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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참된 레트로토피아를 향하여 (애3:19-33 히6:9-20 눅1:68-79)대림절 셋째 주일(12.16)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8.12.19 01:13

1.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으로 돌아가자?

현대성 이론의 대가인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 속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과 사회의 조건을 성찰한 학자입니다. 지속적으로 근대성의 제 문제들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소비사회 등을 연구해왔습니다. 언제나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물어온 지성인입니다.

▲ 작고하신 폴란드 출신의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이번에 출간된 그의 유작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아르테, 2018)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또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로 숨어드는 한(恨) 많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게, 그리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미래의 소망에 관해 들여주는 속삭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트로토피아는 무슨 뜻일까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입니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 놓이게 된 이들이, 분노와 절망에 내몰린 이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은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합니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나라를 돌려달라(My Country Back).”

2016년 말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트럼프 캠프의 구호는 잘 아시겠지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습니다. 영, 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지구의 경찰국가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바우만에 따르면 과거로 회귀하려는 것은 4가지로 나타납니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입니다. 먼저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대 주권국가의 핵심은 왕권신수설입니다. 17세기 서유럽 고유의 정치 시스템으로 보급되어 서유럽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세계화된 체제입니다. 중세 말기 영주들의 권력이 약해지고 국왕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짐이 곧 국가”라고 말한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근대 주권국가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주권국가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국가의 폭력은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전체주의적 이념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몽주의 이후 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천부인권설, 주권재민의 시대가 왔던 것입니다.

▲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지금 들끓는 전쟁과 테러, 난민과 난민 반대, 백인우월주의 및 인종차별 등은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부족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 정책의 실패 이후, 좌파의 복지, 평등을 비판하고, 급격히 확대되는 우파의 경제정책(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복귀를 말합니다. 평등보다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와 성장을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자기애(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입니다.

2. 아침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며

오늘 신약성서의 주인공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살았던 신약 시대가 바로 레트로토피아, 곧 실패한 낙원을 기다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가 태어나 예비할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사가랴는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의 경건한 전통을 이어온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6에 의하면 “의롭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키는”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본문은 바로 사가랴의 찬송입니다. “인자와 긍휼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자,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눅1:68-71)

 

▲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아기 요한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식민 지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종교인 유대교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과 할례를 앞세워 서로 정죄하고 심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1:78-79)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참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사가랴의 아들, 곧 세례 요한을 통해 지극히 높으신 선지자의 길을 예비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긍휼이며 거룩한 언약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약속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1:72-77)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맛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은 아침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사랑과 평안과 축복입니다.

3.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며

이 구원을 위해 우리는 잠잠히 기다리며 사모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 예레미야 애가는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세 번째 애가로 애가서의 중심이 됩니다. 1-2장, 4-5장에 나타난 죄와 어둠과 고통이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그 밝음과 대조가 됩니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멸망당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민족의 구심점이었고 예배 장소였던 솔로몬 성전도 불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는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절망에 포로 된 유다 백성들에게 ‘슬픈 노래’ 곧 애가를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비록 민족의 멸망은 아니지만, 한 청년의 죽음으로 예레미야 못지않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8년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 태안화력 9, 10호기에서 운송설비 점검을 하던 협력업체 직원 김용균(24)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회사 측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대책회의 때문에 시신을 방치한 채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으며 시신을 옮긴 후에도 기계를 다시 돌렸다고 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며(눅1:79),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애3:19)이 끊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12월 14일 기자회견에서 故김용균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오열하는 어머니 김미숙 씨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속 썩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착하고, 너무 이쁘기만 해서 아까운, 보기만 해도 아까운 아들입니다. 저희 부부는 아들만 보고 삽니다. 아이가 하나뿐입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에 저희도 같이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저희가 무슨. 아무 희망도 없고. 이 자리에 나온 건, 우리 아들 억울하게 죽은 거 진상규명하고 싶어서입니다.
어제, 아이 일하던 곳을 갔었습니다. 갔는데, 너무 많은 작업량과 너무 열악한 환경이, 얼마나 저를 힘들게…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우리 아들을 맡기다니. 아무리 일자리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데 안 보낼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습니까. 저는 아이가 일하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가보고 싶었습니다. 다니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제는 기계가 서있어서 그나마 앞이 보였습니다. 동료들 말로는 먼지가 너무 많이 날려서 잘 안 보이고 어둡다고 했습니다. 아들 일하던 곳은 밀폐된 곳이었습니다. 먼지가 너무 날려서 후레시 켜도 뿌옇게 보였습니다. 그 안에 머리를 넣어 옆면을 보고 석탄을 꺼내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컨베이어벨트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아들 사고 난 장소에 동그랗게 말려있었습니다. 그게 위력도 세고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고 들었어요. 그 위험한 곳에 머리를 집어넣었다니, 저는 기가 막혔습니다.
동료들 말이 또 있었습니다. 아들 현장에서 봤을 때 현장에서 모습이 어땠냐고. 머리는 이쪽에, 몸체는 저 쪽에, 등은 갈라져서 타버리고, 타버린 채 벨트에 끼어있다고 합니다. 어느 부모가 이런 꼴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평생을 이런 데를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우리 아이가 그 일을 했다 생각하니, 당했다 생각하니, 사진도 보고 동료들의 말도 듣고.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있는지. 옛날에 우리 지하탄광보다 열악한 게 지금 시대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알리고 싶어 나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일이 탄을 꺼내 위로 올려야 했습니다. 그 양이 열 명이 해도 모자랄 것 같았습니다. 아이 두 동강 난 걸 사진도 보고, 이야기도 듣고, 이건 한국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일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빨리 나오라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체한다 해도 같은 상황일겁니다. 아들이 일하던 곳, 정부가 운영했잖아요. 정부가 이런 곳을 운영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라고, 더 죽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하나면 됐지, 아들 같은 아이들이 죽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저에게는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명예회복, 그거 하나 찾고자 합니다. 아들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요. 도와주십시오.
아이가 취업한다고 수 십군데 이력서 넣었는데, 마지막에 구한 곳이 여기였습니다. 대통령이 일자리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당선되고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말로만입니다. 저는 못 믿습니다. 실천하고 보여주는 대통령이었으면 합니다. 행동하는 대통령이 되기 바랍니다. 두서없는 말 마치겠습니다.”

