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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기복신앙을 넘어서자참된 개혁은 민중 스스로의 실천으로부터
이영재 목사(전주화평교회/성경과설교연구원) | 승인 2018.08.04 21:59

한국교회 안에 기복신앙이 만연하다. 기복신앙은 복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리킨다.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가 아니다. 기복신앙자들은 히브리서 6:14과 같은 성구들을 뽑아서 늘 품에 지니고 다닌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 어구는 창22:17의 LXX을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구절이다.

이 말씀의 바탕에는 창세기 12:3과 15:3-7과 17:2이 깔려있다. 그 구절 바로 다음에 창세기 22:18이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만민에게 복을 끼치는 보편자가 된다는 구원사의 경륜이 담겨 있다.

기복신앙은 끊임없이 복을 달라고 빈다. 개인과 가족의 행복에 집착하여 타자의 행복에는 무관심해지거나 타자와 갈등을 일으키며 산다. 이처럼 자기를 위하여 복을 비는 마음은 모든 사람에 내재된 종교성(宗敎性, religiosity, religiosität)이다.

불안한 미래와 갑자기 들이닥칠 자연재해와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사회에 대한 공포가 복을 비는 염원을 극대화한다. 개인의 안전과 건강과 부와 권력, 그리고 그 개인을 둘러싼 가족과 씨족과 민족의 번영을 염원하는 것이 기복신앙의 요체이다. 기복신앙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고 믿음은 없다.

“산당(山堂)” 철폐와 기복신앙

신명기사가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심각한 문제는 “산당”이다. 열왕기하서 12장이 제기하는 쟁점은 “산당 철폐의 실패”이다. 남왕국 유다 왕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고 바알숭배를 청산하였지만, 산당을 철폐하지 못했다. 왕들은 하나같이 산당을 철폐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주요한 요인들 중에 하나가 “산당”이었다고 신명기사가(DtrH)는 서술한다. 산당은 청산하기 가장 어려운 적폐였다고 비평하는데 역대기사가(Chr)도 산당 때문에 남왕국이 망했다고 본다.

“산당”(山堂)은 히브리어로 <바마 בָּמָה>인데 그 복수형은 <바모트 בָּמוֹת>이다(겔20:29). <바마 בָּמָה>는 본디 어떤 동물의 등어리 또는 몸통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높은 곳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용되었다. 그리스어 번역어 <휩셀로스 ὑψηλός>는 ‘높은 곳’이란 뜻이다(신32:12; 33:29). 산등성이나(삼하1:19) 무덤을 가리키기도 한다(겔4:3).

고고학자들이 게셀 산당을 발굴했는데 산 위에 석회암석을 새긴 암각 제단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뼈들도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산당에서 제사와 더불어 장례도 치렀던 같다. 이것을 영어로 high place라고 옮긴다(왕상11:7). 산당 곧 <바마 בָּמָה>는 본디 가나안 부족이나 이스라엘인들이 제사를 드리던 장소였다(사무엘과 사울 참조). 가나안의 샤머니즘이 산당에서 거행되었다.

솔로몬 시대부터 산당이 문제로 지목되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산당에서 제사를 지낸 장본이다(왕상 3:2-4).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후에도 솔로몬은 모압의 그모스와 암몬의 몰록을 위하여 산당을 지었는데 그것도 예루살렘 앞산에 건축하였다(왕상11:7). 르호보암도 산당을 지었다. 유다 백성 전체가 산당 제사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돌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왕상14:23).

북왕국에서는 여로보암 때부터 백성들이 산당을 짓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았다(왕상12:31).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그 산당에 제사장을 임직시켰다. 자원하는 자는 누구나 산당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왕상13:33). 산당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북왕국은 BC 722년에 망하고 말았다(왕하17:9, 11, 29). 아시리아 정복자들이 그 땅에 산당을 세웠다(왕하17:32).

유다 왕국도 산당을 철폐하지 못했기 때문에 BC 586년에 멸망을 당했다. 포로기 이후에 디아스포라는 “산당을 헐라”는 야훼의 명령이 시내산에서 주어졌다는 과거사를 회고하면서 산당을 헐어버리지 못했던 그들의 죄책을 고백하였다(레26:30; 참조. 민 22:41; 33:52). 남왕국 유다의 왕들도 하나 같이 “산당”을 철폐하지 못하였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란 상투어가 역사서에서 남왕국 유다 왕들에 대해서 되풀이 된다.

