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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살림살이의 문법을 배우라”하늘 땅 아래 잘몬[세상만물]과 어울려 함께 사는 살림살이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2.03 19:05

예전에 서양은 자기들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방이라고 보았으며 하나의 진리,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이성만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제 세계가 다원화되어가고 있고 문화와 가치가 세계에 따라 다름을 보고 알게 되었다.

서양의 이성은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서양인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이라고 이름한다. 그 이성을 서양인들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세계에 따라서 이성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 세계적 이성”이라는 개념 속에 담긴 본래의 뜻이다.

철학은 삶의 세계에서 어떤 생활 방식을 표본으로 삼아 그것을 이론화시키고 합리화시킨다. 그것이 그들 세계의 독특한 이성이며 세계를 보는 눈을 이룬다. 하이데거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존재의 이해”이고, “존재의 눈깔”이고, 모든 민족, 모든 문화권은 역사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이해”를 기준으로 만들어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싸움, 곧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을 펼친다.

서양 중심의 이성에서 벗어난 또 다른 이성

이러한 존재이해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를 기치로 내건 유럽적인 세계관이 승리하였고 그래서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 가능한 이성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원화된 현대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이성만을 고집하여서는 화해와 평화를 기대할 수 없고 오직 갈등과 투쟁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간직되어온 다른 이성의 형태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가로지르기 이성’이다.

다른 세계관과의 대화, 다른 문화 간의 대화,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가로지르기 이성이 필요하다. 내 것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대화를 나누어 더 보편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로지르기 이성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의 생활세계를 되돌아볼 때, 우리 나름의 독특한 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각인한 우리 나름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살림살이의 이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존재

우리의 조상들은 천(天)지(地)인(人) 합일(合一)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이존재”이다. 예전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물이 넘쳐 홍수가 났을 때 그 물이 왜 넘쳤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그 고을의 책임자가 천주(天柱)라고 하는 동헌의 기둥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어 인간의 잘못에 대하여 대신 사죄하였다.

우리는 자연을 서양인들처럼 에너지 창고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도리를 보았고 따라야 할 덕목을 읽어내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품(人品)이 있듯이 꽃에게도 화품(花品)이 있다고 보았다. 대나무는 절개, 모란과 작약은 부귀, 개나리와 진달래는 그 분명한 거취가 그 꽃들의 화품(花品)이다. 이러한 도덕의 범위를 짐승에까지 확대하여 벌과 개미에게는 군신의 의(義)가 있고, 원앙에게는 부부의 정(情)이 있고, 기러기에게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禮)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우리는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도 그냥 마구 다뤄도 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을 특별하게 생각하여 다루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운 며느리는 팔(八)자를 적은 바가지를 갖고 냇가에 가서 실컷 울고 그 바가지를 쪼개서 냇물에 떠내려 보내어 자신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물은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가 온 뒤에 산에 갈 때에는 코가 얼기설기한 짚신을 신고 갔다. 비가 온 뒤에는 길가에 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그 벌레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그러한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에 갈 때에는 요강 같은 것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우리는 “산에 간다”라는 말 대신에 “산에 든다”라는 말을 썼다. 산에 허락 맡고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한국인의 살림살이에서 지구 살림살이를 위해서 배울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삶의 지침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체계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서 “살림”의 원칙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 우주적 살림살이의 대 원칙은 “나눔”과 “비움”이다. 우리 한국인의 생활세계에 각인되어 있는 삶의 문법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거기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이라는 살림살이의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잠깐 동안의 있음

서양인들의 “있음”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고 “점유하고 있음”이다. 그들에게 “있음”은 곧 “소유”이다. 그러나 우리의 “있음”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고 가는 잠깐 동안의 있음이다.

이런 있음의 대표적인 예가 ‘보자기’이다. 보자기는 그 자체 공간을 거의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책가방도 되고 선물꾸러미도 되고 머리 수건도 되고 목도리도 된다. 예전 우리의 ‘살림방’도 그런 면모를 보여주었다. 밥상을 들여오면 식당이 되고, 그 밥상 위에 책을 놓고 공부를 하면 서재가 되고, 이불을 펴면 침실이 된다. 하지만 서양의 가구들은 한번 자리를 차지하면 치우기 전까지는 계속 그 가구로 그 자리에 있다.

▲ 한국의 전통적인 보자기 ⓒGetty Image

서양의 “있음”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꽉 채움”이다. 그러한 있음은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있음에도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있음”이 우리의 삶까지도 지배하게 되면서 예전 우리의 살림살이의 원칙은 사라지고 욕망의 원칙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있음”은 “잇음”, 즉 “이음”이다. 예전에는 “ㅅ”이 하나였는데 하나가 더 붙어 “있음”이 되었고, 하나가 떨어져 나가 “이음”이 된다. “있음”은 하늘과 땅을 잇고, 때와 때 사이를 이으며, 빔과 빔 사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물과 사물 사이를 이으며 온갖 종류의 관계를 잇는다. 그리고 무(無)와 무(無),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잇는다.

있음은 없음에서 와서 잠시 있음 속에서 없음과 없음 사이를 이으며 있다가 다시 없음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있음은 무(無)와 무(無) 사이를 잠시 잇다가 자기의 있음을 버리고 사라진다. 우리의 “있음”은 이렇게 자기를 비우는 있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무(無), 공(空), 허(虛), 즉 없음이다. 즉 우리는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없는 것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

존재, 소유, 욕망, 경쟁이라는 서구적인 삶의 문법이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죽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죽임의 문화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키고 우리들의 생명까지도 멸절시키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법 속에 새겨져 있던 살림살이의 원칙을 배워서 오늘날에 되살려 놓아야 한다. 새롭게 다시 살림과 섬김, 비움과 나눔의 가치관을 정립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살림살이의 문법이 지구의 살림살이 문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 시켜야 한다.

지구적 살림살이에서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서구적인 가치관으로 백인들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한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지구인들은 곯은 배를 움켜쥐며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촌 시대 지구상의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 모든 자연사물을 위해서 사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삶, 함께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결국 나눔의 삶일 수밖에 없다.

지금 해마다 굶어죽는 1억 명 가량의 사람들은 음식이 없어서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죽고 있는 것이다. 나눔의 마음이 없는 한 지구상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무한경쟁이라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 하늘의 뜻을 읽어내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생명의 신비스러움과 성스러움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아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생명의 원칙에 동참하여 우리 자신을 나누고 비울 때 지구의 살림살이에는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함석헌이 그리는 장차올 평화스런 왕국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저마다 자신의 독특함을 뽐내며 함께 어울려 사는 그런 살림살이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딩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이사야 11: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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