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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사사화를 넘어서 - 공적 신앙의 길미로슬라브 볼프의 『광장에 선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1.08 17:43

J. 몰트만의 제자로서 유럽 변방 크로아티아 출신인 미(美) 성공회 신학자 M. 보프가 공적신앙이란 주제를 갖고 자주 한국을 찾고 있다. 개인주의 신앙양식이 만연된 한국 사회에 신앙의 공적 의미와 특성을 전달하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가 책 제목을 『광장에 선 기독교』(2011)라 한 것은 신론, 삼위일체론과 같은 고전적 신학주제보다는 당면한 세상현실과 직면할 목적에서이다.

다종교 사회, 기후 붕과 현실, 세계화의 폐해 그리고 4차 산업 시대에 직면한 인간성 위기 등 기독교(신학)가 공적 차원에서 씨름할 주제가 많다고 여긴 탓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특별히 ‘디아코니아’ 개념을 중시했다. “내가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왔다”는 예수의 삶을 오늘 우리 현실에서 이어 갈 목적에서다. 복음의 과제를 세상의 공익(公益)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적 종교로 전락한 기독교를 새롭게 변증코자 했다.

볼프의 박사논문이 마르크스의 노동개념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노동의 미래, 미래의 노동』이었던 것도 이런 행보를 가늠케 한다. 이후 『배제와 포용』이란 저술에서도 고통 하는 세계현실에서 보프는 평화와 정의 개념을 적극 피력했다.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만 기독교적 정체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선상에서 『광장에 선 기독교』-본래 독일어 제목으론 『공적신앙』-가 출판되었다. 역자의 언어 선책을 지지하고프다.

1.

본 책은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되었다. 첫 장은 기독교 신앙이 본래적 역할을 일어버린 현실을 고발했고 뒷장은 그 기능을 회복시켜 세상 참여적 신앙의 길을 적극 제시했다. 독일에서 수학했으나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탓에 앞선 어느 저술보다 무게감보다는 감칠맛이 크다. 무겁고 의미심장한 신학적 주제를 오늘의 현실에서 쉽게 풀어 낸 저자의 능력을 높게 평하고 싶다.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저자는 기독교가 처한 기능장애, 곧 중증의 질병을 ‘세속적 배제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란 말로 개념화했다. 전자는 신앙을 사적 영역에 가둔 채 공적 영역으로부터 전면 후퇴시킨 상태를 일컫는다. 세속영역을 종교(교회)로부터 완전히 이격시킨 상태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종교보다 자본주의 욕망을 추동하는 내적 현실을 숨기고 있다. 나중 것은 인습화된 우월, 배타성을 갖고 자신을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라 여기며 이웃 종교 및 인문 가치들을 억압하는 종교적 에토스를 적시한다. 이런 기독교는 공적 삶에서 기독교를 이격시켰던 배제주의 이상으로 장애 입은 신앙의 한 양상일 뿐이다.

기독교를 유일무이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여기는 시대착오적인 누(累), 곧 세계 평화를 실종시켰다. 그렇기에 저자는 세속적 배제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를 넘어서는 신앙적 대안을 모색코자 했다. 세속적 배제주의는 신앙적 나태함(게으름)의 모습이며 종교적 전체주의는 강요와 복종을 요구하는 폭력성을 숨기고 있다.

저자는 이를 N. 니버式 도식으로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로 대별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변증법적 신학 구조를 지닌 니버와 다르게 일방적 문화변혁 속에서 신앙적 기능장애의 위험성을 보았다. 이는 오로지 복음을 ‘디아코니아’ 시각에서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

