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애에는 일생에 걸쳐 영향을 받게 되는 사건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는 ‘기장 선교교육원 위촉생 과정’ 바로 그것이었다.

1. 나는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25세(1974년)가 되어서야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2학년 때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시위로 인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긴급조치9호’에 의해서 제적이 되고 말았다(1975년).
사실 내가 제적생 명단에 포함된 것은 의외였다. 나는 그럴 정도로 의식화가 되어있었거나 주동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무언가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열정은 차고 넘쳤지만, 대학 2학년생의 지식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교육원생활이 그렇게도 신이 났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도약기였다고 생각된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 교육원 시절의 서남동 목사. ⓒ죽재 서남동목사 탄생 100년 기념사업회 제공

2. 우리 한신대 제적생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배려로 1976년부터  ‘기장선교교육원’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첫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선교교육원은 두 가지 일로 말미암아 내가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 곳이 되었다.
첫째는 교도소에 계시던 교수님들이 석방되셔서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분이 바로 서남동 교수님이다. 두 번째는 일반대 제적생들도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러 대학출신들(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등)이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인문과학에 관한한 백지장이나 다름없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진보적 학문의 바다 속에 빠진 것과 같았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물어보았고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배움에서 느끼는 희열을 나는 그때 충분히 경험하였다. 비로소 진보가 무엇인지 올바로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좌익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분들에 대해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고마움이었다(특히 유상덕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3. 안병무 교수님과 더불어 서남동 원장님은 이러한 교육원 특히 위촉생 과정의 중심을 잡아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울타리가 되어주셨다. 그분들의 신학의 깊이와 넓이 또는 높은 명망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주장과 열정들이 도도히 흐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남동 원장님께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었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아시고 나에게 원고 교정하는 일을 맡기시고는 큰 도움을 주신 것이다. 서남동 원장님의 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한(恨)의 사제(司祭)”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도 깨달음을 더하여주고 있다.
목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 무엇일까? 저들의 한을 내 마음에 받아들여서, 그들과 같은 아픈 마음으로, 그 한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그 한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한과 아픔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한을 저들 정도의 마음에 품고 그 한을 풀어내기 위해 애쓰는 여기가 바로 목사의 뿌리다. 그런 점에서 목사는 진보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4. 졸업 후 한동안 ‘졸업생 퇴수회’는 우리에게 큰 낙이었다. 1980년 여름 퇴수회는 전주 나상기의 집에서 모였다. 그때 나상기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에 있는 기독교농촌개발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서남동 원장님이 발제를 해주셨는데 주제가 ‘두 이야기의 합류’(?)였다.
두 이야기란 하나는 밖으로부터의 운동으로서 출애굽의 해방전승을 내세우고 침투해가는 운동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 운동으로서 가나안 내부에서 피지배계층이 벌리고 있는 혁명운동의 이야기이다. 이 두 운동이 해방이라는 공동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서 가나안 정착 또는 점령의 역사를 이루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강의로 우리의 신앙운동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합류되어가야 하는지, 그 성서적 전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날 저녁식사를 한벽루에 가서 오모가리탕으로 대접해드렸는데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참 좋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모처럼 외식하는 데에 따라와서 기뻐하는 모습과 같았다. 너무도 깨끗한 그 모습이 종종 그리워질 때가 있다.

서용석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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