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역사를 걷다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선거 및 세대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는 오세제 선생님께서 얼마전에 끝난 멕시코 대선에 대한 분석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귀한 글을 보내주신 오세제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에큐메니안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낯설고 왜곡된 상이 많은 멕시코에 대해 알아가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8년 7월 1일 멕시코는 8,925만명의 유권자가 대선과 총선을 포함해 지방선거까지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의 선거를 치렀다. 이날 멕시코는 대통령 외에도 상원의원 128명, 하원의원 500명, 멕시코시티 시장과 8개 주 주지사, 1천600명의 기초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의원을 뽑았다. 총 3천400여 명의 공직자를 선출한 것이다.

2018 멕시코 최대 선거가 막을 내렸다

선거인수 89,250,881명 중 56,611,027명이 투표하여 총 투표율이 63.4%로 나타났다. 선거 결과도 놀라웠다. 지난 89년간 집권해온 우파정권이 몰락하고 압도적인 지지로 좌파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더구나 여성 후보가 상원에서 51%, 하원에서 49%나 당선되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상원의원이 남성 상원의원보다 많은 나라가 되었다.

▲ 멕시코 대선 후보들의 지지율 ⓒ엘 코레아노

대통령 선거에서는 좌파 민족주의 성향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 64) 후보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 압승을 거두었다.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암로(AMLO)’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멕시코 우선주의’를 외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가장 강경하게 비판해왔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테크노크라트들이 정치권의 주류인 멕시코 정치권에서 ‘정당(party) 교체’가 아닌 ‘체제(regime) 교체’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번 선거의 성격을 평가했다.

멕시코 선거관리위원회는 7월 1일 밤 예비개표 결과를 통해 중도 좌파 정당으로 구성된 ‘함께 만드는 역사’ 선거연대의 오브라도르(이하 암로) 후보가 53~53.8%를 득표해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그는 53.2%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연대에는 암로가 속한 국가재건운동(MORENA)과 노동자당(PT), 사회연대당(PES) 등이 참여했다. 암로는 승리 연설에서 “부자와 빈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이민자 등 모든 시민들을 대변하고 존중할 것”이라며 “국민 통합을 이루고, 부정부패 척결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밝혔다(한국일보 2018. 7. 2., 김정우).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부정적 보고서와 전망을 발표하고 있다. Goldman Sachs(골드만 삭스)가 2018년 3월 발표한 라틴아메리카 경제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암로 후보가 당선되면 현 ‘페냐 니에또’ 정부가 진행한 개혁 및 프로젝트를 모두 무산시킬 가능성이 높아, 정권 초기 운영의 비효율성에 의한 시장 불안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멕시코 Citibanamex 은행과 글로벌 신용평가기관인 Fitch Ratings은 암로 후보가 당선될 경우, 현 니에또 정부가 진행한 에너지개혁 등 정부 개혁 폐지로 멕시코 경제는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J. P. Morgan은 암로 후보가 당선될 경우, 신공항 프로젝트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적으로 멕시코 투자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Bloomberg가 6월 초 쓴 기사는, 암로 후보가 1,530억 달러의 현재 진행 중인 대형 프로젝트 계약들을 무효화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향후 진출기업에 다양한 혜택이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드물게 신용평가 기관인 S&P나 멕시코은행연맹(ABM)은 멕시코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은 독립적이기 때문에 암로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멕시코 경제가 크게 변동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2018.7.13., 송준하 멕시코시티무역관, 전국무역인연합[cafe.daum.net/ktrc21])

간략한 멕시코 근대사

고대에는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중미지역을 지배하고 문화를 꽃피웠던 멕시코는 1519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무너져 300년간 식민지화되고 통치를 받았다. 이후 아구스틴이 주도해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하고 1대 황제로 추대되었다. 1846년에는 텍사스 독립과 미국 합병을 둘러싸고 멕시코 미국 전쟁이 벌어져,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고 전쟁배상금 지불을 위해 1,800만달러를 받고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주 등 한반도의 15배 넓이의 땅을 미국에 넘긴다. 멕시코 영토의 절반을 빼앗겼고 샌프란시스코의 금광과 유전과 대평원을 가져간 셈이다. 멕시코의 뿌리깊은 반미 민족주의 의식이 이 때부터 확고해진다.

