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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軸)의 시대’에서 오늘을 배운다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중심하여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8.12.05 19:35

『축의 시대』(정영목 옮김[서울: 교양인, 2010])란 책이 번역 출판되어 널리 읽힌 지 몇 년 되었다. 본 책은 가톨릭 여성 종교학자로 알려진 카렌 암스트롱이 철학자 칼 야스퍼스 역사 철학의 핵심개념인 차축(車軸)시대에 터하여 인류정신 문명의 첫 번째 도약이라 할 수 있는 종교탄생의 실상과 의미 및 그 내용을 깊게 탐구한 책이다. 2006년에 출간된 이 책의 본래 영문제목은 『대전환』 즉 “The Great Transformation”으로 되어 있었으나 역자는 본문 중에서 저자가 많이 원용한 ‘차축시대’란 개념을 앞세워 다소 평범했던 책의 제목을 신비화했고 그 의미를 배가시켰다.

본 책의 부제가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그리고 구약성서 예언자인 예레미아 시대의 세계’로 되어 있는 것은 종래의 기독교 중심적 세계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의도함이었다. 기독교에 앞서  이미 역사상에는 대전환의 軸들이 존재했던 까닭이다. 이미 이슬람교의 긍정적 이해에 기여한 『신의 역사』를 펴냈으며 전직 수녀였으나 그를 벗고 여성 종교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전적 삶의 이야기를 담은 『마음의 진보』란 책들이 이런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잘 보여준다.

최근에는 기독교 비판서인 리차드 도킨스의 『God Delusion』에 답하여 『신을 변호함』이란 책자도 펴낸 바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를 시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교의 핵심과 본질을 비켜간 채 현상에만 눈을 돌린 과학자에 대한 일침이었을 뿐이다.

본래 평화의 도구여야 할 기독교를 비롯한 뭇종교가 탈(脫)현대의 역작용으로서 교리 지상주의(근본주의)를 표방한 채 갈등과 폭력의 산실로 변질된 현실을 정확히 그려 낸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본 책에서 종교탄생의 순간, 곧 축의 시대(BC900 - BC200)로 눈을 돌렸고, 종교 본연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새롭게 시도했다. 차축시대의 에토스를 오늘에 되살려 인류의 당면 난제와 종교 미래에 대한 답을 그곳에서 찾고자 함이다.

여기에는 차축시대로부터 거지반 3000년이 지났으나 인류가 당시의 통찰을 한 번도 제대로 넘어서 본적이 없었다는 저자의 확신이 자리한다. 지금도 저자는 인류 4대 문명의 본질인 유(도)교, 히브리종교, 힌두(불)교, 그리고 희랍철학은 지금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곱씹어야 할 혜안의 寶庫라 믿고 있는 것이다.

1.

본래 축(軸)의 시대란 말은 철학자 야스퍼스가 1949년 출간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 대하여(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에서 밝혔던 역사철학적 개념이었다. 軸이란 말은 물건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의 밑받침을 뜻하는 것으로 인류의 역사를 이전/후로 나눌 수 있는 획기적인 정신적 힘을 함의한다. 기원전 8세기에서 2세기까지의 600여년의 기간동안 각 대륙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사유의 창조적 혁명, 새로운 종교적 에토스의 출현을 인류 역사의 基軸 혹은 車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본 책의 저자가 추종했던 야스퍼스의 역사철학, 곧 축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역사의 정점으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과의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 역시도 좁게는 軸의 시대의 히브리 사상가인 이사야, 예레미아, 호세아 등의 예언자 반열에서 이해되며 넓게는 공자, 석가와 더불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삶의 정조(ethos)와 규범을 수여한 위대한(massgebend) 인물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벌어진 두 ‘칼(Karl)’들, 곧 칼 야스퍼스와 당대 뿐 아니라 지금도 명성이 유별난 세계적 신학자 칼 바르트 간의 철학적 신앙과 계시신앙의 논쟁은 참으로 대단했고 종교다원주의가 회자되는 지금 더더욱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당시 야스퍼스는 바르트적인 기독교 중심의 계시신앙을 히틀러의 ‘정치적 독재’에 비견할만한 ‘종교적 파시즘’으로 규정했고 바르트는 이런 야스퍼스를 향해 자유란 이름하에 인간의 태생적 한계와 그리스도의 신체성을 부정한 영지주의자로 치부했다. 한 때 그리스도교 수업을 받았던 가톨릭 수녀로서 카렌 암스트롱 역시 이런 신학적 논쟁사(史)를 모를 리 없을 터지만 그녀는 야스퍼스의 역사철학 논지를 본 책 『軸의 시대』를 통해 종교간 갈등으로 인해 세계평화가 위협받는 오늘의 지구촌 현실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저자의 비교종교학적 안목과 영성적 깊이 그리고 종교간 평화를 위한 실천적 삶에 근거한 이론적 성찰의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결코 야스퍼스를 모방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야스퍼스를 넘어서는 지점은 軸의 시대에 새로운 종교적 에토스(영성)가 생겨날 수 있었던 사회, 역사적 공통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이다. 軸의 영성의 개화(開化) 속도는 저마다 달랐으나 폭력이 일상이던 정황에서 인간 내면에로 방향을 돌렸던 것은 거지반 같았다는 것이 저자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2.

