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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개신교) 3.1운동 정신의 세 가지 (3) ‘세계대동(大同)’의 큰 이상을 품은 3.1운동 개신교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5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2.09 18:28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민족과 민중, 여성의 자립과 자주, 평등을 위해 분투했던 3.1운동 기독교는 그러나 좁은 의미의 폐쇄적 민족주의나 계급투쟁, 분리주의적 여성주의에 빠졌다고 할 수 없다. 한민족 3.1운동에 대해서 누구든지 제 종교그룹이 하나가 되어서 함께 이룬 운동이라는 것을 크게 지적하듯이 3.1운동은 매우 중층적으로 여러 차원에서 그 통합성과 전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참으로 민족주의적이면서도 세계적이었고, 지식인들과 시대의 리더들이 큰 역할을 했지만 전 국민과 시민, 민중의 호응으로 가능했던 것이었으며, 개인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여성들의 공적 의식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1)

여기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기독교는 해외 그룹들과 연결되어 세계적일 수 있는 입지였고, 당시 한반도에 와서 활동하던 수백 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목회자들, 그리고 한말에서부터 해외 이주가 시작되어서 하와이와 미국 본토, 상해와 만주, 러시아 등에 나가 있는 재외동포들의 존재와 역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당시는 남북이 나눠지지 않은 상황이라 한국 교회가 오늘의 경우보다도 지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훨씬 더 넓고 긴밀하게 만주나 중국, 러시아 등과도 연결될 수 있어서 개별 교회의 활동이 훨씬 국제적이고 세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그래서 단지 좁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었고, 세계 나라들과 소통하려 했고, 세계 보편의 정서와 의식에 호소하면서 크게 “세계평화”를 말하고 “세계개조”를 논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고 도모한 것이었다. ‘세계대동’(世界大同)의 오랜 동아시아적 이상이 잘 녹아 있었던 것이다.(2)

각종 독립선언서에 드러난 세계대동의 이상

놀랍게도 3.1운동 전후로 기미 독립선언서뿐 아니라 국내외에서 100여 종이 넘는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드러나고 있는데,(3)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미 독립선언서에도 그러한 세계대동의 이상이 잘 드러나 있다. 선언서는 자신들의 선언이 어떤 사사로운 일시적 감정이나 일본의 지금까지의 행태를 탓하고 정죄하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한” 일임을 당당히 밝힌다.

▲ 2.8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은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8일 동경 한복판에서 조국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일대 사건이었다. ⓒ국가보훈처

일제의 침략과 강압으로 한민족이 “세계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할” 기회를 많이 잃어버렸고, 그래서 조선의 독립은 “하늘의 명백한 명령”(天明命)이며 “시대의 대세”이고, “전인류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의 “정당한 발동”이라는 것이다. 선언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연스럽고(不自然) 불합리한(不合理) 착오상태”를 바로 고치기를 원하며 조선독립과 “동양평화”,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이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하고, 그래서 인류 보편의 “양심”(良心)과 “진리”(眞理)와 “전세계의 기운”(全世界 氣運)에 의지한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 선언을 마무리한다.

3.1운동 대표들은 선포한 선언서를 일본 정부와 의회,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해외 외교부 등에 보내고자 했는데, 그때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인 임규(林圭, 1860-1948)가 일본 각 정당과 신문사 기타 잡지사와 관․사립대학에 전달한 통고문(通告日本書)(4)에는 3.1운동이 어떻게 세계 문명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시도되었는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거기 서술되고 선언된 병합의 문제점과 오류, 일본의 잘못이 무엇이고, 10년간의 무단정치의 시간이 어떠했으며, 왜 병합이 지속될 수 없는지, 그것으로 동양평화가 어떻게 깨어지고, 한반도가 세계평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분석하는 내용은 오늘 21세기 동북아의 현실과 한반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참으로 잘 적용되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5)

