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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권세와 밀알 생명(렘 31:31-34, 요 12:20-33)세상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믿음
조헌정 | 승인 2018.03.22 23:37

사상이나 철학 혹은 역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는 발상을 요즘은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하지만, 이전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했습니다. 5백 년 전까지 수십 만 년 동안 모든 인류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진리가 있었는데, 그건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였습니다. 당시로 본다면 이는 마치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의 진짜 부모님이 아니다라는 소리와 같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창조와 진화

지난 주 빅뱅 우주론의 주창자 호킹 박사가 7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우주론은 단순히 우주 기원의 한 이론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신에 의한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 이론입니다. 그의 우주생성론은 우주가 스스로 무에서 유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없듯이 수백 년이 지나면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주장 또한 믿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과정(how)을 설명하는 과학적인 논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는 신앙고백(what)인 것입니다. 창조와 진화는 접근 방식과 그 주장하는 바가 전연 다른 것인데, 이를 양자택일 방식의 적대로 보는 견해는 유아적인 이해로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당시 유럽의 가톨릭은 종교는 물론 국가 위에 있었습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은 성서의 핵심 신앙으로 결코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였습니다. 이에 도전하는 것은 교회와 국가에 대한 도전일 뿐더러 신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성직자였기에 자신이 주장이 가져올 파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주장을 아주 어려운 수학 공식으로 감쌌으며, 이 또한 자신의 죽음 직전에 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50년이 지나 이를 근거로 지동설을 주장한 부루노는 화형을 당하였고 그 이후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마지못해 자신의 주장을 접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말은 진리는 결코 힘으로 누를 수 없다는 뜻의 유명한 독백이 되었습니다.

율법에 기초한 구원론의 결함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본문 말씀은 지동설에 못지않게 제1성서의 근본신학을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의 말씀입니다.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성서는 인간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매우 작지만, 그러나 영생에 관한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를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제1성서에서 설파하는 인간 구원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전해준 율법 계명을 잘 지킬 때에 옵니다. 십계명을 기반으로 생활 전반에 걸쳐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수많은 계명들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자기 성찰이 필요 없는 종교적 노예로 만듭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에 따른 행동과 실천이 강조되기에 옳은 방식이긴 하지만, 동시에 인간 행위가 전제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주체성이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옮겨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첫 번째로부터 네 번째까지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묻는 계명은 말씀하시지 않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계명만을 언급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려서부터 저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 무척 괴로워하며 예수 곁을 떠납니다.

이 지도자는 계명의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문자만으로 이해했기에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하는 신앙의 교만(공로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실천에 근거한 구원론의 결함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느님의 은혜에 기초한 구원론은 옳은 것인가?

우선순위를 양자택일로 만든 개신교회

오늘 야훼 하느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신은 우리의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매를 들지 않고 무조건 용서할 때가 있는데, 그때 부모의 심정은 자녀들이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백성을 향한 야훼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악 이용하는 얌체 신앙인도 생겨나고 또 처음에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 열기가 식어가는 것입니다.

▲ 세계약을 선포한 예레미야 ⓒGetty Image

크게 보아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지나친 은혜 구원 사상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온다고 하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성서 말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루터의 개혁 사상의 하나인 ‘은혜만으로 구원론’은 당시 중세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지나친 공로 사상에 대한 반대로 외쳐진 주장입니다. 성서에도 바울의 ‘은혜만의 구원 신앙’이 지나친 폐단을 가져오자 야고보 사도의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는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지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살기에서 사순절을 맞아 양화진에 있는 가톨릭의 성지 절두산을 방문하였습니다. 대원군 시절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믿음의 선조들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입구에 신천지를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 144,000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천지 활동이 개신교를 넘어 가톨릭에 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관, 장막 성전,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등등 소수 종파들은 모두 출발 당시에는 이 144,000명의 구원명단을 내세웁니다.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144,000명의 숫자는 얼마 있지 않아 다 찹니다. 그 이후 이들은 모두 이 숫자를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말도 안 되는 해석인데도 사람들이 여기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은혜 구원론 때문입니다.

은혜 구원론과 한국교회의 병폐

우리는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말씀이 주어진 역사적 상황이 다르고 예레미야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의 율법 준수와 상관없는 무조건적인 구원론이 등장하는 것인가? 이는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율법의 근간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성전에 근거한 공동체적인 율법 구원의 시대가 끝났고 대신 개인의 주체적인 신앙으로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종의 대안신앙입니다. 그러다가 스가랴시대에 성전이 회복되면서 다시금 율법 구원이 등장합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사람들이 매우 성숙하여져서 가르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옳은 일이지 무슨 일이 잘못된 일인지 판단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만, 이 또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면 오해의 소지가 매우 큰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아도 배운 사람들이 문제이고 기독교인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표적인 인물이 이명박 장로 부부입니다. 계속하여 언론에 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바알의 숭배자들이요 맘몬 신 경배자들입니다. 이분들이 어느 교회 강단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만큼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은혜구원 자기 의인화의 극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처럼 이들이 차라리 무신론자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인 신앙이 집단적인 모습으로 잘못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해외 선교입니다.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임을 자랑합니다. 해외 선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도 우선  순위가 있고, 균형이 필요합니다.