아사(왕상 15:14), 여호사밧(왕상 22:43), 요아스(왕하 12:3), 아마샤(왕하 14:4), 아사랴(왕하 15:4), 요담(왕하 15:35), 아하스(왕하 16:4). 이 중 아마샤와 아사랴와 요담과 아하스가 부왕의 대를 이어서 개혁하려고 했으나 산당의 철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히스기야 왕이 산당을 철폐하는 데 드디어 성공하였다(왕하 18:4, 22). 아시리아의 장군 랍사게가 산당을 철폐한 일로 히스기야를 조롱할 정도로 그의 산당철폐는 주변 열강들의 빈축을 샀다(사 36:7).

▲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산당이 훼파된 자리 ⓒ네이버 블로그 “물길손길”

그러나 히스기야는 나중에 바빌론의 신하들에게 성전 기물을 구경시켜 자랑하는 우를 범하여 유다왕국의 멸망에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의 아들 므낫세가 등극하자 다시 산당은 복원되고 말았다(왕하 21:3). 그 후 요시아 왕이 다시 개혁을 단행하여 산당을 완전히 폐지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유다왕국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왕하 23:5, 8, 9, 11, 15, 19, 20). 산당은 이처럼 폐지하기가 어려운 적폐 중에 적폐였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산당의 제사를 맹렬히 비판하였다(사 15:2; 16:12; 렘 17:3; 겔 6:3, 6). 산당에서 인신제사도 이루어졌다(렘 19: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한 것을 예레미야는 탄식하였다(렘 32:35). 산당에서 행음이 이루어졌다고 에스겔은 비판하였다(겔 16:16). 호세아는 아웬 산당의 죄를 고발했으며(호 10:8), 아모스는 이삭의 산당을 저주했고(암 7:9), 미가는 예루살렘을 가리켜서 ‘유다의 산당’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미 1:5).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산당들의 제사행위에 대해서 매우 노여워하신다(시 78:58).

산당과 민중의 관계

야훼종교는 가나안 주민의 민속신앙을 부정하였다. 산당에 대한 대안사상으로 야훼 유일신 신앙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민중은 야훼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대 가나안의 농경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가 산당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바알은 가나안 주민들의 주신으로서 기후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신전은 지방의 산당들과 연합하여 통치체제를 형성하였다. 산당은 농민들의 신전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야훼신앙은 민중의 산당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던 것일까?

성서는 그 까닭을 창세기에서부터 찬찬히 설명하고 있다. 농사를 지었던 첫 사람은 가인이었다고 하면서(창 4:2) 농사와 우상숭배의 관계를 기원론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선악과를 먹고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기중심주의로 살았던 자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기원론이다. 가인이 농사를 짓되 타자를 이용하여 착취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사화(privatization)의 사람이 되었다. 인류사에서 최초로 타락한 자가 농부라는 것이 성서의 논조이다. 성서는 농업 자체를 죄의 결과라고 지목한다(창 3:19, 23; 4:2, 12).

인류사에서 농사는 BC 10,000년 경에 시작되었다. 지금의 터키 동부지역과 가나안의 여리고 지역에서 최초로 밀과 보리를 재배하였다. 괴베클리 테페와 차타휴이크의 발굴 결과 농업혁명의 배후에는 종교제의가 있음이 드러났다. 이 유적지 인근에서 인류 최초로 밀과 보리가 재배되었다. 이를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농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풍요한 삶이 전개되었다는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은 지금 무너져 낡은 이론이 되어버렸다(고든과 유발 하라리 참조). 불행하게도 농업혁명으로 인간에게 불평등한 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농업생산량의 증가를 위하여 대단위 농토를 개발하기 위하여 집단적 노예노동이 출현한 것이다.

