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3.1운동 100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여전히 우리 속에 계속되는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이소 | 승인 2019.02.03 18:52

3.1운동 백주년을 앞 둔 지금, 정치 교육 종교계는 물론이고 관련 학교와 지역들이 각종 행사를 준비하며 물 끓듯이 술렁이고 있다. 전에 없던 흥분으로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각종 시민단체나 기독교 단체들의 관심과 열정에 새삼 놀라면서 3.1정신에 대한 진정한 자각인가, “100”이라는 숫자의 마술인가, 아니면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의 영향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쨌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비롯한 기타 기관과 단체들이 준비하는 행사는 규모의 크기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독립선언문 학습과 낭독, 만세운동 퍼포먼스, 국내외 역사 유적지 답사, 강연을 비롯한 학술대회 등등.

3.1운동,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3.1운동을 기념하려는 국가와 민관단체들의 앞을 다투는 다양한 행사 준비에도 불구하고 국민정신이 업그레이드 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각종 행사들이 알맹이 없는 자기 과시적인 화려한 행사, 자화자찬의 엄청난 말잔치로 결국 엄청난 시간과 국고를 낭비하고 일회성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조선의 멸망 및 3.1운동 실패와 성공에 대한 깊은 역사적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교훈과 새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행사는 결국 기념이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놀이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한국의 변화는 눈부시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한강의 기적’, IMF 경제 불황극복 끝에 OECD 국가 진입 등등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변화는 밤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지금은 남북평화협정을 앞두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어서 한민족으로서 정치적인 대립에서 벗어나게 되는 안도감과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식의 근저에는 500년 조선역사가 심어준 슬프고 아프고 더럽고 비겁한 DN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조선 멸망에 대한 민족적인, 거국적인 분석과 성찰이 없으며, 현재에도 구한말의 양반, 관료, 학자들의 가계들이 그대로 정치, 경제, 문화의 주도권을 계승하고 있으며, 사대주의 사상이 전 국민의 의식에 각인되어서 스스로 힘을 길러 자기 힘으로 나라를 보전하기 보다는 미국이나 중국 등 큰 나라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끼는 자기 불신의 심리가 우리에게 있다.

조선 멸망, 우리 스스로에게 책임은 없는가

조선이 망했다. 500년 역사를 가진 한 나라가 나라를 사수하려는 피 터지는 장렬한 전쟁도 한 번 치루지 못하고 망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병자수호조약 이후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며 임오군란과 얽히면서 정치개입을 시작하였고 갑신정변 사주, 갑오농민전쟁 당시 고종을 협박하여 관군과 함께 토벌군이 되어 농민군을 초토화시키면서 야금야금 조선을 삼켰다. 조선이 30여년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조선이 망한 이유를 을사5적과 한일병탄에 앞장 선 총리대신 이완용과 비서 이인직, 일진회의 송병준 등 작위를 받은 친일파 76명 매국노들의 행위와 일본제국주의 침략 탓으로 돌리고 있다. 친일파들의 매국 행위와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결정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 사진(1942년). ⓒ국가보훈처

그러나 맹자는 “나라는 스스로 치고 나서 남이 친다.” 고 하였다. 조선이 강한 나라였다면 일본이 감히 넘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섬나라가 조선을 넘본 것은 조선이 자기 존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고 병들었기 때문이다. 3.1운동 100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조선이 약해진 이유, 병든 이유, 망한 이유를 이성적으로 바르게 직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친일파를 변호하고 일본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바로 알고 적을 알아야 싸울 수 있기 때문이요, 우리 역사의 병폐를 바로 알고 도려내야 오늘 우리의 한국이 개혁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듯이 사후라도 약방문이 나와야 역사가 새로워질 수 있다.

정병석은 망국의 역사에서 오늘 한국 역사의 문제와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다. 그는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를 폐쇄적, 착취적 제도를 선택한 결과라고 한다.