그렇다면 현실 기독교가 앓고 있는 중증의 신앙 기능장애를 어찌 치유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과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세상의 공공선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 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독교 전통에서 회자된 예언자 종교와 신비적 종교의 두 양식을 언급한다. 후자는 상승의 신앙양태를 지녔고 전자는 하강 내지 회귀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두 종교양식은 모두 중요하다. 상승은 하강을 위해 존재하며 회귀를 통해서 상승의 진가가 발현되는 까닭이다. 상승은 신성을 수용하는 사건이고 회귀는 신적체험을 역사 화시키는 창조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겠다. 상승이 창조적 회귀가 못될 경우, 상승 없이 세속에 머물 경우 신앙은 장애를 입을 수밖에 없다. 수용적인 상승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메시지(영성)를 갖지 못하며 창조적 회귀 없이는 세상을 변화시킬 동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예언/신비 두 종교를 신앙의 제 역할을 위해 상호 불가결한 필연적 요소라 여겼다. 기독교가 이 두 전통을 자기 속에서 체화시킬 때 신앙에 있어 ‘디아코니아’가 본질이 될 수 있다. 세상의 공공선을 이룰 수 있는 기독교적 근거라 할 것이다.

3.

하지만 이런 상승과 하강(회귀)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장애가 발생한다. 살아있는 神과 제대로 만날 수 없는 경우, 하느님은 종종 아니 자주 종교적 언어기능으로 축소될 수 있다. 혹은 하느님이 우상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자기 이미지로 하느님을 대신하는 탓이다.

회귀과정에서도 기능장에가 여전하다. 회귀는 현실과의 타협을 뜻할 수 있다. 이를 저자는 신앙의 나태함으로 풀었다. 권력과 축복, 체제의 덧에 갇힌 현실 순응적인 신앙 양태가 이에 해당된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할 의지를 포기한 결과이다.

이웃을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는 장애도 발생한다. 과도한 자기 확신 탓에 타자를 악마 화시켜 함께 찾는 공공선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장애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왜소화된다. 오늘 기독교 선교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

전체적으로 저자는 본책에서 상승보다는 하강, 회귀 국면에서 발생하는 기능장애에 더 많이 주목했다. 그래서 ‘나태함’과 ‘강요’를 별도 항목으로 삼아 긴 지면을 할애했다. 우선 저자는 신앙의 나태이유를 다음처럼 열거했다. 신앙을 자기 틀에 맞추고 체제 요구에 순응하며 신앙의 도전을 스스로 피하는 탓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나태함을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불확실한 세계 속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의 축복이 특히 중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끌어 당신 뜻에 부합되게 하신다. 왜냐면 우리를 통해 자기 목적을 이루는 분, 그가 하느님인 까닭이다.

숱한 많은 일들, 잘못된 분주함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고 구원을 보장치 않는다. 세상적으로 성공했으나 만족할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우리의 일이 하느님의 창조활동과 일치되는 경우에서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일은 공동체 번영을 위하고 생태 환경을 지키는 것이겠다.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는 힘을 제공받는 까닭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자기 요구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 세상 삶에서 나태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강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현실에서 폭력적 종교로 변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신앙이 표층적일 경우 대개 폭력적이다. 종교성 강도가 폭력성을 설명하는 척도가 될 정도이다.

하지만 심층적 종교는 평화를 낳고 유지한다. 그렇기에 폭력의 정당화는 신앙적으로 심각한 기능장애이다. 일반적으로 유일신 사상을 폭력의 근거이자 원인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신이 정말 한분 이라면 인류모두가 그와 동일한 관계성 속에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그와의 관계 밖에 머무르는 자가 존재할 수 없다.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 역시 창조행위의 폭력성(강요)과 무관하다. 하느님의 창조는 존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행위인 탓이다. 구속 또한 전적인 환대의 행위일 뿐 배제의 원리와는 동이 서에서 멀 듯 멀다. 십자가는 그를 걸머진 분의 삶을 따르자는 것일 뿐 다른 신앙인을 못 박는 행위일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나태하거나 폭력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로써 하느님과 함께하는 번영의 길을 약속한다.

5.

