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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외부인들이 내부인들이 되다 (6)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4.11 19:12

이스라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암송한 후 여호수아는 자신의 연설에서 힘든 부분에 도달했다.(여호수아 24장 14-15절) 본문 속의 변화는, 너희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이제 그러므로”에 의해 구분된다.

복음이 바꾸어 놓은 관계, 야훼와 그의 백성

기억은 현재에 영향을 주며, 여호수아는 설화의 직설법을 긴급한 명령문으로 바꾼다. 그 명령문은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야훼에 관한 적극적인 명령문(a positive imperative)이 있다.

◦ 야훼를 경외하라, 다시 말해서, 궁극적인 진지함을 가지고 야훼를 따르라.
◦ 야훼를 섬겨라, 다시 말해서, 단 한 분이며 타협하지 않는 이 주권을 인정하는 계약 속으로 들어가라.
◦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경외하고 섬겨라.

영어 번역 성서 중에 하나인 NRSV에서 “온전함”(sincerity)으로 표현되는 히브리어 용어는 분열이나 애매 모호함이나 보류가 없는 전체(wholeness)와 완전(integrity)을 의미하는 tamim이다.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그것을 행하라. 그 명령문들은 이런 선택과 이 새로운 충성이 타협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강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그 같은 선택이 수반할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재촉으로 여호수아는 세겜의 청중들이 방금 암송된 이야기를 선택하고, 이 이야기들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창세기의 이야기를 선택하라: 젊은 여인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라.
◦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선택하라: 기업의 중역에게 출발의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라.
◦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를 선택하라: 집 없는 사람에게 권한부여의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라.

누구도 야훼의 이야기는 별문제로 하고 야훼를 알 수 없으며, 그런 이야기는 설화 속으로 침입하는 야훼의 능력에 의해 변형되는 사회 경제적ᆞ정치적 현실에 관심을 갖는다. 새로운 하나님을 선택하고 세상에 대한 재정의를 선택하라.

복음이 바꾸어 놓은 삶, 이전의 삶의 것들을 버리라

둘째, 여호수아의 명령문은 이 적극적인 선택의 대가인 부정적인 것을 진술한다. 강 저편과 이집트에 너희 조상들의 신을 버려라.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몰아내라. 만일 야훼의 이야기가 채택된다면, 다른 충성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세겜에서 맺어진, 아니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계약을 통한 새로운 삶은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Getty Image

이 요구는 개인적이며 사회적이고, 사적이며 공적인, 삶의 모든 측면에 관계하는 심오한 양자택일의 것이다. 창세기 35:1-4에는 “벗어버리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밀접하게 관계된 설화가 있다. 야곱은 세겜에서의 연설에서 자신의 일행에게 명령을 한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2b-3)

알브레흐트 알트(Albrecht Alt)는, 이것이 세겜에서 벧엘까지의 순례를 있게 했으며, 극적으로 신들의 교환을 상징화한, 정식으로 제정된 예배의식이었다고 제안했다.(1)

흥미롭게도, 야곱은 세겜 근처에 있었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이방 신상들을 숨겼다.(4절) 여호수아가 모임을 개최하는 세겜은 좀더 고대의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버리는 장소로서, 여기에서는 특정한 종류의 의복과 장신구에 의해 상징화되는 장소로서 기능을 한다. 다른 충성들, 다른 두려움들, 다른 희망들, 그리고 다른 이익들의 값비싼 포기가 있기 전까지, 야훼는 신봉될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 나는 이런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명령들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평행구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나타난다고 제안한다.(2) 에베소서 4장에서 저자는 완강한 명령문을 제시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버려져야 하는 것은 삶의 이전 방법, 즉 옛날의 정체성인 옛 사람(an old self)이다. 입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에 따른 새 사람(a new self)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벗어버리는 것”은 거짓(25절),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 그리고 악의(31절)를 포함한다.

그것들의 위치에 친절하게 함과 용서가 와야 한다.(32절) 벗어버리고 입는 과정이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것이 되도록 한 의복의 은유를 주목하라. 그 은유는 창세기 35장의 예식의 행위에 아주 가깝다.