“조선은 정치제도 면에서 왕조를 500년 이상 유지해나갈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제도 면에서는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특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경제가 성장하지 못했다. 이것이 주변 국가와 국력의 격차를 초래하고 결국 조선 왕조의 쇠망을 초래하였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조선의 제도에는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이 뚜렷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양반관료들의 특권, 착취적 지방 행정, 착취적인 조세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병역제도와  환곡 등의 복지제도까지 착취적으로 운영되었다. 대외무역을 엄격히 통제하고 국내 상업활동도 억제해 상공업의 발달, 이를 통한 생산과 소득 증대를 도모하기 어려웠다.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경제의 성장을 저해했다. 형이상학적 도덕철학에 심취한 조선의 지배층은 경제성장의 필요성이나 이를 위한 방법론 등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정병석의 주장에 의하면 망국의 1차 책임자들은 착취적, 폐쇄적 정치와 경제제도를 운영하며 자기들의 기득권, 자기들만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추구했던 왕과 왕족, 양반과 관료 집단 그리고 성리학이며 2차 책임자들은 지방 수령과 지방 사족과 향리 그리고 사원과 서당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 멸망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회피하거나 망각하였다. 망국에 책임이 있는 왕, 조선 관료들과 양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아니하였고 모든 것을 친일파와 일본에게 떠넘겼다. 조선왕과 관료들이 임진년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고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3.1운동 100주년이 된 지금 우리는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솔직하게 우리 원인을 분석하고 나라를 망치고, 10%가 넘는 국민들이 살길을 찾아 만주와 연해주로 유랑을 떠나게 만든 그 시대의 정신과 제도를 지배했던 성리학, 그 학자들, 그 수혜자들인 양반 관료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여전히 계속되는 권력 세력들

3.1운동 이후 100년이 되었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또 있다. 얼핏 보면 식민지 시대에 모든 것이 뒤집어져 변화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구한말의 양반, 관료, 학자들의 가계들이 그대로 정치, 경제, 문화의 주도권을 계승하고 있으며, 여전히 19세기 말 친일, 친미, 친러, 친중을 오가며 이합집산 했던 양반 후손들의 정치와 교육, 문화 속에 있다. 그 양반이 친일파일 수도 있고 독립운동가 후손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19세기 중기에서 20세기 초에 조선족 중에 만주로 이주를 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양반과 관리들의 수탈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월강을 한 농부와 천민들이 한 부류이고, 다른 부류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탄을 전후로 해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들어 온 양반과 관료, 학자들이다. 전자에 속한 자들은 가진 것이 몸 밖에 없는 농부나 천민들이었다. 그들은 지게에 삽과 괭이, 호미 그리고 씨앗을 가지고 관리들의 수탈과 가뭄을 피해 살기 위해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어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청나라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고 산속에 귀틀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광야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었으며 봉금령이 해제된 후에는 강물을 터서 수로를 냈고 평강벌을 비롯한 서전대야의 너른 들을 만들어서 삶의 터전을 닦았다.

후자들은 양반 관료나, 유명 향족과 학자들로서 가진 재산을 팔아서 정리하고 집단으로 들어와서 집을 구매하고 땅을 사고 서당이나 학교를 세우고 교육이나 계몽 단체 및 독립운동 단체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논농사를 짓고 있는 상민과 천민에게 안전과 보호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었으며 그들의 자녀를 데려다 학교를 채웠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자녀들을 데려다가 독립군으로 양성하여 청산리전투와 자유시 참변 등등으로 조국 독립의 명목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게 만들었다. 

