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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고, 현실의 냉혹함을 넘어 존재의 신비를 찾으러 떠나자사진-신학(Photheology)선포_사진-신학 1
최병학 | 승인 2018.04.07 00:19

1. 겨자씨와 ‘사진 한 장’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마가복음 4:30-32).”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요단강 북쪽 강가에 많이 자라는 식물인 겨자씨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있다. 정말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작은 씨인데, 일단 자라기만 하면 7m까지 자라, 새가 둥지를 틀 정도로 큰 나무로 자란다. 보잘 것 없는 작은 겨자씨 하나에 놀라운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겨자씨는 새의 모이이다. 먹잇감인 것이다. 이러한 먹히는 생명이 자라 자신을 먹이로 삼는 새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 겨자씨의 비유로, 원수까지도 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여기 사진 몇 장이 있다. 그저 그런 사진 몇 장, 그러나 그 한 장의 사진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겨자씨와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듯, 사진 한 장이라는 보잘 것 없는 도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신학(Photo+Theology)은 사진 한 장에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여 신학적 사유의 풍성함과 신앙의 깊이를 다시금 고민하는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 그 모진 고통을 받으셨으나,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는(혹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은 신앙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뒤흔들 것이다.

2. ‘사진 인문학’에서 사진-신학으로

부산외대 이광수 교수의 사진에 관한 책인 『사진 인문학』 (알렙, 2015)을 보면 ‘사진이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라고 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은 나올 수 없기에 맞는 말이다. 따라서 카메라 앞에 반드시 뭔가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가 된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에 담기는 그 순간부터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 현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곧, 사진 속으로 들어간 모든 시간은 과거에 묶여버린다. 수잔 손탁(S. Sontag) 역시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전해준 구원의 사진첩이다. 창조로부터 타락, 회개와 구원의 길에 대한 모든 순간들이 역사의 현장에 사진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기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무늬와 결과가 갈라지는 것이다.

이광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라고 한다.

사진에 관한 시각과 관점은 롤랑 바르트(R. Barthes)의 풍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의 개념을 알고 구분할 때 풍성해진다. 풍크툼은 라틴어로 점(點)이라는 뜻이며, ‘해독하기 힘든 개별적인 효과’를 말한다. 곧, 화살처럼 꽂혀오는 어떤 강렬함을 뜻한다. 가령, 한 장의 사진이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르고, 나를 상처 입히고, 나에게 얼룩과 흔적을 남길 때 우리는 풍크툼의 효과를 느낀다. 반면, 스투디움은 ‘일반화된 상징’을 뜻한다. 성서 한 구절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 부숴 심령이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배받는 것처럼 한 장의 사진 역시 풍크툼으로 우리 존재를 흔들 것이다.

역사학자 라나지트 구하(R. Guha)는 ‘서발턴(subaltern, 소외된 하위 계층 사람들 곧 하위주체)’이라는 하층민의 역사를 통해, ‘작은 사건’이 어떻게 ‘큰 역사’에 묻혀버리는지 탐구한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작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의 큰 증언’이 될 수 있다. 가령 다큐멘터리 사진 한 장은 ‘현존을 증언’하기 때문에 역사로서의 사진의 본원적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사진은 그 초창기 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한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은 서양 지배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과학은 어느덧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대접받았고 그 과학의 총아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식민 지배 초기에 아시아로 온 유럽의 많은 식민 지배자들은 식민지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

바야흐로 사진 인문학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신학은 사진이 존재의 본질과 현실의 고통을 드러내는 찰나를 신의 이름으로 기억해 내고, 그 사진에 신앙의 깊이를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이제 카메라를 들고, 현실의 냉혹함을 넘어 존재의 신비를 찾으러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렇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찰나의 의미를 영원의 뒤안길에 소식전할 메신저가 될 수 있을진저!

3. 사실, 의미, 의식의 사진-신학(Photheology)

3-1. 사실의 사진: 교리 주입

사진-신학(Photheology)이라는 말은 생소하지만 매력적이다. 사진에도 신학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진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사진에 신학과 신앙이 없다면 그저 한 장의 종이 쪼가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진에 신앙과 신학이 있다는 것은 사진 한 장에 한 사람의 숨결이나 한 세대의 생명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신앙적 생명을 얻고, 창조적인 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사진의 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백승균 교수는『사진 철학을 만나다』(북길드, 2014)에서 사진과 사람의 관계, 나아가 인간 의식과 사진의 관계에 관해 ‘사실의 사진’, ‘의미의 사진’, ‘의식의 사진’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26-37).

여기 <둘째 딸 희진이의 패션쇼>라는 연작 사진이 있다. 사랑하는 딸의 패션쇼를 아빠가 찍은 사진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사진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는 패션쇼를 가능하도록 만든(옷을 입혀준) 언니 희주가 있고, 또 이 모습을 찍은 아빠가 있을 것이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언니와 아빠 모두가 이 사진의 완성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사진은 사실의 기능을 한다. 사진-신학의 지평도 마찬가지다. 사실의 사진은 사실의 신학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를 주입하는 신앙에 다름 아니다. 교리에 그 교리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 그리고 그 교리를 완성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 하에서. 따라서 사람들의 이해 지평(곧, 의미)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사실의 사진은 의미의 사진으로 넘어가고, 사실의 신학은 의미의 신학으로 진행해야 될 것이다.