 

▲ 김용균 씨의 유품

어머님의 글에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간절한 울부짖음이 들어 있습니다. 위험을 외주화 하고,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는 이 시대에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울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슬픈 노래 가운데 예레미야는 희망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19-23)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 ⓒGetty Image

민족의 절망을 마음에 담아두고 기도하는 예레미야에게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주님을 바라고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4-26)

왜냐하면 주께서는 영원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멀리 계셔 보이나, 아니 보이지 않으시나, 우리보다 더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보이지 않으시나 늘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1-33)

4.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주후 54-68년경 로마의 황제 네로는 혹독하게 핍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때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유대교 체제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이 흔들리는 자에게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주시는 주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에게 신앙의 변절을 경계하며,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히5:12)로 이야기하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히6:1-2)”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시므로 자기를 가리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6:14).”

때로는 주님이 더디 오실 것 같고, 때로는 지금 받는 고난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욥과 같이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다(욥17:1)’라고 탄식하며, 비록 위로해주는 친구들조차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욥16:2)’들일지라도, 하나님은 맹세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6:1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7-20)

 

▲ 루벤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1625) ⓒGetty Image

멜기세덱은 의의 왕, 살렘 왕 곧 평강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는 길에 그를 축복한 제사장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창14:18-20).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히7:3)’ 이가 멜기세덱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보다 멜기세덱의 계열(반차)을 따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힘주시며 우리에게 끝까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5. 소망의 풍성함: 참된 레트로토피아

앞서 언급한 바우만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가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바우만은 이렇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그럼 대화만 하면 될까요? 대화 이전에 대화가 가능할 전제 조건은 없을까요? 바우만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무슨 말인가요? 쉽게 이야기하면 경제적 균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균등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가요? 아닙니다.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곧,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우만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보편적 기본소득은 배제가 아닌 포함을 상징하며, 결속력을 분열시키는 번식으로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사회연대와 사회통합을 촉진시킨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1인당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제공해 주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 왜냐고요? 적어도 경제적 평등에서 타인을 유효한 대화적 상대로 보고 상호 협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부회장과 길거리 걸인이 상호 존중과 대화가 가능한 세상, 대통령과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가 만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들어 나갈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의 재원은 어디에서 나오느냐고요? 그거야 말로 쉽습니다. 군비 지출, 기존 복지 예산 지출 등을 기본소득으로 돌리면 됩니다. 그리고 많이 가진 자들에게 조금 더 부담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행하면 됩니다.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하는 프랑스 말로,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렇게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 이제 이 다른 세상을 교회부터 시작해 볼까요? 교회의 모든 헌금을 ‘종교국(이름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으로 모읍니다. 그리고 종교국은,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 수에 비례해서 지급하고, 교회 운영비는 교회 규모에 맞추어 지급합니다. 그 외 남는 모든 금액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 소득으로 씁니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할 것입니다.

거짓말 말라고요? 사도행전에 이미 시행되었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과거로 돌아가려면 제대로 된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을 믿고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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