박금해는 『19세기 후반기 조선족이주민의 증가와 연변의 개척』에서 두만강을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조선 상민들이 겪은 고통과 비참 상을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압박과 착취, 해마다 드는 자연재해로 하여 빈궁과 기아에 허  덕이던 북부 조선의 변민들은 살길을 찾아 끊임없이 범월잠입 하였다. 특히 당시 조선 봉건  통치배들의 군정, 전정, 환곡정과 부역 등의 가혹성은 필설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컨대 조선 왕조의 전정을 놓고 보면 전세, 대동미, 삼수미, 결미 등의 기본세와 거기에 딸린 근 40가지의 부가세를 수탈하였다.
… 신역은 원래 양민이 부역을 피면하기 위해 바치는 것이었는데 조선왕조말기에는 노비들에게 부담을 시켰다. 신역은 1인당에 ❰가는 베❱ 6~7필이었는데 보통 농촌 부녀가 1년 내내 삼으로 베를 짜도 ❰굵은 베❱ 3~4필 밖에 못 짰으니 ❰가는 베❱ 6~7필을 교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으므로 곡식을 팔아 ❰가는 베❱를 구매하여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군세는 더욱 혹독하였다. 군세도 역시 양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군포인데 화폐  로 환산하면 은 2냥이었다. 문제는 통치세력들이 더 많은 군포를 수탈하기 위해 호적을 개작  하여 여자를 남자로 고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군적에 올리거나 어린애를 낳기만 하면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물리었고 죽은 지 몇 년, 저어 10여 년이 되는 사람들을 군적에서 지우지 않고 여전히 군포를 징수 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백성들이 집을 유랑하거나 한  집이 몽땅 이사하여 화전민이 되거나 동북 범월잠입 하였어도 그 개인이나 그 집의 군포를 친척 또는 마을 전체에 풍기었는데 이것을 인징이라 하고 친척에게 풍기는 것을 족징이라 하였다.
… 조선정부는 범월잠입을 엄금하기 위하여 두만강남안 150리 어간에 30개소 포막을 설치하고 목책을 빼곡하게 세웠다. 1871년에는 포막 30개소를 더 증가하고 매개 포막에는 2~5명의 무  장한 포수(군대)를 배치하여 변민들의 월경을 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굶어 죽게 된 변민들은 무리를 지어 범월하여 들어왔다. 심지어 파수를 서던 병사들까지도 유민들과 함께 범월하여 들어왔다. 게다가 부안사 김유연은 두만강 대안 고이도로 건너가서 개간할 것을 허락하였다.”

김철호는 『조선족역사강좌』 제1장 월강곡에서 월강민들의 참상을 보여준다.

“조선 이조 왕조의 부패한 관리배들의 학정으로 풍년이 들었다 해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이였는데 왕가물(1860~1870년 사이의 대 추위, 홍수와 가뭄)까지 겹쳤으니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 만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을 캐먹었고 산열매를 따먹었다. 나무  도 열매도 없어지자 그들은 풀뿌리를 캐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다. 집집에 굶어주고 얼   어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길가에 임자 없는 시체가 나뒹굴기도 하였다. 어떤 부락에서  는 배고픈 것을 견디다 못해 등에 업었던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 처음에 강을 건넌 빈민들은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아침이면 돌  아 갔다. 후에는 며칠씩 푹 박혀 있으면서 농사짓기도 했다. 청나라 관청의 령이 엄하면 돌아오고 뜸해지면 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만강연안 순라선에서 좀 멀찍이 떨어진 산골짜기에  숨어 곡식을 심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봄에 월강하여 깊숙이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예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하였다.”

김철호는 『조선족역사강좌』 제2장 간도(사이섬)에서 1860년 대,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부 이영수 형제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서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고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당시 모든 조선족들의 월강 목적은 이영수 형제나 다름없이 생명 부지를 위한 농사였다. 그들이 고향을 등지고 범월의 위험을 무릅쓰며 만주의 땅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악정과 경제 파탄에 비롯된 것이었다. 고향에 남아 있으면 굶어서 죽고 강을 건너가서 요행이 청의 단속반에 걸리지 않으면 땅을 일구어 살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 줄을 이은 것이다.

봉금이 풀리고 한일병탄이 일어나고 3.1운동이 일어나고 만주국이 설립되고 드디어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 까지 조선족의 만주 유입은 계속되었다. 1907년에는 연변지역에 5만 여명, 1909년에는 18만 5000여 명, 1916년에는 20여만 명, 1945년에는 200만여 명의 조선족이 만주에서 얽혀 살았다. 상민과 천민들이 야밤에 지게를 지고 농기구와 씨앗을 들고 생명을 건 월강을 했지만, 양반, 관료, 학자들의 만주 이주는 아주 달랐다.