그 통고문은 “한국으로 하여금 동양평화의 안전판이 되게도 하고 분화구가 되게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비록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국제연맹의 보장이 없더라도” 세계 대세의 변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시대는 이미 바뀌었으며 한인은 벌써 자각하였도다”라는 말로 마무리하는데, 나는 이 선언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의 통일운동도 더 이상 미국 등 외세의 시각에 너무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6)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3.1운동을 전후해서 국내외에서 발표된 100여 종의 독립선언서 중에 “대한독립 여자선언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19년 음력 2월 정도(양력 4월)로 추정되는 이 선언서가 발표된 곳은 국내가 아니고 간도 훈춘지역이었는데, 순 한글의 1,29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김인죵, 김숙경, 김옥경, 고슌경, 김슉원, 최영ㅈ·(아래 아 표기-편집자 주), 박봉희, 리정슉 등 8명의 서명만이 첨부되어 있고 작성 경위 및 선언배경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7) 다만 8명의 서명자 중에서 김숙경(1886-1930)이 간도를 포함하는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훈춘 성내교회 장로였던 황병길(黃炳吉, 1885-1920)의 아내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은 러시아, 미국 등에서 활동하던 여성리더였을 것이 추측된다.

또한 선언서가 작성되어서 간도, 한국, 일본 등으로 전송된 기록이 있으며, 내용을 살펴보면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5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하면서도 임진왜란 때의 논개나 계월향과 더불어 서양 ‘사파달’(스파르타)의 ‘사리’라는 여성과 이태리의 ‘메리야’라는 여성의 예를 들면서 세계여성들이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소개한다고 지적된다. 이들은 신앙과 국제사회 여론에 호소하면서 독립선언 후 대한애국부인회로 조직되어서 여성교육과 군자금 모금, 독립군의 후원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8)

개신교인 몽양 여운형의 세계시민성

또한 우리가 보통 주로 단편적인 사회주의 사상가로만 알고 있는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1947)의 3.1운동 전후 활동을 보면 3.1운동 개신교 정신이 어느 정도로 세계 시민적이었고, 널리 포용적이었으며, 국제적으로 열려있었는지를 잘 볼 수 있다.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원래 신학을 공부하러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추천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영문학을 공부하고, 이어서 1916년부터 상하이에 정착해서 YMCA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 청년회와 한인교회 전도사 활동, 교민학교 활동을 하면서 한인사회의 신망을 얻어 한인거류민단 단장을 5번이나 맡았다고 한다.

▲ 몽양 여운형 선생 ⓒGetty Image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세계정세의 변화에 늘 주목해 오던 그는 1918년 6-7월경 조만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것을 예측하고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서 청년들의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보아 동지들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9) 그 신한청년당의 당 강령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고 한다.(10)

- 대한독립을 기한다(期圖大韓獨立)
- 사회개조를 실행한다(實行社會改造)
- 세계대동을 촉성한다(促成世界大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신한청년당은 전후의 강화회의가 조선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서울에서 경신학교 교감과 YMCA 활동 등에 매진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당의 대표로 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또한 창당 발기인인 장덕수(張德秀, 1894-1947)와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을 일본으로 보내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의 궐기를 조직하여 2.8독립선언을 하게 하였고, 김철, 선우혁(鮮于爀, 1889-1967), 서병호 등은 국내로 파견하여 이승훈을 만나서 3.1운동이 구체화 되도록 하였다.

1919년 4월에 김구(金九, 1876-1949),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신규식(申圭植, 1880-1922) 등이 이 당에 가담해 활동하였고, 결국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조직이 준비되어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될 수 있었음이 지적된다. 당원들을 국내외 각지로 파견하여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전 민족적 궐기를 촉구한 여운형은 자신도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1919년 겨울 일본 정부는 이러한 국내외적인 영향력을 가진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청하는 의사를 전달했고, 드디어 12월 15일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 쓰고 배편으로 동경에 도착한 여운형은 일본 사회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도도한 변을 설파한다.