동일한 움직임은 골로새서 3:5-14에서 분명하다. 부정적인 것은 땅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기” 전까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그리고 (우상인) 탐심을 죽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명령은 10절에서 즉시 뒤따라 나온다.

너희는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될 것이다.(10절) 그 새사람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입게 된다.(12절) 장중한 결론은 이렇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절)

옷을 갈아입는 것과 자아를 바꾸는 것에 관한 이런 진술들은 공통적으로 세례와 관계된 행위들이라고 생각된다. 새사람을 명백하게 나타내기 위해 의복의 극적인 교체가 있었을지 모른다. 세례는 정체성 재확인의 극적인 행동이다.

이 예전 행동이 첫 번째는 야곱에 의한 그 다음은 여호수아에 의한 세겜에서의 두 행위들과의 연속성 속에 있음을 주목하라. 성서와 복음서의 하나님의 용인은 극적이며, 급진적이고, 전적인 변형을 필요로 한다.

만일 여호수아 24장에서 야훼를 섬기는 것이 야훼의 이야기를 채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조상의 신들을 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 요구사항이 다른 신들의 이야기들로 하여금 누구도 더 이상 정체성이나 지각력이나 혹은 상상력을 형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 젊은 여인이 가능성의 이 이야기를 채택함으로서, 그녀는 절망의 이야기를 버리려고 한다.
◦ 지쳐버린 중역이 출발의 이야기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는 유순함의 이야기를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 집 없는 사람이 권한부여의 이야기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는 박탈과 불리한 조건의 이야기를 벗어버리려고 한다.

신들을 바꾸는 것은 이야기를 바꾸는 것, 즉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3)

복음이 바꾸어 놓은 삶,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세 번째 명령은 우리의 관심을 덜 끈다. 여호수아는 만일 야훼를 선택하는 것이 너희 눈에 악한 것 같으면, 너희는 두 개의 다른 선택권을 갖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너희는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이나 이집트의 신들을 선택할 수 있다.

두 선택 모두 가능하다. 그렇지만, 만일 너희가 이들 중의 하나를 선택하면, 너희는 방금 암송한 야훼의 설화를 가질 수 없다. 두 가지 일이 선택에 관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진술에 관해 내 마음을 울린다.

첫째, 여호수아는 애원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선택권을 진술하고 결정을 요구할 뿐이지만, 그는 다른 선택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야기의 이런 수용에 있어서 여호수아에게 위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둘째, 여호수아는 긍정적인 선택에 의해 감동을 받거나 부정적인 선택에 의해 단념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은 아무 의심도 없으며, 아무런 비판적 반성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분명하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

그는 자유롭고 부담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야기에 완전히 전념한다.

이 장은 이스라엘의 고전적이며 복음적인 기억에 따른 현실에 대한 강력한 재구성(reconstrual)을 시작한 여호수아와 함께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이런 재해석을 듣는 자들이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겜에서 아무도 그들의 옛 충성이나 옛 신들이나 그들의 옛 이야기들을 지키지 않는다.

젊은 여인은 그래서 절망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지쳐버린 중역은  희망 없는 유순함과 순응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집이 없는 사람은 불리한 조건과 박탈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삶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는 다시 선택하는 토대를 제공하며, 그래서 지금 여호수아 자신은 애매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다시 선택하고 있다.

미주

(미주 1) Albrecht Alt, “Die Wallfahrt von Sichem nach Bethel,” Kleine Schriften zur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I (Munich: C. H. Beck Verlagsbuchhandlung, 1953), 79-88.
(미주 2) 이 본문들의 세례 관습에 대한 관계는 Philip Carrington에 의해 효과적으로 주장되었다; The Primitive Christian Catechism: A Study in the Epistles (Cambridge: Cambridge Unversity Press, 1940).
(미주 3) 이 인용구를 위해서는 Peter L. Berger & Thomas Luckmann, 156-57을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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