이 책에서 저자는 軸의 시대를 살았던 문명과 종교의 발생지인 네 민족들-인도, 이스라엘, 중국 그리고 그리스-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들 지역 간 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되 급격한 도시화, 그에 따른 사회 경제적 변화 또는 전쟁과 폭력, 약탈의 시대를 살면서 그로부터 비롯한 악순환을 벗기 위해 그들이 찾은 공통적 대안이 자신의 내면의 발견이었고 그것이 종교적 에토스로 승화, 발전되었음을 적시한 것이다. 주지하듯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는 ‘베다’시기를 거치면서 인도를 점령한 아리아인들의 거듭된 폭력적 영토정복사의 한 가운데서 태동되었다. 정복자들에 의해 야기된 폭력적 갈등 상황에서 인간 삶이 ‘고통’(두카, dukkha)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절대(무조건)적 실재와의 본성적 일치를 현실에서 강력히 갈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주(브라만)를 자신(아트만)이라 믿으며 폭력을 승화시킨 자기 성찰의 종교, 힌두교의 탄생배경이다. 여기서 구원 곧 ‘목샤’(Mopkksha)는 인간의 보편적 정황인 ‘두카’를 전제로 이웃의 고통과 여실히 共感(공감)하는 성찰적 행위에서 비롯한다. 얼룩진 폭력으로 현실이 고통인 정황에서 우주를 자신(아트만)속에서 만나는 자기성찰의 종교, 軸의 영성(共感)이 태동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다.

최근 『공감(共感)의 시대』를 출간한 문명비판가 제레미 리프킨이 자신의 논지 ‘共感’을 『軸의 시대』의 그것과 중첩시킨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하튼 저자는 불교로 이어지는 인도의 종교가 더 이상 인간 밖의 인격 神(베다)이 아니라 내면적 자아를 지향했음을 강조하며 軸의 시대의 아시아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이와 동일선상에서 이스라엘 종교의 탄생을 통찰할 수 있었다.

부제에서 언급된 대로 저자가 특별히 관심하는 인물은 슬픔과 비애의 예언자로 알려진 예레미아(BC. 627-580)였다. 주지하듯 예레미아 당시 서아시아 지역에서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도 通念(통념)과 다른 길을 제시했던 이질적인 예언자였다. 이스라엘이 하느님 義(의)를 외면한 채 외세의 불의한 권력에 의존하면서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을 무렵 예레미아는 오히려 그런 이스라엘의 멸망을 눈물로 선포했던 것이다.

민족의 파멸과 멸망을 외쳐야 할 자신의 운명을 그치고 싶었으나 자신 속에서 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인 것을 자각했으며 자신의 고통과 슬픔 역시도 하느님의 아픔인 것을 감지한 것이다. 이를 神에게 압도당한 자기 상실(비움)의 경험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급기야 바벨론 포로가 되어 국가를 잃고 하느님 법궤마저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예레미아는 외부의 적을 향한 분노에 앞서 오히려 민족 차원의 회개를 말했고 하느님 마음을 회복시키는 일, 곧 내면의 종교적 영성(회개)를 강조했다.

이점에서 저자는 민족 내부의 폭력과 타락 그리고 바빌론 포로기의 억압 속에서 예레미아를 비롯한 이사야, 아모스, 에스겔 등에 의해 軸의 종교가 탄생했고, 그것이 예수에게로 이어졌음을 역설했다. 중국에서 출현한 공자의 유교 또한 주나라 괴멸이후 춘추전국 시대의 무질서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天命(천명)이 붕괴됨으로 기존 제의, 예법이 무시되었고 폭압적 졸부가 양산되는 현실에서 공자는 타인과의 공감적 연대를 뜻하는 인(仁)을 設(설)했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仁의 다른 말인 忠恕(충서)는 주지하듯 ‘종일토록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고통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어는 경우든 다른 이들에게 고통 주는 것을 삼가는 마음’을 뜻한다. 폭력과 고통의 상황에서 자신은 물론 타인의 약함의 경험을 연결시켜 사유하라는 황금률인 공자의 仁은 분명 軸의 영성의 동아시아적 표현이었다. 유교적 차원에서 볼 때 軸의 핵심은 남의 고통과 소통 할 수 있는 서(恕)로서, 그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인간 누구라도 영적,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영적 평등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스의 경우도 물론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본래 목장형 풍토에서 태동된 그리스 문명은 자연(우주)을 코스모스라 命(명)할 만큼 합리성의 산실이었으나 거듭된 전쟁의 와중에서 인간에 대한 잔혹사가 끝 모르게 펼쳐졌던 상처투성이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悲劇(비극) 작가로서 悲劇(비국)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정화(카타르시스)시키고자 했다. 타자와 더불어 눈물 흘릴 수 있는 힘(共感)이 비극적 경험을 통해 생기(生起)할 수 있다고 믿음 것이다.