이덕일은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형제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 원이나 된다. 현재는 쌀값이 당시보다 눅었기 때문에 지금 가치로는 600억 원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당 형제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이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유족했다. 하지만 이석영은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출계했고, 한때 대원군의 정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이유원은 막대한 재산가였다. 이석영은 아우의 뜻에 동참해 이유원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 망명에 동참했다.
… 이회영은 덧없이 먹어버린 44세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륙으로 떠났다. 이회영뿐 만아니라 그의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과 두 동생 이시영, 이호영 가족까지 포함된 집단 망명이었다.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말 전형적인 양반관료 가문에 속하는 이회영은 오늘날 돈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이 넘는 돈을 가지고 5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서간도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신흥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운다.”

같은 책에서 이덕일은 안동 지방의 명문향족인 이상룡의 만주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상룡은 군자정 옆의 얼어붙은 연못을 지나 언덕 위 가묘로 향했다. 선조들의 위패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절을 올렸다. 이상룡은 동생, 당숙과 상의해 집안일 처리를 맡긴 후 저녁 무렵에 홀로 길을 나섰다.
… 먼 산자락에 낡은 집 한 채가 울타리가 기운 채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빌린 집이었다. 고향에 고래 등 같은 임청각을 두고 온 일가였지만 일단 편히 쉴 수 있는 오두막 셋집이나마 얻을 수 있어 반가웠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명동촌 4명의 학자들 가문의 북간도 이주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땅 ‘북간도’에 명동촌이 섰다. 1899년 2월 18일의 일이다.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네 명의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들로 이루어진 총 141명의 이민단이 그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종성에서 두민을 지낸 성암 문병규 학자의 남평 문씨 가문의 40명, 『맹자』를 만독한 규암 김약연 학자의 전주 김씨 가문의 31명,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학자 가문의 7명 - 이들 세 가문은 종성 출신이었다. 그리고 회령 소암 김하규 학자의 김해 김씨 가문의 63명이 거기 합류하였다. 김하규 학자(김신묵 여사의 부친)는 동학에 참가했던 일이 있고 『주역』을 만독한 분으로 실학사상에 투철한 분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명동촌으로 불리는 지역에 자리 잡아  한 마을을 이뤘다. 그곳은 본래는 동한이라는 청국인 대지주의 땅이었다. 이민단은 미리 돈을 모아 선발대를 보내 그 땅을 사놓은 후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들어가는 길로 돈을 낸 비율에 따라 땅을 분배했다.”

명동촌을 만든 사람들이 회령과 종성에서 맹자와 주역을 만독하고 있을 때에 함북의 변민들은 굶주림에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다 생명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월강을 한 그들은 쉴 틈도 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두만강 대안의 야산과 황무지를 개간하였으며 내지로 들어가 농수로를 만들어서 해란강변의 평강벌과 부르하통하 서전벌을 일구었다. 그러나 단체 이주를 시도한 명동촌 사람들은 미리 들어와서 땅을 구입하였으므로 쉽게 정착하였으며 주역들은 곧 바로 서당을 열어서 훈장의 일을 계속하였으며 자신들의 터를 폼 나게 일구어 갔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중국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보따리를 쌌다. 가슴 아프게도 양반, 관료, 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그들에게 세금을 내고 자녀를 독립군으로 바치어준 보통 사람들인 상민이 돌아가는 길은 달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27년 만의 환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희비가 엇갈리는 심정으로 하늘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상해를 출발한 3시간 만에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환국한 백범은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에게 기증받은 죽첨장(백범이 머물면서 이름이 경교장으로 바뀜)에 여장을 풀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나머지 일행들은 한미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신주백은 『청련결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 이시영』에서 환국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시영은 11월 23일 임정요인인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그리고 김상덕, 유동렬, 엄항섭을 비롯해 15명과 함께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42세에 고국을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77세의 노인이 되어 돌아 온 것이다.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명신여학교 약사에 “이 때(1946년)를 즈음하여 간도 조선인들 가운데서 재산이 많은 일부 기독교 교인들이 식솔을 거느리고 남으로 이주해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암촌 사람들』을 쓴 이혜선은 1935년 청주, 충주, 보은 일대에서 모집되어 훈춘현 정암에 조선족 집단마을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방문 조사에서 그들이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남은 이유를 ‘돌아갈 여비가 없는 가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가지 못한 남은 자들, 실의와 좌절 속에서 아픔을 삭이며 여비만 마련되면 곧 떠나리라 했던 그들이 1948년에 북한 쪽의 통로가 닫히게 되어 그대로 눌러 살게 된 한 많은 사연을 폭포처럼 쏟아 놓는다

