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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은 야성(野性)을 회복하는 절기(창 9:8-17; 막 1:9-15)대구마가교회, 소성리현장예배
조헌정 | 승인 2018.02.22 00:05

저는 향린교회에서의 14년의 임기를 마치고 지금은 나이가 차지 않아 은퇴는 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부산의 믿음교회 1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평택 대추리에 대규모 미군기지가 조성이 되면서 농부들이 평생을 일궈온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향린교회도 여러 평화운동 단체와 함께 이 땅을 전쟁군사기지로 만들어가는 일에 반대하는 일에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요일 예배를 이곳에 드리게 되었고, 그 이후 현장예배라는 이름으로 온 교우들이 일 년에 한 번은 아픔의 현장에 가서 예배를 드려 왔습니다. 그런데 마가교회는 매월 이를 행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 사건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상당히 많은데, 그중 가장 핵심적인 일 혹은 사건은 무엇일까요? 병자를 고치기도 하시고 폭풍을 잠재우게도 하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도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 이건 성인 남성만 포함한 숫자이니 여성 어린이들을 포함하면 수만 명을 한꺼번에 먹이시기도 하셨지요. 그런데 이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게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네, 그건 생애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숙청 사건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성전세를 내야 했고, 두 번째는 희생제물을 갖고 가야 했습니다. 이때 제물은 흠이 없는 비둘기나 양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증명하는 제사장의 도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순례자들로 멀리서 걸어오기 때문에 성전에 와서 이를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흠이 있는 동물을 흠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많은 이익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끼니를 이어갈 수 없었던 가난한 민중들은 아예 성전을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 분이 치민 예수께서는 채찍을 들어 못된 성전 장사꾼들을 쫓아내고 상을 뒤집어 엎으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난을 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성전을 가로 질러 제사용 그릇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성전에는 성전종사자 레위인들, 성전 경비대, 상주하는 제사장들만도 200명이 넘었을뿐더러, 성전 뜰의 크기가 요즘 대형교회 크기 정도가 아니라, 축구장 5개 크기만큼 넓은 장소였으니 이는 민중폭동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와 누가는 이 구절을 빼버렸고, 누가는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둘러엎었다는 얘기까지 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기에 신빙성이 제일 높지만, 세 복음서의 얘기가 조금씩 다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288 x 436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 복음서 모두 성전숙청을 언급하고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는 ‘신성모독죄’와 ‘민중소요죄’의 죄목으로 고발을 당하고 결국에는 빌라도 로마총독에 의해 로마정부를 적대시하는 정치 게릴라들에게만 시행하던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성전 숙청 사건은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복음서 보다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이 성전 숙청 사건의 중요성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예수 생애 맨 마지막에 두지 않고, 이를 예수 생애 가장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단순히 성전을 깨끗케 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자 그들이 반문하지요. “아니, 우리 조상들이 46년을 걸려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다시 세운다는 말이냐?” 이에 요한복음 기자는 이는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성전 곧 예수 부활의 몸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이 모인 예수 부활의 몸입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성전 안에서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밖 특히 갈릴리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해방의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저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요 하느님의 참 자녀임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전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땅 해골이 즐비한 골고다 언덕 근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날 예수 부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 사건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억눌리고 배척당하고 억울한 일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민중 해방 사건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러한 민중해방운동으로서의 예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이 한반도 아픔의 현장 소성리에 오신 것입니다.

사순절과 광야

부활주일을 앞둔 40일을 사순(四旬)절이라 부르고 이를 다른 말로는 Lent 수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등장합니다. 노아홍수 기간이 40일이고,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머문 기간이 40년이고 엘리야가 광야에서 머문 기간, 예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기간이 40일입니다. 이외에도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이 40은 언제나 광야와 함께 등장을 하고 그리고 이 광야 40일 혹은 40년을 통해 저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성서에서 40은 단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뜻하는 신앙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40일 기간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앙훈련을 강화하는데, 일주일에 하루를 금식하기도 하고, 기호식품을 절제하고 기도와 성서 읽기에 더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러한 신앙훈련을 겸해 이곳 소성리 기도처에서 한 주간을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성이나 도시와는 다른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곧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이 되는 장소가 아닌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합니다. 도시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으로 부와 출세의 경쟁이 존재합니다. 도시인들은 굴리는 차종, 아파트의 크기와 사는 동네에 따라 존재 가치가 달라집니다. 반면 광야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목초지를 따라 양과 같이 이동을 해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 물건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이동에 걸림돌이 될 따름입니다. 저들에게는 가진 물건이 적을수록 좋습니다. 저들에게는 낮에는 풀포기,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만이 유일한 친구이며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공간이 아닌 시간입니다. 광야에서는 내면을 향한 자기 존재 의식이 깊어지게 되고 신과의 대화가 중요해집니다.