자기 민족이 엄청난 모순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외국에 나가 전도하면 그게 무슨 효과가 날까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한이 세계 제일의 자살률 국가요,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원수가 되고 엄청난 군사비 지출로 한반도 전체가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는 자기 민족의 죄악에 눈을 감고 다른 민족의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우선순위가 바뀐 신앙입니다.

물론 어떤 신앙인들은 민족 구원에 앞서 개인 영혼 구원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성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나요? 개인영혼 구원을 말하는 구절이 있긴 하지만, 제1성서는 야훼 하느님과 한 집단과의 신앙관계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라 불리는 노예집단이 애굽 제국의 폭정으로부터 탈출하는 얘기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유다왕국을 건설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야훼 하느님의 신앙을 지켜나가다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어 페르시아 제국, 희랍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국가를 이루어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약소민족으로 그 힘의 한계가 뚜렷합니다. 그래서 정치적 독립은 포기하고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종교적 자치집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한 개인이 아닌 민족을 대표하는 개인입니다.

제2성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 가시던 과정에서 성전을 숙청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신성모독죄와 민중소요 죄목으로 빌라도 로마총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통해 그 운동을 계속해서 펼쳐나가신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곧 국가와 민족, 민중이 늘 중심에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과 인격 수양을 위한 말씀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정의와 평등을 기초로 한 평화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은 모든 개인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상황 속에서는 항상 약자 편에 서시어 강한 자를 내리치시어 약소민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근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큰 줄기는 보지 못하고 작은 가지에만 매달려 교리적인 다툼 속에서 분열을 계속하여 오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권세를 깨뜨리는 밀알 생명력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너무 유명하지만, 그 뜻이 너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희생을 말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라는 질문을 중요합니다.

지금 이 12장의 밀알 하나 얘기는 예루살렘 성전 입성 직후에 일어난 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때에 성전 숙청사건이 일어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2장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대신 백성들이 모두 예수를 좇아간다는 바리새인들의 시기와 질투를 언급함으로 박해가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어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그리스)사람 몇이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가 매우 알쏭달쏭합니다. 우선 이 얘기를 들은 빌립이 곧장 이들을 예수에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이 안드레아에게 얘기하고 그리고 이 둘이 예수께서 가서 이 얘기를 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일이 마치 간첩 접선하는 듯이 비밀스럽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암시하는 구절이 11장 57절에 나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이 구절은 당국의 체포 명령을 피해 예수가 은신 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그렇다 치고 이상한 것은 헬라사람 얘기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이 얘기를 들은 예수께서 이제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곧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아니 도대체 헬라사람과 자신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해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당시 요한공동체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헬라’라는 단어를 당시의 세상(cosmos)을 상징하는 언어로 이해합니다. ‘헬라사람 몇 명이’ 찾아왔다는 말을 단순한 신앙상담 차원이 아닌 로마제국의 폭력이 예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언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앞 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예수의 인기를 질투하는 얘기(19절)가 나오고 뒤의 얘기에서는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말씀(31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저의 신학적 견해인데,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기적(헬, dynamis)을 표적(헬, semeion)이라고 부를 뿐만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지점에서 외부인들에게는 그 속뜻이 분명하지 않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예, 돌항아리 여섯개, 두 번(위로부터), 여섯 명의 (가짜)남편, 38년 된 병자, 나는 ... 이니라(에고 에이미, 야훼), 사랑하시는 제자 등등)

그리고 오늘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밀알의 희생 곧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연계되어 자주 나타나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건 ‘세상’이라는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25절)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31절) 곧 생명을 뜻하는 ‘밀알’과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될 ‘세상’이 적대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죽음을 앞두고 적대하는 대상은 ‘세상(권세)’입니다. 헬라어로 이 세상은 cosmos입니다. 이는 헬라 세계관에 의한 것으로 질서가 잡혀 있는 조화로운 세상을 뜻하는데, 이 조화로운 질서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힘에 논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당시 로마황제가 선포한 Pax Romana의 세계입니다.

세상 권세와 한 알의 밀알 생명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이 세상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밀알 희생정신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고귀한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고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는’ 사회정치적인 사건을 전제하는 희생인 것입니다. 구원론에 관련하여 굳이 말하자면, 행위에 기초한 율법구원론이냐? 혹은 오직 은혜 구원론이냐? 하는 잘못된 교리적인 도식을 거부하시고 세상의 폭력적 구조에 삶에서 저항하는 밀알 구원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12장 말씀을 형상한 일러스트 ⓒGetty Image

예수께서는 세상 권세의 구조적 폭력을 향해 자신이 희생하면 마치 하나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더 많은 밀알 생명들이 태어날 것을(민중 부활) 암시하고 있습니다. 밀알 생명이 많아진다고 해서 저절로 권세자들이 물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들의 저항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야 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무력하게 외쳤을까를 묻게 됩니다. 이는 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말인가? 아니면 세상 폭력 안에 신음하는 민중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시는 외침인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유영모선생의 표현대로 하자면 ‘몸나’가 죽음으로 참 생명 ‘얼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밀알희생 생명구원은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역설(逆說)이자 하늘의 신비(神祕)입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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