1876년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포르피리오 디아스(1830~1915) 장군은 35년 뒤 혁명 세력에게 밀려날 때까지 강력한 과두지배 체제를 구축하였고, 1883년의 토지조사법에 입각해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수탈한 토지를 지방 호족들에게 분배하였다. 그 결과 1910년에 이르면 전체 토지의 97%가 830여 명의 대농장주에게 집중되었다. 반면에 총인구의 88.4%가 대농장의 농업노동자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이들이 받은 임금은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많은 농업노동자들이 농장주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대로 특정 농장의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핵심적 사회 의제는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인 ‘사파타’는 1911년 11월 ‘아얄라 강령’을 발표하고 무장 항쟁에 돌입했다. 그의 혁명이념은 ‘토지와 자유’였다. 토지 국유 원칙을 명시함으로써 토지 개혁의 근거가 된 1917년 멕시코 혁명 헌법 제27조 신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파타는 1919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1920년에는 ‘카란사’, 1923년에 ‘판초 비야’ 그리고 1928년에 ‘오브레곤’ 등 진정성 있는 혁명지도자들은 전부 희생된다. 중도개혁 노선을 내세웠던 실용정당인 제도혁명당(PRI)은 1929년부터 집권을 시작한다.

▲ 라자로 가르데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 ⓒWikipedia

1910년 11월 발발한 멕시코 혁명은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서, 그 기간은 1910년~1942년으로 볼 수 있다. 1910년은 마데로가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선언하여 혁명을 촉발시킨 해이고, 1942년은 카르데나스(집권기 1934~1940년) 대통령이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1790만헥타르의 토지(국토 총면적의 9%로 경작 가능한 토지 대부분 포함)를 분배하고 노동개혁과 함께 석유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혁명을 수행했다.

뒤를 이은 카마초 대통령이 미국과 혁명전쟁·토지·석유에 대한 배상 협상을 마무리해 혁명을 완결지었다. 30여년에 걸친 멕시코 혁명 기간 중에 100만 명이 넘는 멕시코인들이 희생됬으나 이를 통해 대농장 중심의 대토지 소유제와 채무노예제가 거의 해체되고, 혁명적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멕시코 혁명은 정치권력의 교체를 넘어 기존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이라는 측면에서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카르데나스는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계기로 말기에는 온건 노선으로 선회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카르데나스의 시대를 ‘멕시코 혁명의 완결’이라기보다는 일당 지배 체제의 형성 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카르데나스는 국민혁명당을 멕시코 혁명당(PRM)으로 개편하고 농민, 노동자, 교사와 하급 관리, 군인 등 혁명 참여 세력을 ‘혁명 정당’으로 통합시켜 향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될 일당지배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멕시코 혁명당은 1946년 제도혁명당(PRI)으로 개칭했다. 1989년 바하칼리포르니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인 국민행동당(PAN) 후보가 처음으로 주지사에 당선될 때까지 연방 정부는 물론 주 정부의 권력도 놓친 적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1994년 1월 1일 공유지 에히도에 대한 원주민 인디오의 권리를 보장한 헌법 제27조를 무효화시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발효에 때맞춰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 해방군(EZLN)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봉기를 시작한다.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투쟁은 멕시코혁명의 전설 사파타의 정신을 지향한다. 그는 ‘토지와 자유’를 지향했지만 1920년대 이래 혁명 후 원주민들에게 남은 것은 일당 독재 아래 약간의 토지 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투쟁은 ‘제2의 사파타 운동’인 셈이다.

남미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 심화에 맞선 사회운동으로서 사파티스타 해방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게릴라 운동이다. 고전적인 게릴라 운동이 냉전 시대에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했다면, 사파티스타 운동은 탈냉전 시대에 원주민 특히 농민의 권리 회복과 지역자치, 여성의 정치 참여, 환경보존과 평화 구현을 강조하는 색다른 유형의 투쟁이었고 따라서 ‘탈근대적인(post-modern)’투쟁이라고도 한다.

그 의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과 대안 모색이다. 1980년대 초 이래 멕시코에서 선도적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국가주도의 경제 체제를 시장 주도 체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으나 부작용이 심각하다. 둘째, 원주민 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을 보존하려는 지역 차원의 사회운동 또는 문화적 저항과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이다. 셋째, 사파티스타 운동이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원주민이 주체가 된 민중운동에서 법적 개혁운동으로, 나아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다양한 집단의 운동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검토하면서 자치의 구체적인 실현 양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박구병 2013).

오세제(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ohsj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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