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칼럼
“부활의 잉태”Via Dolorosa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3.30 18:25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던지신 첫 번째 물음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가인과 아브라함에게 이 물음을 주셨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던지신 세 번의 물음이지만 무늬는 닮았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숨어있던 아담, ‘왜 그랬느냐? 왜 내 말을 어겼느냐?’가 아니었다. 아담이 존재하는 자리를 물으셨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셨을까. 아담 스스로 자신이 있는 곳을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으리라. 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 형제의 손에 살해당한 아벨의 핏방울이 어디에서 식어가고 있는지 모르셨을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창18:9)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다고 답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 리가 없다. 구십 세를 앞둔 사라, 아기에게 젖 한번 물려보지 못하고 말라가는 젖가슴을 모르셨을까.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묻지 않으셨다. 존재의 자리를 물어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뜻이다. 하나님 보지 못하실 곳에 숨으려는 두려움의 자리, 형제에게 살해당한 생명이 잦아드는 자리, 벅차오르는 사랑에서 소외된 채 시들어가는 자리, 위치가 아니라 존재의 자리를 보게 하신다. 단지 부끄러움과 고통과 메마름만 보게 하려는 뜻이었을까. 십자가의 고통 속에 이미 사랑이 깃들어 있듯이, 십자가 그 너머를 보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부끄러움과 고통과 무력감을 감싸 안으신 주님 품의 신비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단순히 갤러리라는 공간, 벽에 걸린 작품 앞, 그런 물리적 위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작가가 그림을 그리던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던 자리, 대상을 느끼던 자리, 대상을 통해 새롭게 만난 깨달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물론 같은 느낌, 같은 깨달음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언저리에서 함께 바라보며 느끼게 된다. 그때 작품은 새로운 세계의 창문이 된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마지막 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앞에서 그 창문이 열렸다. 작가의 자리에서 서서 새롭게 만난 깨달음의 풍경을 보았다.

고난주간 이른 아침이었다. 작품을 향한 핀조명만 켜고 어둠 속에서 바라봤다. 핏기 없이 축 늘어진 예수님의 주검을 무덤 안으로 옮기고 있다. 비통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도 부축을 받아 따라 들어온다. 저 밖에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 골고다 언덕 위에 세 십자가가 보인다. 작품 속 인물들의 눈은 흐릿하고 어둡게 묘사되어 있다. 차마 눈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아픔, 눈을 뜨고도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그늘져 있다.

▲ 십자가의 길 제14처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 작자미상 ⓒ단해감리교회

그렇게 작품을 찬찬히 음미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어두운 갤러리 한 구석에 서 있지만, 또한 무덤 안에 서 있었다. 2000년대 대한민국 땅 어딘가에 서 있지만, 또한 2000년 전 골고다 언덕 근처 돌무덤 안에 서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은 무덤 안에 먼저 들어와 있게 된다. 작가가 무덤 안쪽 어둠 속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은 작품마다 다른 시점을 보여준다. 라파엘의 「예수의 매장」(1507)은 무덤 밖에서 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렸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의 14처는 이미 닫힌 돌무덤에 안치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눈앞에 묵상하던 작품은 무덤 안쪽 어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맞아들이는 시점이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맞아들이고 있는 자리, 그곳에 감상자들을 세워버린다.

▲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매장」
▲ ‘지거 쾨더’의 「14처 예수께서 묻히심-누에고치」

텅 빈 돌무덤 안쪽, 주님의 주검을 맞아들이는 자리에 서있음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기도가 깃들었다. “제 안에 저렇게 텅 빈 무덤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열어준 적 없는 무덤, 보여줄 수 없었던 무덤, 그 안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군요. 주님의 주검을 맞아들여야 하는군요. 죽음도 막을 수 없었던 사랑을 맞아들여야 하는군요.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마리아의 처절함도, 제자들의 비통함도 맞아들여야 하는군요. 그래야만, 그제야 텅 빈 무덤 같은 제 영혼이 주님 부활하시는 자리가 되는군요. 그제야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군요. 부활이 잉태되는군요.”

이 기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도, 논증할 수도 없다. 자신 안에 텅 빈 무덤을 발견한 마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기도의 문장을 다시 품어 봐도, 그대로 살아있는 고백이 된다. “어디에 있느냐?” 주님 물어보시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무덤 안입니다. 냉기와 어둠만 가득 찬 무덤 안입니다.” 그때 주님 말씀을 주신다. “내가 너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 주검으로라도 네게로 갈 테니,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자구나.” 다시 이 문장을 써나가는 지금도 눈시울이 일렁인다.

사순절 기간인 지금, 수많은 개신교회들이 사순절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있다. 부활절을 향한 긴 여정, 그 기도들은 무엇을 구하고 있을까? 절절한 소원들로 기도할 수 있다. 주님께서도 누구보다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다른 절기도 아니고 사순절인데, 그 제목들 중에 바울의 간구는 얼마나 될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3:10,11) 바울은 십자가와 무덤을 거쳐 주님의 부활에 가닿기를 간구하고 간구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와 무덤은 주님만, 부활의 영광만 우리가 누리길 원했던 것이 아닌가.