이런 비극적 전통과는 방식이 다르긴 했으나 소크라테스 역시 후일 ‘軸의 시대’에 걸맞게 인간의 인식을 전환시킨 존재였다. 이전 사람들이 悲劇을 통해 상호간 유대와 소통을 꾀했다면 소크라테스는 타자를 향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거듭 반성하고 질문하되 항시 알 수 없음(無知)를 인정함으로 수용적 평화를 삶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無知의 知를 통해서 삶의 깊은 신비를 경험할 수 있게 한 소크라테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든 옳게 행동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3.

이렇듯 축의 시대의 종교가 고난과 역경, 전쟁과 폭력 즉 일체의 한계상황 한가운데서 창발된 까닭에 종교로 야기된 오늘의 갈등과 증오, 불관용의 해결 역시 축의 시대의 종교적 통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 책의 혜안이자 주장이다. 지구 공동체의 갈등과 생태파괴의 치유를 위해 軸의 시대의 종교적 에토스(영성)를 저자는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우선 축의 시대 종교가 인간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을 저자는 인간 내면성에 대한 종교적 성찰이라 했다. 각각의 풍토에서 그것이 초월이든 자연이든 간에 인간 밖을 향했던 종교가 인간 내면성에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하늘을 향한 제의, 예배보다는 자기 속의 神에 대한 자각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까닭이다.

동학의 언어로 말하면 향벽설위(向壁設位)가 아닌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인간 속의 神, 이를 소위 後天(후천)시대의 종교적 양식이라 부르는 학자들이 있다. 예컨대 多夕(다석) 유영모나 바보새 함석헌이 그렇고 얼마 전 타계한 巨儒(거유) 유승국 같은 이가 바로 그들이다.

이를 근거로 차축시대 종교들은 회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고와 삶의 고통에 진실 되게 직면할 것을 가르쳤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나라는 망했고 가진 자의 폭정은 끝을 몰랐으며 삶의 여건이 달라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삶 자체가 고난인 까닭에 그를 회피하지 않았고 맞서 대면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에 충실 할 때 오히려 이웃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결국 자신 속의 신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영성의 빛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軸의 시대 종교가들은 자신의 내면적 성찰-자기 안의 神-에 근거한 고통에의 共感, 곧 공감의 영성을 말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종교의 본질은 어느 지역에서건 항시 자기부정(克己)과 무관할 수 없었다. 자신을 비워야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고 세상도 옳게 세울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소리를 토한 것도 자기 부정의 결과였고 공자의 仁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으며 삶을 정화시키는 희랍적 비극의 힘 역시 같은 맥락일 수밖에 없고 貪嗔痴(탐진치)의 불꽃을 소멸시킨 니르바나의 실상과도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창시자들은 세상의 고통에 맘껏 공감할 수 있었던 위대한 인격들로서 우리를 그 길로 부르는 구원자가 되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 니르바나의 길에 이른 覺者(각자)인 붓다, 克己復禮(극기복례)를 이룬 공자는 폭력이 아닌 고통에의 공감을 통해 새 길을 연 존재들인 까닭이다. 현존하는 위대한 覺者들, 즉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공자를 오로지 軸의 시대의 빛에서 이해할 때 그들을 창시자로 하는 종교들이 목하의 추한 현실을 벗고 제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본 책의 결론일 것이다.

4.

그렇다면 오늘의 종교는 왜 이런가?에 대한 답 역시 쉽게 나올법하다. 교리적 틀 속에서 갇혀 開闢(개벽)의 실상을 드러내지 못하며 탐진치의 독(毒)에 빠져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렸고 도토리 키 재기 式(식) 우월다툼의 올무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실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자신이 아닌 타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종교는 아무리 멋지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차축시대의 종교이길 포기한 것이다.

비록 현실 종교가 치장된 한강처럼 크고 넓어졌다 한들 그 물 마시려 머리 숙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死水(사수)일 뿐이다. 이점에서 軸의 시대, 軸의 영성은 강원도 산골에서 시작된 原流(원류)로 비유될 수 있겠다. 모든 종교가 軸의 시대의 원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문제라도 해결 못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본 책을 통해 종교로 인해 세상이 위험해진 시대, 세상이 종교를 염려하는 현실에서 軸의 시대의 종교적 비전, 곧 고통을 공감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超越’(초월)의 길인 것을 새삼 각인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종교인 각자가 자기 종교마저도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신 속의 탐욕, 이기심, 증오, 폭력을 넘어서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성장하여 ‘사랑’이 되는 방식으로의 자기초월, 이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다른 종교를 내 종교처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란 것이다.