성서의 야훼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신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의 탐욕이 증대하여 힘센 자가 더 많은 농산물을 차지하게 되었고 약한 자가 적게 가지게 되는 인간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가인은 농업혁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아벨은 사회적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가인은 그 이름의 뜻처럼 사사화(privatization)의 삶을 살면서 욕망을 충족하였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폭력이 편만해졌다.

괴베클리 테페 인근에 차탈휴이크라는 또 다른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풍요의 여신을 형상화한 신상이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지의 탐사 결과 농업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신전의 제사장임이 드러났다(코뱅 참조). 농업혁명을 주도한 신전종사자들은 “신탁(oracle)”을 매개로 사람들을 신전으로 유도했다. 마을공동체를 이끌었던 주술사(샤만)들이 농업혁명 이후 우상숭배 신전의 제사장으로서 농산물과 생산수단을 독점하였다.

처음에 제정일치의 부락공동체가 도시문명의 시대에 이르러 제정분리의 사회로 분화하는 과정에서 왕정체제가 확립되었다. 애초에 들녘이나 산등성이에 있던 산당은 이윽고 도성 안에서도 세워지게 되었다. 도시의 신전은 모든 생명을 살리라는 농자(農者)의 사명(창1:28)을 저버리고 사사화의 탐욕에 저버린 기복신앙을 부추겼다.

유일신 신앙과 산당의 기복신앙

야훼가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유일신 사상(신6:4; 슥14:9)은 모든 다신론의 계급체계를 부정하는 평등사상이다. 신들의 전쟁은 모든 도시국가들의 전쟁을 신화화한 것이며, 신들의 계급체계인 만신전은 만국을 평정하고 권력을 잡은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는 수도의 신전에 봉안되었다. 만신전은 고대노예제사회를 강고하게 지배한 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부와 권력을 선망하는 민중의 간절한 여망을 투영하고 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모두 왕들의 사적 소유물로 전락하였고 노예노동의 주력부대를 형성하였다. 부락공동체는 도시국가의 영토에 종속되어 그 지배체제를 떠받치는 기초단위로 전락하였다.

제국의 지배체제를 온존케 하는 기초 단위로서의 민중은 타락한 민중이다.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와 평등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중은 지배체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성서는 이것을 가나안의 주민으로 표상한다. 아모리, 브리스, 히위, 헷, 가나안, 여부스, (기르가스, 신7:1). 이상의 여섯 내지 일곱 부족이 거명되어 있다.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진입하여 이들을 심판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도시국가에 종속된 모든 폭력문명의 잔재를 깡그리 청산하기 위해서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다 지워버려야 했다(참조. “진멸하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를 거쳐서 사사 시대에 이르도록 가나안 부족의 진멸은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다.

가나안 부족의 진멸 실패는 과거사가 남긴 적폐 청산의 미완을 의미한다. 이로써 가나안에서 오래 동안 전래되어 오던 산당의 민속신앙과 그 토대 위에 폭력을 휘두르던 도시국가의 잔재는 그대로 남아서 이스라엘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에서 불평등과 노예제도와 도시국가의 폭력성이 독버섯처럼 돋아 올랐다. 마침내 복지의 땅이어야 했던 가나안 땅은 마침내 왕정체제와 신전종교의 복고를 맞이하여 다시 폭력과 착취와 불평등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모든 복고주의의 배후에 가나안의 “산당” 전통이 깔려 있었다.

맺는 말

가나안의 “산당”은 풍요를 기원하는 개인 기복의 신앙이었다. 여리고 평원의 농업혁명 이후로 참된 평등과 자유의 사회를 가로막고 성공과 물질축복을 기원하는 민중의 왜곡된 염원의 종교적 표상이 산당이었다. 산당의 철폐 없이 민중의 과거사 청산도 없었다.

민중이 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모든 산당 체제의 잔재를 스스로 청산하는 개혁이 있어야 참된 역사의 진보가 가능해진다. 민중이 한 분 창조주 야훼 하나님을 믿고 깨달아서 한 마음 한 뜻이 될 때, 인류보편의 사랑을 실천하는 민중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민중이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이 없이 역사의 진보는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맥락에서 산당이 된 예루살렘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새로운 민중의 성전을 건축하신 것이다.

이영재 목사(전주화평교회/성경과설교연구원)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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