말했듯이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번영을 약속한다. 이 경우 번영은 희망의 다른 말이겠다. 하지만 희망은 낙관주의와는 크게 다르다. 후자가 과거나 현재에 잠재된 것이 어느 순간 나타난 것이라면 전자는 미래(futurum)로부터 오는 선물인 까닭이다. 전혀 낯선 것을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의 번영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 여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나태하지 않고 강요함이 없는 신앙의 열매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목하 기독교는 하느님의 희망, 그가 허락한 번영을 한없이 축소시켰다. 하느님 창조세계를 인간영역으로 축소시켰고 급기야 자아의 차원으로 한없이 쪼그라 들은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 희망(푸투룸)의 영역과 범위를 작게 만든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으로 신학을 축소시킨 미국적 현실이 이를 잘 반영한다.

하지만 하느님 희망은 우리 인간이 좀 더 확장시켜 추구해야 할 목표라 해도 틀리지 않다. 예컨대 생태계는 인간의 번영만을 추구토록 허락지 않을 것이다. 인간 번영이 하느님 희망과 부합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과 공존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희망이자 인간의 목표이고 신앙의 과제이다.

‘나태’와 ‘강제’라는 장애를 벗은 신앙만이 하나 뿐인 지구위에서의 평화로운 공존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책의 원제목인 ‘공적 신앙’이란 말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 때 신앙은 인류가 추구하는 공공선과 내용 상 중첩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드리운 평화통일의 기운 역시 이들 신앙의 장애가 사라질 때 우리들 현실이 될 수 있겠다.

6.

그래서 본 책 후반부는 ‘참여하는 신앙’을 주제로 삼았다. 게으름과 강요를 벗고 제대로 된 신앙의 역할을 기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경우 신앙은 ‘디아코니아’와 결코 나뉠 수 없는 개념일 것이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사회적 행위자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쳐냈다. 교회 안에서 시작된 노동, 농민, 빈민운동이 교회를 일탈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컬어 교회의 축소화라 여겼다. 초 슈퍼교회들이 이/저곳에 산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마디로 ‘디아코니아’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란 것이다. 세상을 고칠 생각이 없는 교회, 예언자적 성격을 잃은 교회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교회 공동체를 세상 속 여러 행위자들 중 하나로 여길 것을 주문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의 방향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 영향력 상실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많은 행위자 중에서 하나인 것을 편히 수용하면서 공공선을 추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하느님의 희망(푸트룸)과 일치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기독교가 공동선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a Way)인 것을 말할 목적으로 저자는 현대 사회의 4가지 특성을 언급했다. 자발성, 차이, 다원주의 그리고 상대적 자족이 그것들이다. 신앙 공동체는 자발적 참여를 통해 지속되며 이 과정에서 교회는 차이에 근거하여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며 다양한 문화에 대해 거부/수용의 택일을 넘어 다차원적 관계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신앙 고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애쓰라 했다.

변화된 세상과 게으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게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작게나마 가능한 변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법을 배우고 지속적이고 근절 불가능한 악에 대해 슬퍼하며 어디서든지, 누구에 의해서든지-교회가 아닐 지라도(역자 주)-선한 행위가 이뤄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7.

이어 저자는 세상 속 다양한 문화와 관계 맺는 다양한 기독교 입장을 소개했다. 우선 ‘적응’에 초점을 둔 자유주의적 시각이 있다. 하지만 문화가 너무도 급속히 변하고 통제 불가능한 탓에 ‘적응’, 혹은 ‘순응’의 방식은 위태롭다. 기독교를 몰락시킬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말이다. 그렇기에 후기 자유주의는 상황을 역전시켜 성서만을 갖고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문화의 호환적 관계를 상실했다. 비(非)그리스도인(문화)과의 대화를 놓칠 경우 오만, 강요, 폭력이 기독교 공동체의 우선 가치가 될 수 있겠다. 근본적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분리주의적 시각이 존재했었다. 특정한 문화 속에 존재하지만 그 문화의 외부자로 기독교인을 자리매김 한 것이다. 여기서는 세상을 낯선 땅이라 여길 뿐 하느님 창조물로 볼 여지가 없다. 교회만을 하느님의 적극적 임재 공간으로 믿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과 기독교간의 이런 분리는 옳지 않다. 이들 간의 차이는 문화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문화 내부적인 차이로서 공적 영역과 어떤 식으로 참여, 관계하는지가 관건이 된다. 이 세상문화를 떠나지 않으면서 다르게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의 가치를 살아내는 삶의 길이겠다. 그 문화에 이질 적인 것을 거듭 도입하는 삶이라 말해도 좋다.