심영숙은 『조선력사독본』에서 일본 패망 직전에 중국에 있는 조선족 수를 당시 조선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00만 명에 가까운 숫자였으며, 일본 패망 후, 3년 사이에 절반이 조금 넘는 숫자가 고향을 찾아 떠났으며 남은 조선족이 90 여만 정도였다 고 한다. 그는 남은 자들을 중국 공산주의 사상과 신념에 동조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가난한 자로 분류하였다.

나 또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조선족 마을(신툰촌, 무주촌)을 방문해서 중국에 남게 된 사연을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

일본 패망 이후, 양반과 관료, 학자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기타 이주민들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 일찍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들은 곧 바로 건국을 위해 정치 행보를 시작하였고, 학교를 세우며 정치, 교육, 언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애국애족의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민과 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은 떠날 때와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일병탄 때나 지금이나 양반은 양반을 낳고 관리는 관리를 낳고 학자는 학자를 낳고 부자는 부자를 낳는다. 약한 자는 약한 자를 낳고 노동자는 노동자를 낳고 농부는 농부를 낳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낳는다. 조선을 망친 양반, 관료들과 노론과 소론, 남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한국의 정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사라지지 않은 사대주의

3.1운동 이후 100년이 되었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또 있다. 아주 슬프고 못난 DNA, 사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자국의 방위를 이웃 강한 나라에 의존하는 약자들의 지혜로운 생존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나라의 현재와 미래, 독립과 주권, 안전과 생명을 이웃에게 의존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발상은 결코 아니다. 힘을 키워서 자기에게 속한 것을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와 정책을 가지지 아니하고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대국에 맡기려는 생각 자체가 불순하다. 우리는 이 슬프고 못난 사대주의 DNA 덕분에 일본 패망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임진년 일본의 침략을 받은 선조가 사대주의에 기초된 조선의 외교이념대로 명나라에 청군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고종은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에 청군을 요청하였고 결과적으로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끌어드려 조선은 청일전쟁의 전장이 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고종은 조선을 청과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친중파,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를 오가며 애를 썼지만 친일사대주의자들의 매국 행위에 왕위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가 나라를 구해 보려고 한 마지막 몸부림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박람회에 ‘밀사’를 파송한 일이었다. 러시아를 통해서 국제사회에 조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강대국들이 동정하여 일본을 물리쳐 줄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밀사를 파송하였을까? 그렇게 믿었든 믿지 않았든 간에 무능하고 무력한 왕이 나라를 지키고자 초청받지도 않은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송해서 강대국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탄원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슬픈지!

문제는 이런 사대주의 정신, 타국을 의지해서 자국의 독립을 꾀하겠다는 마음을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투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국토와 국민도 없이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태생적인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강대국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소파 사회주의자로 이동휘, 김립, 한형권 등이 있었고, 친미 지향적인 외교론자들로 이승만, 김규식, 안창호 등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대하여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을 해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를 하였고, 이동휘가 레닌과 소비에트에 대하여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 무장 투쟁론자들과 외교론자들의 주도권 싸움으로 소란하였고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은 일본 패망 후 한국이 겪을 이념적, 사상적인 분단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몽양 여운형을 제하고는 민족의 분열을 예견하지 못하였으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화합과 협력을 위한 준비나 수고를 하지 않았다.

