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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 십계명의 존재 이유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19.03.11 19:31
(지성소에 들인)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야훼께서 그들과 호렙에서 계약을 맺으셨는데 거기서 모세가 그 안에 넣은 것이었다.(열왕기상 8,9)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땅에 내려오시고 광야에서 성막을 그의 거처와 동행의 표지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시내/광야 사건과 비교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동식 성막의 핵심은 지성소 안에 있는 궤입니다. 궤 위에 놓인 카포렛(~속죄소)은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자리라는 점에서 시내산을 모델로 합니다.

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은 떠돌이 이스라엘에게 그때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정착 형태의 성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막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마치 성막을 시내산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 그 거리를 궤가 메꿔줄 수 있을까요?

▲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수여받는 모세 ⓒGetty Image

법의 본질은 관계를 규정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모든 법을 대표하는 두 돌판의 십계명은 그 법들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하게 일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각각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최소(?)로 규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외경하고 사랑하며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두 돌판이 담긴 궤를 성전 안에 두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하겠다는 맹세가 아닐까요? 그에 따른 실천이 이어질 때 성막과 성전의 형식적 차이는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해 보이는 두 사랑이 잘 안된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십계명이 탁월한 까닭은 그 이유를 알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존재를 지적하는 마지막 10번째 계명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나머지 계명들은 단순한 계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탐심이 나머지 계명들을 어기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물화시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그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되고 이익실현의 도구로 전락됩니다. 거기에는 외경도 존중도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돌판의 존재는 바로 그 탐심을 비우라는 외침이요 명령일 것입니다. 실현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설이지만, 탐심을 비워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탐심이 멈출 수 있습니다. 사랑의 비밀입니다. 두 돌판은 사랑의 능력을 키우라고 오늘도 말없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두 돌판을 우리 마음 속에 새기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오늘이기를. 탐심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우리의 사랑이 커지고 우리의 일에서 나타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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