이 경우 이질적인 것은 기독교적인 것과 등가여야만 한다. 하지만 기독교 일지라도 세상 문화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그에 순응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실제로 적응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저자는 문화의 모든 차원에 그리스도인의 참여를 촉구한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세상과 관계 맺으라 했다. 이 과정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선에 대한 비전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8.

여기서 저자는 이웃종교인들과의 대화와 정치적 참여를 주제로 기독교적 공적 삶의 전형을 찾고자 했다. 주지하듯 저자 볼프는 최근 『알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2011)라는 책자도 발간했다. 두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을 물었던 일종의 정치서적이라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을 비롯해 종교 일체는 모두 자기 마음을 확장시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가 실재의 근원과 연결되었다는 대 지혜를 담았다.

그렇기에 이런 신앙의 지혜를 나누는 법을 배우라 권면한다. 앞서 말한바. 나태와 강요를 벗겨내야 가능한 일이겠다. 하여 저자는 먼저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런 대 지혜를 살폈다. 기독교인에게 신앙은 본래 삶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치로서 지혜 그 자체를 일컫는다. 인간과 공동체, 창조물 일체를 번영토록 하는 통전적인 삶의 방식이란 것이다.

이런 지혜는 반듯이 나눠져야만 한다. 이것이 선교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세상을 달리 만들어야 할 예언자적 특성도 이에 속한다.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신앙의 지혜, 곧 진리는 나눠져야 옳다. 지혜를 나눈다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선 선물을 받는 일이다. 폭력적 강요가 아니라 기쁨의 선물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한 지혜, 곧 진리인 것을 삶으로 보여줄 때 가능하다. 이럴 경우 상대방 역시 온유와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수용, 감당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저자는 ‘디아코니아’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웃 종교의 지혜를 받는 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수없이 다른 지혜를 수용했던 역사였던 탓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외부로부터 받는 지혜는 그리스도를 조명하는 성서 내러티브와 공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진리와 비(非)진리를 가르는 유일한 시금석이 그리스도란 것이다. 언어 표현은 상당히 유순하나 그의 선생 몰트만처럼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너무도 짙게 깔려있다.

주지하듯 몰트만은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것이 범(汎)허무주의에 빠진다고 자신의 『성령론』에서 설(說)했다. 이들 모두는 기독교적 언어가 붓다의 가르침과 공명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결과라 하겠다. 아시아인들이 긍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시아를 독백한 탓이다.

9.

그럼에도 저자는 지혜의 나눔을 디아코니아의 시각, 곧 이웃 사랑의 실천과 연루시켰다. 정교(正敎)에서 정행(正行)으로 무게중심을 다소 옮겼다고 할 것이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 황금률이야말로 지혜의 골자라 했다. 하지만 우리들 일상이 사랑의 부재이다. 용서와 회개가 늘 상 수반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회개 없이도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모든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의 목적은 오로지 가해자의 삶을 선하게 이끌기 위함이겠다. 궁극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교제를 회복시킬 목적에서다.

하지만 기독교는 가해자의 잘못을 옳게 적시할 책임이 있다.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이 용서가 아닌 탓이다. 가해자의 죄가 그로부터 벗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용서이다. 이런 사랑, 곧 지혜를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우주와의 근원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진부하게 들린다. 영화 “밀양”을 통해 가해자에게 너무도 관대한(?) 기독교의 모습에 넌더리를 냈던 경험 탓이다. 1세계 신학자들은 가해자들에게 너무도 관대하다. 자신들이 가해자로 살았던 탓이 아니지 되물을 일이다. 유럽 변방, 슬로바키아 학자인 볼프도 자신의 과거를 잊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10.