▲ 둘째 딸 희진이의 패션쇼 ⓒ최병학 목사

3-2. 의미의 사진: 해석학적 신학

<둘째 딸 희진이의 패션쇼>라는 사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해석의 지평은 어떻게 가능할까? 희진이의 패션쇼는 아빠의 사랑이, 언니의 정성이, 그리고 주인공 희진이의 애교가 의미놓여져 있다. 이것은 배고파도,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의미의 차원이다. 세계 최초로 유치원을 창설한 프뢰벨(F.W.A. Fröbel, 1782~1852)은 아동의 내적인 신성이 자연물과의 친근함을 통해 발현된다고 말한다. 가령,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목각기차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향으로 달려간다면, 프로벨은 그 기차를 그저 장남감으로만 여기지 말고 실제 기차로 간주할 것을 주장했다(백승균, 32). 그렇다. 사람은 사실만으로 살지 않고(그리고 이 사실은 경제와 정치, 현실의 모든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잘 알았고, 마귀의 시험을 지혜롭게 대처하셨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4장 1-4절)

따라서 의미의 신학은 해석학적 신학의 지평을 열어준다. 사실의 신학이 단순한 교리 주입이라면, 의미의 신학은 성서 말씀을 인간학적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진 한 장을 통해 사실을 넘어 해석학적 의미의 지평 융합을 이룬 것처럼.

3-3. 의식의 사진과 신학의 사명: 김아타를 중심으로

사진은 불가능한 순간(가령 1/125초~1/15초의 순간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기술이며, 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영원으로 잇게 하는 예술이다. 사진의 특별한 기법에는(물론 디지털 카메라에 해당되지만) ‘연장노출(extended exposures)’과 ‘다중노출(multiple layering)’이 있다. 연장노출은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수십 시간까지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어두고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들의 형체를 모두 사라지게 만든다. 반면 다중노출은 이미지를 수십 번 중첩하는 것으로 사물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흐리게 만든다. 따라서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처음의 이미지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가 “철학적 사고가 지극히 참신한 작가”라 극찬한 박박 민 머리, 동그란 안경, 검정 인민복의 사진작가 김아타는 연장노출과 다중노출 기법을 통해 작품을 창작했는데, 뉴욕의 모습을 찍은 1만장의 사진을 겹쳐 한 장으로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약간의 채도 차이가 있을 뿐 희뿌연 사각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 뉴욕을 촬영한 1만컷 이미지를 하나로 중첩시킨 작품 앞에 선 김아타 ⓒGetty Image

게다가 노자 『도덕경』 5290자,『논어』 1만5817자,『반야심경』 260자를 한자한자 촬영해 각각 한 장으로 포개는 작업도 했는데(성경은 분량이 많으니 ‘요한복음’이나 ‘창세기’만을 한 글자 한글자 찍어서 촬영하기를 추천한다), 이러한 작업 가운데 김아타는 “자신을 구속하던 경전이 솜사탕이 되더라”고 말한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얻고, 없애버림으로써 있음을 드러내는 구도자의 깨달음이다. 예수께서도 깨달은 바 천하 만국의 영광이 결국 사라짐을, 아쉽지만 지금 사랑하는 딸의 모습도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 속에 사라져 감을 깨닫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아셨고, 마귀의 시험을 극복하는 답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다. 의미를 넘어 의식의 변화가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는 것이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4장 4-8절)

사진에서 의식의 변화를 이룬 김아타의 ‘아이스 모놀로그(Ice Monologue, 얼음 이야기)’인 ‘ON-AIR Project’ 시리즈는 영원함을 상징하면서 역사적 의미도 지닌 파르테논 신전, 부처, 마오쩌둥, 피라미드 등의 조형물들을 얼음조각으로 만들고, 그 조각이 점점 녹아 사라지는 과정을 촬영한 작품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3개월 동안 실제 크기의 15분의 1로 얼음조각을 만든 뒤 녹아 없어지는 1개월의 과정을 사진에 담아냈다. “모든 존재는 생멸하고 이 우주에 생멸하는 법을 거스를 존재는 없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가령, 스틸 사진 3장으로 표현한 <마오의 초상>은 권력의 무상함을 떠올린다.

▲ ON-AIR Project, Portrait of Mao(2004) ⓒGetty Image

역시 ‘8 hours’ 시리즈도 베이징, 뉴욕 등 주요 도시들의 도심 특정 장소에서 카메라를 8시간 노출시켜 도시마다 각 한 컷씩 촬영한 작품인데, 번잡한 도시 속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빛으로만 남아 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을 사람들의 빛이라.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장 4절, 9절) 따라서 신학이 사실을 넘어 해석학적 의미를 창출하고,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 때 사진-신학의 사명은 완수될 것이다. 곧, 의식의 사진은 신학의 사명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말한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이렇게도 말했다.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 그러나 사진-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21세기의 신학과 신앙인은 사진 속에서 신학적 의미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최병학  hak99@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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