일, 타자의 비참함을 느끼는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사실 삶은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로 채워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의 자국들을 외면할 수 없다.

상처에 취약한 몸(을 지닌 인간)과 상처입기 쉬운 유기체(로서의 공동체), 그것이 곧 우리 삶의 흔적과 인간 존재의 관계성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흔적에 관한 해결책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초월’이며, 데리다가 물은 환상의 환대가 용서의 한계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 타자성의 철학을 전개한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용어는 아듀(adieu)이다. 어원적 의미로는 첫째, 타자와 만났을 때 하는 인사(축복) 둘째, 죽음을 포함해서 떠날 때 하는 인사(축복) 셋째, ‘신에게로 가다(à Dieu)’로 들 수 있다. 이 어원적 의미는 곧 ‘타자와 만남’, ‘존재의 타자로서 죽음에 직면’, ‘무한자에게로 초월’로 각각 상승(?)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세 번째 의미인 신과의 만남은 오로지 첫 번째 의미인 타자와의 만남에 의존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과 내가 주체로 선다는 것, 마침내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이야기이다.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한계는 초월의 이러한 의미를 깨달을 때 용서라는 말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무제약적인 책임성만 남은 순수 종교의 형태를 요청한다.

반면 데리다는 좀 더 정치적이다. 환대론 이후 『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편의 에세이』 (휴머니스트, 2003)에서 데리다는 파시즘적 국가 행태를 해체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불량 국가’ 담론은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미국의 일방적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 국가’로 규정했을 때, 노엄 촘스키(N. Chomsky) 등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 행위야 말로 ‘세계 최대의 유일한 불량 국가’라고 비판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데리다는 현존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불량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불량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각주 1)

영화는 결국 ‘작가ㅡ마더ㅡ이방인들’ 모두가 ‘상처의 공동체’를 형성해 다시 시작하지만, 무제약적인 책임성이 마더를, 대지를 마침내 이방인과 작가인 신을 구원하지 않을까? 영화는 인류의 문제에 관해 손쉽게 ‘사랑의 신은 필요 없고, 심판의 신을 요청’한다. 따라서 영화 마지막 엔딩 곡은 ‘The end of world(세상의 종말)’이다. “요청하오니, 저들을 멸하소서!” 새삼스레 마더의 음성은 오늘 우리 삶의 성찰로 다가 온다. 그리고 거기에 신의 존재가 거대한 벽처럼 우뚝 서있다.

<보론> “나는 나다”=존재론의 시작

영화에서 남편은 마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그게 곧 나지, 완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창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만난 신의 이름이다(출애굽기 3:14).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나는 나다.’ 혹 ‘나는 존재이다.’라고 번역되는 이 말을 통해 신이 진정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김용규는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즉, ‘나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창3:19)’ ‘존재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부터 3,300년 전쯤 모세가 이룬 업적은 바로 이것이다.(각주 2)

그렇다면 모세는 서양 철학에 존재론의 기반을 닦은 그리스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445?)보다 적어도 700년이나 일찍 존재와 존재물들을 확연히 구분한 인류 최초의 존재철학자가 된다. 아니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도 아페이론(apeiron, 무한자)을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신이라고 규정했기에 600년으로 단축되기는 한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이고, 존재물이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로 이야기 하며, 칼 바르트(K. Barth)는 신을 “모든 인간적인 것에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분)”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존재물과 존재인 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눈얼음 계곡’, ‘극지역’, ‘황폐지대’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존재는 ‘모든 존재물이 그로인해 생겨나서, 그 안에서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소멸하는 무한한 바탕’을 의미한다. 신학자 판넨베르크(W. Pannenberg)도 ‘장(場)으로서의 하나님(God as a Field)’이라 말했는데, 동일한 의미이며, 필자는 신은 ‘최대 행동반경’으로 넓이로 표현한바 있다. 이것은 바르트의 ‘높이(초월적)’와 틸리히의 ‘깊이(실존적)’의 세워진 직선의 차원에 또 다른 수평적 관계(넓이)를 통해 신의 존재를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아무튼 모세와 아낙시만드로스(아페이론), 파르메니데스(존재)를 이어 플라톤(Platon)의 선의 이데아와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Plotinos)의 일자(一者) 개념으로 이어지는 서양 존재신학의 역사는 이제 <마더!>에서 그(Him)을 통해 영상 이미지(존재물)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 신의 이미지는 환대와 용서의 선한 이미지 뒤에, 모신의 희생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어쩌면 강폭한(?) 아버지 신이었다(왜 하필 못생긴 바르뎀인가!). 왜냐하면 존재는 질서이고, 혼돈과 무는 존재의 이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마더!>는 이렇게 모신 학대사를 영상 이미지로 잘 그려주었다.

(각주 1) 좀 더 부언하자면, 데리다에 의하면,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서구적 자유 이념에 기반을 둔 자기결정권에 따라 힘을 행사하는 것을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따라서 힘만 있으면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에게 ‘불량배’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고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폭력(테러리즘)’과 ‘전쟁’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이다. 따라서 UN 회원국이 주권으로 정한 국제 규범을 미국이 무시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예외적 주권’을 가졌다면, 테러리스트들도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예외적 주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강자의 이성은 사실상 ‘정의’가 아니라 ‘법’이며, ‘법의 힘’에 의해 통치되는 현존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 ‘불량 국가’에 불과하다. 따라서 데리다는 최강자의 이성이 법이 되고, 정의가 되는 현존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다가올 민주주의(democratie a venir)’를 역설하지만, 여기서도 해체 이후 재구성의 책임성은 없어 보인다.
(각주 2) 이하 김용규, 『데칼로그』 (서울: 포이에마, 2015), pp.98-105 참조.

최병학 기자 hak-99@hanmail.net

트윗하기

최병학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