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라는 학자가 쓴 『절반의 인민주권』(현재호·박수형 옮김[서울: 후마니타스, 2008])이라는 책이 있다. 1960년에 출판된, 그야말로 정치학 분야의 교과서에 가까운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 분석이 뛰어난 책이다.

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됐을 때 필자도 읽고 감명을 받았고, 한국에 한 번쯤은 제대로 도입되어 정착되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정치체제 형태는 한국에서도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책의 수준에서만큼은 아니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

▲ 1960년 미국에서 출판되어 정치학 분야에서 고전이 된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샤츠슈나이더는 이 책에서 정치를 갈등을 동원하고 관리하며 통합하는 역할로 정의한다. 즉, 정치란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갈등들 중에서 공동체의 유지와 관련된 중요한 것들을 공적 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활동이라고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이미 정치체제 자체로는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수준에는 못 미친다고 한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위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문재인 정권 들어 이제서야 그 모습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지만, 이전 정권까지만 해도 사적인 영역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갈등들이 공적 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환된 예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여간 모든 정치는 갈등을 다루며, 그런 갈등의 중요성에 따라 공적 영역에서 그에 대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어떤 갈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무시되기도 하고, 어떤 갈등은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의 역할인 것이다.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정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논의가 이렇게 진전되면 결론은 명확해진다. 민주주의에서 누가 갈등을 정의하고 그것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가? 바로 정당이다.

정당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

정치와 관련해 이 책이 갖는 특징은 정당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 데 있다. 정당을 사회의 갈등이나 균열을 반영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런 갈등을 일정하게 틀 짓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동적 존재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정당을 종속변수로 상정하는 대부분의 연구들과 달리 정당을 독립변수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책이 출판되었던 시대나 이후 요즘 시대나 의미가 있다.

실제로 샤츠슈나이더의 정당론을 체계화한 대표적 연구자인 사르토르(G. Sartor)나 마이어(P. Mair)가 이를 계승되고 있다. 정당을 독립변수로 상정한다는 것은 정치,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말이다. 그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정의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가치에 부합하는 대안을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당의 주된 기능이자 능력이다. 선거에서 정당들이 제시하는 대안들 간의 경쟁을 통해 정부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 문제와 직결된다.

다시 한 번 앞에서 언급한 것을 이야기 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유권자가 대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당의 기능은 거의 전무했다. 오히려 정치권의 선택에 무관심 하거나 유권자가 끌려가는 상황에 계속해서 연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유권자가 종속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유권자이자 시민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현대적 민주주의, 그 속에서 유권자 혹은 시민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절반(semi-)의 인민주권’으로 압축된다. 샤츠슈나이더가 본문에서 분명하게 밝히진 않았지만, 그것은 접두어 ‘semi-’의 두 가지 사전적 의미, 즉 준(準)과 절반(半)의 의미를 모두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그것은 중요한 속성을 공유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준(準) 주권이다. 주권의 소재가 “1인”에서 “다수”로 변화는 것은 단순히 권력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주권이 갖는 원래의 최고권·절대권의 개념이 판단의 최종단계에서 누구에게 있느냐를 의미하는 ‘궁극적(ultimate)’ 권력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인민주권이 왕이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즉 통치할 대표의 선출이나 현정부의 신임에 대한 판단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런 의미의 변화가 주권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의 권력은 결정의 ‘수’가 아니라 그것이 내리는 결정의 ‘중요성’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치는 않을지라도 충분한 것”이라고 샤츠슈나이더는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기자가 보기에 1960년대 상황을 전제해야 이해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이나 여성 등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이러한 강조는 유의미한 것이었다. 이미 그것이 실현된 것 같아 보이는 현실에서는 이 말은 자칫 동의반복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또한 여전히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선출이나 신임에 대한 판단에 대한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 있느냐로 평가할 때 가능하다. 유권자 혹은 시민이 이러한 완전한 자유를 얻지도 누리지도 못한다면 이 책 이전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한 비평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것이 과제로 다가 오게 된다.

또한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는 양적으로 반토막난 주권이 되기도 하다. 이는 현실의 정치가 갈등의 체제라는 성격과 관련되는데,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갈등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 때문이다. 문제는 한 정치체제에서 어떤 갈등이 어떻게 다뤄지냐의 문제는 대중이 아니라, 정치조직(대표적으로 정당)과 지도자들의 관장사항이라는 데 있다.

즉 현실의 민주주의는 “경쟁하는 정치조직들과 리더(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대안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당대안들이 경쟁적이지 않거나, 제출된 대안이 사회의 갈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할 경우, 오로지 그 가운데서 판단해야 하는 인민의 궁극적 권력의 가치는 절반이 된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바로 이 절반의 현실을 겪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유권자 혹은 시민들이 경험하는 갈등을 정당들이 떠 안지도 포괄하지도 못한 현실이었다. 이번 개헌안 사태에서만 보더라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준-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일반대중의 권력과 한계가 동시에 고려된 새로운 관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 보다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에 가깝다. 즉, 민주주의는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일종의 협력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할 때, 결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과제는 대중에게 불가능한 것을 강요함으로서 그 힘을 엉뚱하게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준(準) 주권의 한계 속에서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정치체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선거를 중요하게 만들고, 투표를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갈등, 경쟁, 조직, 리더십, 책임성이 현대 민주정치의 키워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패거리 정당정치가 아니기를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각 정당들마다 지자체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일각에서 정당 내 지지기반은 없는 현 지자체장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즉 현 지자체장으로 나름 충분한 성과를 거둔 지자체장들이 당내 경선에 돌입할 경우 당내 지지기반이 없어 무너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사실이다. 행정능력을 검증되지 않은 후보들이 당내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당내 경선을 통과해 당내 후보가 되는 경우가 연출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미 모 지역의 도지사 경선에서 이런 잡음이 들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속된 말로 패거리 정당정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바로 이 부분부터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녹차의 꿈  schottroff@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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