박은식은 그 연설을 자세히 소개하는데,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적인 운동”이고, 일본이 얼마나 “현실에 맞지 않는 공상”에 빠져있는 것이며, 제1차 세계대전을 관찰해 보아도 독일이 프랑스에 패한 것은 독일의 힘이 프랑스보다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웃 벨기에나 체코가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즉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여운형은 조선은 “외교면에서 침략적인 야심이 없고”, “정의, 인도에 입각해서 세계평화의 선봉이 되며, 오직 문화적으로 세계에 웅비할 뜻이 있을 뿐 다른 욕망이 없으니 자연히 다른 나라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게 마련이다”라고 변론하는 것을 듣고 일본인들은 그를 말로써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예우하여 다시 상해로 돌려보냈다고 한다.(11)

세계대동 정신의 거인 도산 안창호

마지막으로 3.1운동 기독교 정신의 세계 대동성을 말하기 위해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과 사고, 행적은 참으로 통합적이었고, 세계 시민적이었으며, 우리가 보통 나누어서 생각하는 영역들을 ‘불이적’(不二的)으로 연결하여 자신의 삶에서 하나 되게 하고, 그것을 한국 민중을 출발점으로 해서 전세계 인류에게로 확산시키려는 큰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당에서 공부하고 장로교에서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장로교인이 되었다.

▲ 도산 안창호 선생 ⓒGetty Image

1902년 처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하우스 보이 일을 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이어지는 미주와 중국, 국내에서 수행했던 수많은 활동에서 그는 ‘사랑’과 ‘진실’, ‘성실’과 ‘인정’(人情) 등 인류 보편의 덕목을 자신 활동의 토대로 삼았다. 그는 누구에게든 어떤 공동체이건 그 삶에 구체적으로(實)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행해 내는 힘을 기르고자 했고, 그래서 경제적 도움을 주고, 사람의 감정을 보살피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 등도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안창호는 일생동안 세 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31세 때(1908)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는 것이 “최대의 요구”였다고 한다.(12) 합병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1913년 그가 세운 청년학우회를 기반으로 유길준의 ‘흥사단’(興士團)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 그는 “우리 민족이 도덕으로 세계에 으뜸이요, 모본이 되는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는 적어도 우리 민족이 “거짓 없는 국민, 사랑하는 국민, 뭉치는 국민, 부지런한 국민”이 되게 하고 싶었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13)

이후 이어진 상해 임시정부 시절 어떻게든 민족 단일 진영을 구성하고 독립운동 선배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소장파들을 달래면서 이승만의 미국식 자유주의 진영과 이동휘의 소련식 사회주의 진영을 함께 모아 통일 내각을 구성하려고 고투하였다. 계획 없는 운동이 얼마나 큰 결점인 것을 알고 구체적으로 ‘독립운동방략’(獨立運動方略)을 제정하여서 재외동포까지 모두 포괄하여서 운동을 이루어나가려고 한 점 등은(14) 바로 안창호의 통합적 인격과 인류 대동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그는 1937년 생애 마지막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명망가들을 친일로 돌아서게 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취조받던 중에도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는 믿음을 굳건히 지켰고,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義)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이 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15) 오늘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의 과제를 위해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큰 믿음(信)과 가장 작은 ‘개체’(대한민족)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늘’까지 이르는 큰 포용력, ‘공의’라는 인류 보편의 진리와 평화, 인정(人情)의 방법이 그의 독립운동의 길이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백 년 전의 3.1운동의 선인들은 그렇게 온 세계를 품는 큰 이상과 동시에 가장 기초부터 다지는 일을 동시에 이루고자 한 것이다.

미주

(미주 1) 이은선, “포스트휴먼 시대에서의 인간의 조건-유교적 페미니즘과 다른 기독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310.
(미주 2) 변은진, “3.1운동 전후 여운형의 활동과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식, 학술심포지엄,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학청년당, 2018.11월28일(수),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 홀, 자료집, 35.
(미주 3) 김소진, 『한국독립선언서연구』, 국학자료원, 2015, 309-326.
(미주 4) 이병헌, 같은 책, 719 이하.
(미주 5)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182-196.
(미주 6) 같은 책, 182-196.
(미주 7) 김소진, 같은 책, 210.
(미주 8) 같은 책, 216-219.
(미주 9) 변은진, “3.1운동 전후 여운형의 활동과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식, 학술심포지엄,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학청년당, 2018.11월28일(수),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 홀, 자료집, 32.
(미주 10) 같은 글, 35에서 재인용.
(미주 11)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146-165.
(미주 12)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평전』, 도서출판 청포도, 2007, 114.
(미주 13) 같은 책, 150.
(미주 14) 같은 책, 172-174.
(미주 15) 같은 책, 210.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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