하지만 본 책에 대한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를 지난 시절의 ‘차축시대’로 초대하는 것보다 오늘의 시대를 두 번째 軸의 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자도 적시하듯 과거의 차축시대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그렇기에 軸의 종교 창시자들 역시 남성들뿐이었다. 하여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기를 소망하며 절규했던 비구니 스님의 限(한)이 가슴에 전해온다.

또한 최초의 軸의 시대가 각 지역에서 인간 정신이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영성(포스트 세속)의 시대라 불리는 두 번째 軸의 시대는 분화된 정신들이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분화되어 체계(교리)와 형식을 갖춘 종교가 아니라 본래 종교가 지향했던 원초적 영성이 그들 각각의 정체성 이 될 때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야스퍼스가 이를 ‘상호불가결한 보충’이란 말로 표현했으나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종교다원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영성, 명실공히 後天(개벽)의 자리에서 하나 될 종교의 모습을 우리 동양인들이 좀 더 잘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차축시대의 종교유산을 거지반 모두 지니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대한민국 밖에 없다. 나아가 이들을 창조적으로 통합(연결)시킨 동학, 원불교와 같은 한국적 자생 종교들도 있는 까닭에 카렌 암스트롱의 생각에 따른다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이 땅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필자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多夕 유영모 깊이 다시금 생각하고 싶다. 기독교는 물론 유불선 모두 하늘로부터 계시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라 믿었고 자신의 소화력으로 이들 종교를 능히 수용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며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했던 多夕의 기독교 이해는 축(軸)의 시대를 넘어서있는 듯 보인다. 없이 계신 하느님 속에서 유불선과 기독교의 영성은 조금도 다르지 않고 다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를 意中之人(의중지인)으로 삼았기에 기독교의 정체성 역시 그에게 포기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분화된 제종교를 하나로 수렴시킬 수 있었던 多夕신학의 공헌은 이점에서 의막 크다. 다른 종교들 역시도 분화된 종교적 에토스를 통전시킬 수 있는 논리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공감의 확장에 더 큰 뜻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5.

본 책이 말하듯 오늘 우리 시대가 공감의 시대인 것을 먼저 숙지할 필요가 있다. 중세기적 신앙의 시대도 아니고 근대 계몽주의가 표방한 이성만능의 시대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본래 종교의 역할이 공감하는 인간상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지적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이 땅에 집적된 축의 종교유산들로 인해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공감하는 인간(Homo Empatipicus)을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으로 양육하는 과제를 품어야 할 것이다. 축(軸)의 종교들 그것은 우리의 과거지이만 그것을 망각하면 인류의 미래도 없다는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고통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공감의 구체적 표현이자 종교인의 기본 삶인 것을 재천명해야한다.

애시당초 종교는 인류의 고통 속에서 生起했던 것이기에 인류가 당면한 고통에 세속의 어느 단체, 어떤 이념보다 한걸음 먼저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다. 북쪽을 돕는 물꼬를 먼저 여는 것도 한국적 상황에서 대단히 중요한 종교인들의 과제이다. 고통 앞에서 교리, 교파를 떠나 의연히 하나 되는 모습을 앞서 보여주는 것이 각각의 종교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핵에너지의 위험을 직시하되 원전 반대차원을 넘어 종교인들의 구체적 삶의 양식을 달리 만드는 공동의 실천강령을 채택하는 일도 긴급한 사안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삶 깊숙이 파고든 ‘죽음 밥상’의 실상을 종교적 감수성을 갖고 파헤쳐서 문명비판적인 ‘생명 밥상’창출의 길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옳다. 이를 위해 종교인들은 세상에 자기 부정의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종교의 모습이 있어야 종교의 미래가 있다. 종교에 자기 부정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 일 수 없다. 만약 범종교적 차원의 회개(정화)운동이 사회를 향해 펼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감동이 될 듯하다.

물론 자기 부정의 구체적 실례가 언급되고 그 구체적 로드 맵이 종단차원에서 제시되어야 한국사회가 종교를 믿고 기다리며 끝까지 따라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각 종교의 창시자들의 정신세계와 합일할 수 있는 삶의 동시성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창시자들의 삶의 재현을 위해 선의의 경쟁도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종교의 정신세계 자체를 충족히 배우는 일이다. 따라서 이웃종교인들과 며칠간이라도 함께 살며 수행을 배우고 경전을 읽는 삶을 나누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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