무지개와 비둘기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 본문 말씀은 노아홍수 얘기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 기도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노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드셨는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위에서 쓸어버리리라.”그런데 이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 이상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건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과는 다른 의미인데, 이는 고대시대 제국의 통치자들을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저들이 거대하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말이고 힘이 세다는 말은 군사력에 직결됩니다. 곧 홍수 심판의 이야기는 약한 이웃민족들을 침략하여 죽이고 강간하고 노예로 삼는 제국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광야에 대립하는 도시 바빌론제국을 상징하는 바벨탑에 대한 언어 혼란의 심판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에 노아 홍수 이야기에 담긴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는 이러한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선언과 함께 그 증거의 표시로 무지개를 남깁니다. 무지개의 상징은 무엇인가요? 이는 단순히 자연의 현상이 아닌 활의 모습입니다. 영어에서 무지개를 뜻하는 레인보우(rainbow)에서 보우(bow)는 활입니다. 무지개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노아 홍수는 전쟁 귀신을 쫓아내고 평화를 심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2성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 나가 40일을 기도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세례는 단지 교회의 일원이 되는 하나의 종교적 예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 모양의 영이 내려왔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요? 여기 제가 비둘기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 비둘기를 평화를 상징하는 새로 말합니다만, 비둘기가 다른 새들보다 평화로운 새는 아닙니다. 저들도 다른 새들과 같이 서로 다투기도 하고 영역싸움도 합니다. 다만 비둘기는 자기 방어 수단이 없다보니 사람 가까이에 머무는 습성이 있고 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본능적인 습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모양의 영이 내려왔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뜻이 세례를 통해 직접 내려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세례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받았겠지만, 참 뜻은 하늘로부터 직접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음성은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마가 누가 세 개의 공관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서는 사탄에게 시험받았다는 얘기만 나오지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세 가지 시험으로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굶주림의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신기를 통한 인기와 명예의 유험, 그리고 사탄을 숭배함으로 얻어지는 세상 권력의 시험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을 다 물리치시는데, 이는 우리가 겪는 세상 유혹을 이겨나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가복음이 마태복음, 누가복음과 다른 것은 그 시작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로 나아갔다’고 예수의 자유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이는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나 먼저 번역된 개역개정판에는 “성령이 곧 예수를 몰아내신지라.”그리스어 원어 성서로 보면 ‘몰아내셨다가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34절에서는 같은 그리스어 ekballo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내어 쫓았다로 번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내어 쫓아내셨다.’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어 쫓으셨다’는 것입니다.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내쫓았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마가복음이 보다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그리고 있어 더 좋습니다.

‘므드바르’