임정은 출범 이후로 고집스럽게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자들만의 항일투쟁을 고수하다가 1939년 장개석의 주선으로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연합하여 함께 항일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다 1940년. 시베리아로 퇴각하여 소련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던 최석천, 김책, 김일성 그리고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4군에 편입되어 항일투쟁을 벌인 연안파 김두봉, 무정, 최창익과는 일체 합작, 협력하거나 대화를 나눌 채널조차 갖지 못한 채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결과 해방은 분단의 비극을 한반도에 선물하였고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는 분단의 고통과 불안, 공포를 겪고 있다.

독립 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강대국을 의지해서 항일투쟁을 벌일 때부터 남북분단의 씨앗은 이미 심어졌었다. 그 사대주의 DNA가 아직도 우리 피 속에 있어서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 일본과 중국,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 왔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사대주의 DNA가 얼마나 맹위를 발휘하는지 역사적으로 미국이 늘 우리의 우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국 사대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중국과 소련이 역사적으로 늘 우리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국 러시아(소련)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수탈, 억압하고 차별하면서 우리민족을 지상에서 없애려고 했던 역사적 사실을 알면서도 친일 사대주의에 매달려 있는 한심한 부류들이 아직도 있다.

3.1절 100주년이 되는 지금, 남북평화협정의 문 앞에 서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대주의 DNA를 솔직히 인정하고, 아프고 슬픈 역사의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강대국에 기대는 습관적인 의존성을 말끔히 청소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나라가 우리 힘을 키우고 믿으며 현재와 미래,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강한 나라로 거듭나야 할 때다.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로 인하여 초기부터 분열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대미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하는 이승만, 안창호, 이시영 등이었고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의 약소민족 해방지원을 의존하는 이동휘, 한형권, 박진순 등이었다. 임시정부는 레닌의 해방지원에 고무되어서 레닌에게 보낼 대사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을 선정하였으나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은 이동휘는 자기 휘하의 한형권을 보내서 레닌이 임시정부에 지원하기로 한 금화 200만 루블 중 60만 루블을 받아서 자기들이 주도하여만든 상해 "고려공산당"도 배제한 채, 전 "한인사회당" 멤버들에게만 사회주의 선전자금으로 배분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공산당이 분열되었고, 임시정부도 혼란과 파국 위기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의지하였던 사회주의자들은 이르크추크파(오하묵, 김철훈)와 상하이파(이동휘, 한형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하다가 "자유시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와해시켰다.

결과적으로 국민당 장개석과 미국을 의지해서 독립투쟁 내지는 독립외교활동을 벌인 투사들은 남한으로 결집하였고 중공과 소련을 의지해서 투쟁을 벌인 투사들은 북한으로 갔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우리는 그 분쟁 선상 속에 있다. 사대주의 DNA가 필요한 독재자들, 정치인들, 지식인들, 기업인들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를 부추기는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를 식별하지 못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는 것이 안보의 지름길이라는 거짓에 속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서로 화해하며 만나는데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동의와 허락을 받아야하는 슬픈 우리의 현실이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사대주의 DNA를 떨치고 자주 국방으로 자주자립하는 나라와 민족으로 세워지는 날을 꿈꾼다.

참고서적

한주, 『조선족 재발견』, 유아이북스, 2017.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아침, 2014.
정병석,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시공사, 2016.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5.
이태영, 『다큐멘타리 일제시대』, 휴머니스트, 2019.
신주백, 『청렴결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 이시영』,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2014.
김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박시백, 『35년, 1916-1920,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아북, 2018.
리봉구 외,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박금해 외,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 개척』, 민족출판사, 1999.
김삼웅, 『몽양 여운형 평전』, 채륜, 2015.
심영숙, 『중국조선족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인터넷)김철호의 조선족력사강좌, “제1장 월강곡”, 2018.11.22.
(인터넷)김철호의 조선족력사강좌, “제2장 간도(사이섬)”, 2018.11.2.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