부활절에 길고 긴 칸타타를 웅장한 교향악단의 반주로 멋지게 공연한다고 기쁠까? 사순절 특별새벽기도를 빠짐없이 마치고 드디어 소원하던 기도가 응답되면 기쁠까? 부활절 예배에서 감동적인 설교로 눈물이 흐르면,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물론 보람차고 감사하고 감동적인 일이다. 그 자체를 폄하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감사와 감격 뒤에 부활의 열매가 없다면,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을 본받는 삶이 없다면, 상상임신이 아닐까? 증상은 그대로 다 있다. 상상임신이 배가 불러오듯, 감동과 감격이 불러온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에 합당한 삶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헛배일 뿐이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내 곁에 함께 있지 않은 이는, 내가 가장 기쁠 때, 내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곁에 있어도 내가 겪는 이 기쁨을 맛볼 수가 없다.” 어디에선가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써 본 것이다. 겨울을 겪지 않고 봄의 설렘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부활의 참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주님과 다시 살아나는 경험 없이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U.H.M. Gallery에 Dolan Geiman의 「Silver Swan」이라는 작품이 있다. 버려진 은빛 물건들을 모아서 백조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버려진 쓰레기들이 백조로 태어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포크, 수저, 칼, 톱… 수많은 물건들 가운데 눈에 띄는 물건이 양쪽에 하나씩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상이다. 신앙인들이 외면하고 등진 주님의 고난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부활에만 침 흘릴 뿐, 고난은 주님의 몫이라고, ‘주님이니까 가능하지 우리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부르심은 겸손히 사양한다.

▲ Dolan Geiman의 「Silver Swan」 ⓒU.H.M. Gallery 단해기념관

어느 개신교 신자가 「Silver Swan」 양쪽의 고상을 보며 한 말이 떠오른다. 개신교 십자가에는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는데, 가톨릭은 아직도 고난을 받고 있다고. 뭔가 우월감을 드러내는 어투로 들렸다. 그 분의 진의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텅 빈 십자가를 걸어놓으면 우월하고, 십자가 고상을 걸어놓으면 열등할까?’

수명이 길어지는 오늘날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치매다. 치매에 걸리느니 암에 걸리는 게 낫다는 씁쓸한 농담이 회자된다. 그런데 치매에는 묘한 구석이 하나 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준다는 점이다. 차라리 지웠으면 좋겠다 싶었던 상처들을 지워준다.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준다. 만약 좋았던 기억들은 남겨두고, 아픈 기억들만 지워지면 어떨까? 얼씨구나 하고 환영할까?

치매를 다뤘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젊을 때, 억울하게 남편을 잃고 갖은 고생 속에 아들을 홀로 키운 주인공 김혜자가 치매에 걸린다. 너무나 힘겨웠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지워진다. 그녀가 자식들과 남편 제사를 지내며 속으로 말한다.

“나의 인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과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당신이 죽었던 날보다도 지금이, 당신을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섭습니다.” 「눈이 부시게」 12회

행복했던 기억만 분리될 수 없다. 불행했던 기억도 함께 얽혀있다. 사랑한 만큼 아팠고 아팠던 만큼 사랑이 더 절절했다. 그래서 아팠던 기억을 못내 지울 수가 없다. 너무나 아파 떠올릴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차마 잊을 수도 없다. 아니 잊히는 것이 더 무섭다. 너무나 사랑한 이가 자신을 위해 감수한 고통이 어찌 잊힐 수 있을까. 사랑한 만큼 아팠고, 아팠던 만큼 사랑이 깊었던 그 기억을 어찌 쉬 지울 수 있는가.

십자가의 고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기쁨은 한 몸이다. 고난의 깊이만큼 부활의 기쁨도 커질 수밖에 없다.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가 아픈 꼭 그만큼, 부활의 기쁨도 커진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충분히 알려면, 바울처럼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사실 부활의 기쁨을 위한 거래여서도 안 된다. 십자가를 붙들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지 깨닫는 그 자체로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텅 빈 십자가뿐 아니라 예수님 매달린 십자가도 포기할 수 없다. 십자가 고상 앞에서는 개인적인 욕망을 쉬, 먼저 간구할 수가 없다. 무엇을 더 달라고 조를 수 있는가. 온 생명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을 주셨는데. 다만 그 사랑에 녹아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을 먼저 구하게 된다.

알긴 알겠는데, 이해는 되는데, 감동도 되는데, 너무나 무겁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무덤으로 들어오신다. 텅 빈 무덤 같은 영혼을 부활이 잉태될 자리로 삼으신다. 돌문을 열어 맞이하면, 주님께서 일으켜주신다. 주님의 아픔과 주검을 맞아들이면, 주님과 함께 살아난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사랑의 몫이다. 주님과 함께 살아난 사랑의 몫이다.

“어디에 있느냐?” 주님 물어보시자 발밑을 깊이 살핀다. 아담도, 가인도, 사라도 그저 죄와 살인과 메마름 속에만 있었던가? 그 모든 곳은 다 하나님 품이었다. 텅 빈 무덤 같은 영혼도, 십자가가 엄두도 나지 않는 두려움도 다 주님 품 안이다. 그 품에 안겨 깨어날 때, 그 모든 자리에 부활은 잉태된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