그런데 예수가 쫓겨가다시피 간 광야는 그냥 허허벌판이 아니라 들짐승들과 천사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보호를 뜻한다면 들짐승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길들여지지 않는 거친 야성(野性)을 상징합니다. 대통령과 같은 당을 여당(與黨)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여, 무리 당. 반대하는 당을 반당(反黨)이라 부르지 않고 들 야자를 써서 야당(野黨)이라고 부릅니다. 권력을 반대하는 당이 아니라 보다 원칙적인 면을 주장하는 당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머문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보다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자연 들판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므드바르’인데, ‘므’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사이고 ‘드바르’는 작은 공간을 뜻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깊은 공간, 지성소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곧 광야는 지성소로 번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세 율법서인 민수기는 히브리어로 ‘뻬 미드바르’(‘광야에서’)입니다. 그리고 드바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가 ‘다바르’입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문맥에 따라 ‘말’도 되고 ‘사건’도 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말씀’이 곧 ‘다바르’입니다. ‘다바르’는 무에서 존재를 창조해내는 하느님의 권세, 힘입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하느님께서 말씀(다바르)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번역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곧 광야는 히브리어의 본래 뜻으로 이해하면 이는 하느님의 말씀 권세가 임하는 장소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성서를 읽을 때에 40이라는 숫자를 보면 이는 하느님이 주재하는 시간, 광야라는 단어를 보면 하느님이 임하는 장소 그렇게 이해하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 하늘의 직접 명령을 받으시고 나서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말씀과 권세로 야성의 힘을 얻으신 다음 이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세상에 나아가는 때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가서” 누가복음은 예수가 서른살 즈음이 되자 세상에 나왔다고 얘기한 반면 마가는 예수가 세상에 나오게 된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라는 말은 요한의 일을 승계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요한은 헤롯왕이 배다른 남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는데, 요한이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 헤롯왕와 헤로디아로부터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후에는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렇다면‘요한이 잡힌 후에’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요한이 잡히자 그만 헤롯왕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마치 박정희가 유신을 공포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자비로 잡아 가두고 간첩으로 만들어 고문하고 죽이고 청년들은 군대로 끌어갔습니다. 그러자 비판의 목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복음과 사회 정치와의 함수관계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때에 세상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정치범으로 옥에 갇힌 후에 그를 대신해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외치시기 시작했다는 말은 예수의 행동이 정치적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어둠의 땅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변두리의 땅 갈릴리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 주위에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은 여러분이 성주 소성리에 와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아마 반대하는 얘기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사회정치적인 일에 관여하면 안 되고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관계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난 시기 서구 기독교가 잘못한 일입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하느님 나라 선교의 이름으로 예수 복음을 선포한다는 미명하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침략하여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원주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은 하늘만 쳐다보게 만들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노벨평화상을 받은 투투 주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얼굴 하얀 백인 친구들이 와서 성서를 손에 들고 와서 함께 기도하자고 해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나서 눈을 떠 보았더니 자기들 손에는 저들이 가져온 성경책이 놓여 있고, 자기들 손에 있었던 땅문서는 백인들 손에 놓여 있더라고...

미국은 기독교 선교사와 함께 복음을 들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학교와 병원을 세워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일본이 우리 땅을 식민지로 삼을 때 이에 비밀협약을 맺어 동의하고 1910년 8월 27일 한일강제합병식에 미국 대통령이 축하 꽃다발을 보냈습니다. 이후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을 준비하는 때에 소련군대가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따라 한반도를 둘로 나눠 점령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미군이 계속 주둔을 하면서 한국 군지휘통제권을 쥐고 미국산 무기만을 구입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군수무기를 수입하는 제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노동시간을 들여 힘들게 돈 벌어서 별 쓸모도 없는 비싼 무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 좁은 땅에 무슨 공중급유기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저 시베리아나 태평양에 가서 전쟁을 하지 않을 바에는 수천킬로미터를 날아가는 F35신예전투기도 불필요합니다. 심지어는 사용기한이 지난 군사무기들을 네바다 사막의 쓰레기장에 처넣어두는데, 심지어는 이곳에 버려진 헬기를 색칠만 새로 하여 수입하여 말썽을 빚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뇌물이 오고갑니다. 

남한은 지난 70년동안 엄청난 비용을 군사비로 지출하고 젊은이들은 군대에 나가 아까운 젊음을 탕진하고 그리고 남한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헬미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지금까지 나라 밖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실상 나라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총기 학살이 심심하면 일어나지만, 학교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여실한 증거입니다.

며칠 전 플로리다의 19살 고등학생이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선생을 총으로 쏘아 17명을 죽였습니다. 이 친구는 트럼프의 선거 구호 ‘아메리카 퍼스트’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니고 백인우월집단에 가입을 하고 그 가입기념 선물로 총을 선물 받았고 결국은 이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지금 미국 내에서 한해 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3만 명 이상으로 시리아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시리아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5살 미만의 아이들도 집안에서 부모들이 무심코 놓아둔 총을 들고 장난을 하다 죽어가는 아이들이 일 년이면 5천명이나 됩니다. 이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입니다. 미국사람들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나 안보는 무기로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무기는 오히려 생명을 그것도 자기 생명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와 더불어 광야로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의 힘을 얻는 절기입니다. 전쟁 무기 폭력에 저항하는 하느님 나라의 야성을 키우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의 힘 곧 ‘다바르’의 창조사건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욕망 절제를 통해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입니다. 소성리는 오늘의 갈릴리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분명코 이곳에 제일 먼저 찾아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가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의 현장 예배를 통하여 마가를 통해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그 뜻을 더 충실히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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