이제 본 책 『광장에 선 기독교』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역자의 개명(改名)에 적합한 내용이 충분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마지막 7장의 내용이 없었다면 ‘공적신앙’으로 책명을 정해도 좋았을 듯싶다. 다행히도 마지막 장을 통해서 저자는 정치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공적 참여를 강조했다.

실제로는 정권에 빌붙어 있으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이 땅의 보수기독교인들에게 일침을 주는 내용을 담았다. 주지하듯 목하 기독교는 종교적 다양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회, 문화적 현장에 노출되어 있다. 한마디로 ‘광장에 선 기독교’가 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서구는 한 정치체제 속에서 다양한 종교를 수용, 인정하고 있다. 본 체제 하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관(종교관)에 따라 살 권리를 지니며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본 체제 하에서 기독교인은 자신이 신뢰하는 ‘신적계시’를 앞세워 정치문제를 다룰 수 없다. 세상은 세속주의로 불리는 보편현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와 인생관을 지닌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수 공동체의 공존을 위한 사회적 협의이다. 소수 공동체이건, 다수 공동체이건 예외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에큐메니안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종교를 관통하는 공통의 빛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공적 이상, 공공선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물론 종교들 자체는 포괄적인 틀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기 어렵다. 이를 하나로 묶는 것은 폭력적이며 가능치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각기 자신들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이 옳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인 것과 차이가 함께 들어 날 수 있겠다. 이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을 종교의 구체성을 추상화, 간편화 하는 것이기에 저자는 선호치 않았다. 각각의 요소가 종교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는 지를 놓칠 수 있는 까닭이다. 개별 종교들의 신앙적 구체성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경우 의당 상충되는 지점이 생겨난다. 때론 그간 영사에서 보듯 폭력도 발생했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가-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으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가 죄 많은 세상을 사했고 그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 경우 사랑은 의견 差나 반대를 뛰어 넘는 행위이다. 세상 악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행위도 내포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넓힐 수 있다. 경계는 서로를 배워 풍성케 하는 장소이다. 경계에서 차이를 다시 볼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새로움을 꿈꿀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발생한다.

남북이 대치된 우리 한반도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자, 이웃의 목소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가 되는 과정, 이것이 사랑이고 공론화 과정이다. 이는 교회가 광장과 거리에 나설 때 가능하다. 자폐적 교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각 종교의 진실성을 검증받는 길은 타자에게 사랑이란 선물을 주는 길밖에 없다. 교리는 사람을 나누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인간성은 연대하며 결합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공론의 장을 만들 것인바, 그것이 바로 선물의 실상이겠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를 더 원한다. 사랑(행위)과 더불어 진리 추구(이해)를 위한 해석학적 순환이다. 사랑으로 공론 장을 만들어 내고 상대방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더욱 크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선물은 종교 공동체뿐 아니라 정치적 현실에서도 요구된다. 상호 다른 생각(異見)은 좋은 것이나 논쟁만으로 끝나서는 옳지 않다. 논쟁하며 행동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이다. 종교들 역시 논쟁 하면서 공론화 과정을 만들 필요가 반듯이 있다. 종교가 민주 시민사회의 역량을 더욱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11.

세속적 배제(분리)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라는 목하 기독교의 질병 치료를 위해 저자는 본 책을 썼다. 사사화된 신앙을 벗고 공적 신앙의 길로 나서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기독교가 중병에 걸린 이유를 ‘나태’와 ‘강요’라는 두 개념에서 찾은 것이다. 이들은 세속적 배제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를 야기 시킨 원인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느낌이 공허하고 허전하다. 이 정도의 신학적 논거로 공적 신앙을 말하고 광장의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초라하다. 공적신앙을 변증하는 저자의 변증력에 설득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한 마디로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아직도 서구 유럽 중심적 시각 속에 머물러 있다. 본 책 마지막에 인용된 17세기 레싱의 『현자 나단』의 이야기, 중요하나 좀 더 획기적으로 풀어내지 못했다. 기울어진 세계 현실에 대한 감각 부재로 정치 신학적 한계 역시 여실하다. 신앙유비(Analogia fidei)를 넘어선 새로운 기독교를 기대해 보아야 할까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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