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개혁교회의 지표로 내세운 교설 중에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을 끼친 것은 ‘의인론(義認論)’ 또는 ‘칭의론(稱議論)’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루터는 주장했는데 이는 로마교회가 믿는 자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교리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하는 쟁점은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루터의 의인론은 로마서 3장 22절을 근거로 성립하였다. 그 헬라어 본문은 <디아 피스튜스 예수 그리스투 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이다. 라틴어역은 per fidem Iesu Christi 라고 번역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속격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을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목적격적 속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애매하다.

이것을 루터는 목적격적 속격으로 간주하여 durch den Glauben an Jesum Christum 라고 번역하였다(1545년판 루터역). KJV는 by faith of Jesus Christ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of의 번역이 애매하다고 보아 RSV는 목적격적 속격을 표현하여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라고 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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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역본들도 대체로 이러한 뜻으로 번역하였다. 한글개역/개정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공동번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카톨릭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200주년역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이 모든 역본들은 성도의 믿음을 통하여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바울의 사상을 새롭게 이해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그것을 학자들은 ‘바울신학의 새관점 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의하면 헬라어의 속격 <예수 크리스투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를 주격적 속격으로 간주하고 <피스티스 πίστις>를 ‘신실함/성실함’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하게 이행하셨기 때문에 예수의 공로로 우리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진정 하나님의 은총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렇게 이해하면 로마서 3장 22절은 행함이냐 믿음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쟁점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은혜로 구원을 받느냐는 쟁점으로 전환된다. 인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바울의 의인론이라고 새롭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을 지지하는 구약성서의 근거는 확실하다. 바울은 헬라어 <피스티스 πίστις>를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의 번역어로 채용한 것 같다. 토라에 정통했던 바울은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를 헬레니즘 세계의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헬라어 <피스티스>를 채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메트 אֱמֶת>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는 ‘진실/진리/성실/참/진실무망’ 따위로 번역되는 명사이다. 구약성서 LXX는 이것을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전도서에서 이 단어는 딱 한 번 언급되는데 한글역본들에서 ‘진리’(개역) 또는 ‘참됨’(새번역)이라고 번역하였다(전12:10).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피스티스 πίστις>라고도 번역된다(히11:1). 히-영 사전은 <에메트 אֱמֶת>를 firmness / certainty라고 정의한다.

<에메트 אֱמֶת>는 <헤세드 חֶסֶד>라는 단어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헤세드>는 백성의 불순종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시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다. 이를 표현하여서 토라는 <에메트 אֱמֶת>란 단어를 사용한다. <헤세드>와 <에메트> 둘이 나란히 사용되면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관용구가 된다.

오경에는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된 구절이 다섯 군데 나온다. (1)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며느리를 구하려고 밧단아람으로 갈 때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인자”<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자기에게도 보여 달라고 기도한다(창24:27). (2) 그 늙은 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친척인 라반에게도 요구하였다(창24:49). (3) 야곱이 에서를 상봉하기 전날 밤에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께 “은혜”<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다(창32:11개역). (4) 임종을 앞둔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아들 요셉에게 부탁하면서 “인애”<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요구하였다(창47:29, 개역). (5) 믿음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시내산에서도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한 백성을 용서해주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진면목은 <락훔>, <한눈>, <에렉 아파임>, <헤세드>와 <에메트>, 다섯 가지의 단어들로 묘사되고 있다(출34:6). 이렇게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나 거짓이 없이 진실하시어 자신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내주기까지 죄인을 구원하려고 애쓰신 은혜를 고백하게 된다.

<에메트 אֱמֶת>는 <아만 אָמַן>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 <아만>은 연약한 아기를 보살피는 부모의 성실함에 비견하여 양육하고 키우는 강력한 후견자의 행위를 가리킨다. 건물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가리키는 명사 <옴나 אֹמְנָה>도 이 동사에서 파생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튼튼한 기둥처럼 강력하게 떠받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이나 장래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확실한 현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함을 확고히 믿는 것이 성서의 믿음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늘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곧 신자(信者)이다.

그러나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박국은 탄식하였고 이 탄식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인용하였다. 하박국의 예언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신실하지 못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밖에 없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자기 백성을 믿어주신 그 하나님의 믿음 때문에 우리 불신자의 구원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의 기반을 제공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시다(신7:9).

야훼는 믿음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항상 자신의 백성을 확실하게 믿어주시어 새 계약을 맺어주셨다(출32~34장; 시89:28). 백성은 늘 계약을 어기고 배신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거듭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주시고 배신자를 다시 품어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믿으셨고 급기야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다. 주께서는 지금도 우리 연약한 죄인을 믿어주고 계신다. 믿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모든 기도를 ‘아멘’<אָמֵן>이란 확언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 곧 <에메트>를 확언하는 고백의 표현이다. 지금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말 참되고 진실하시며 그의 약속은 너무나 확실하기에 가능하다.

이런 취지에서 <피스티스>를 영어로 faith라고 옮기지 말고 faithfulness라고 옮기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하신 품성을 잘 증언하게 될 것이다. 이 번역은 갈2:16에서도 잘 적용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의인론을 이처럼 새롭게 이해하면 개혁교회의 Sola fide와 Sola Gratia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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