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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과 높이심(슥 9:9-12; 빌 2:1-11; 요 12:12-19)사순절 여섯째 주일(4월1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4.12 19:02

1. 개선문과 독립문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황제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입니다. 그는 312년에 이교도 왕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전쟁 전에, 꿈속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XP’(교회에서 흔히 보는 ‘PX’ 혹은 ‘XP’는 그리스도, 곧 Χριστός의 헬라어식 표기의 처음 두 글자에서 인용한 것)를 목격한 뒤,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 315년에 개선문을 세웁니다. 높이 29m, 폭 25m로 로마에서 가장 큰 개선문입니다.

▲ 밀비안 다리 전투(사진 위)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사진 아래) ⓒGetty Image

이 개선문을 인상 깊게 본 나폴레옹은 개선문을 파리로 가져가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 결국 로마의 개선문을 본떠 파리에 개선문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한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그가 살았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그의 시신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높이가 50m, 폭이 약 45m 정도로 로마의 개선문 보다, 2배 정도 큽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를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과하며 행진했다고 합니다.

▲ 파리의 개선문과 라 데팡스의 신 개선문 ⓒGetty Image

이후 1983년에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테랑 대통령 때 ‘신(新)개선문’을 세우게 됩니다. 높이가 36층 건물 정도인 110m이며,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미래의 신도시, 라 데팡스(la Défense, 프랑스어로 저항, 방어라는 뜻)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서재필 선생이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참고하여, 1896년 서울시 서대문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됩니다. 원래는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迎恩門)이었지만, 독립협회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더 이상 다른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로마나 파리의 개선문은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나가는 문이었고, 우리나라의 독립문은 다시는 다른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로 ‘문’에 대한 의미가 다릅니다.

▲ 영은문과 독립문 ⓒGetty Image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루살렘 공식 입성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마 21:1-22,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어린아이들과 많은 군중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말 “만세”와 비슷한 의미로, “구하소서”, “도우소서”라는 기원의 말입니다. 이것은 왕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그 후 6일째에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그렇게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이 그 외침을 바꿉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종려주일인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제목은 ‘낮아짐과 높이심’인데, 독립문과 개선문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종려주일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 입성이기에 개선문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준비이기에 낮아짐의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낮아짐 그 자체였습니다. 그 낮아짐의 절정이 바로 오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은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낮아짐의 외형적 모습을 그려주고 있으며, 서신서인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케노시스(Kenosis, 空化, 자기비움) 기독론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낮아짐으로 십자가 죽음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높여주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낮아짐’과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심’인 것입니다.

2.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귀환명령으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시기를 ‘포로 후기’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때 활동한 두 명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쌍둥이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두 예언자가 외친 메시지는 ‘성전의 재건축’입니다. 70년 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을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다백성은 생업에 전념하느라,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한지 16년이 지나도록 공사를 끝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학개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당장 성전을 지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직설적인 예언자이지요. 그래서 말이 짧습니다. 분량도 학개서는 2장뿐입니다. 그러나 ‘환상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스가랴는 환상도 들려주고, 차분하게 백성들에게 설명하며 용기를 주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분량도 14장까지 됩니다.

아무튼 1차 포로귀환 때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스가랴는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전은 반드시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예언합니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착공 20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됩니다(기원전 516년). 이를 ‘제2성전’, 혹은 총독의 이름을 따,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가랴서에는 메시야 관련 예언도 많이 나옵니다. 메시야인 그리스도는 종과 왕,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으로 강림하실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 곧 메시야의 오심과 통치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리고 이 메시야의 사역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9장의 내용을 알아야 본문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스가랴 9장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긍휼, 메시아 예언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9장 1절부터 8절까지는 이방 민족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수리아 지역의 하드락, 다메섹, 하맛, 그리고 베니게 지역의 두로와 시돈, 블레셋 지역의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이 그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이방에 대한 심판 경고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과 승리의 역사가 메시야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는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되, 힘과 군사력이 아니라, 겸손으로 세상을 굴복시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꼼꼼히 읽어보아야 보이는 말씀이 다음에 이어집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너는 나와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나 그 피를 생각하여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내리라. 수도 시온아, 포로들은 그리던 고향을 찾아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네가 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아픔은 내가 곱절로 갚아주리라.”(슥 9:11-12)

스가랴가 사역할 당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직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굴(구덩이), 곧 감옥에 갇혀있던 자들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받는 요새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피로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말씀인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볼까요?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7-18)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것처럼, 아브람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뤄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오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개선문으로 승리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3.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오늘 신약 본문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이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뤄짐을 보여 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2-15)

그런데 제자들은 나중에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요 12:16-18)

 

▲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Getty Image

이러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은 그 상황을 잘 묘사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요 12:19) 그러나 군중들이 본 것은 ‘왕’이었지 ‘나귀를 탄’ 왕은 아니었습니다.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되,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병거와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도 끊는 평화의 왕, 그의 통치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는 땅을 주겠다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왕의 모습이었지, 저 불의한 로마의 권력에 죽임을 당하는 연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군중들은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왕과 같이, 장군과 같이 개선문으로 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정신과 삶에 관해 가장 깊이, 그리고 잘 알았던 철학자는 니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최후를 보면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1889년 1월 3일 아침 니체는 토리노의 하숙집을 나왔습니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 마차 대기소에서 난폭한 마부가 자신의 말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니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렀던 동정심이 터져 나와 그의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니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말의 목을 감싸 안았습니다. 정신을 잃은 니체는 말 목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니체의 하숙집 주인도 광장으로 내려왔다가 니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니체는 이전의 니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니체의 정신을 무너뜨린 최후의 사건인 ‘채찍질 당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유사한 장면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도 나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술 취한 농부들이 말을 채찍질로 죽이는 꿈을 꿉니다. 그는 동정심을 느껴 죽은 동물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채찍질은 니체가 수없이 동일시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들에게 채찍질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말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마차에 묶여 있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매여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을 보았던 것일까요? 아무튼 니체는 나귀타고 오신 예수의 수난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 니체와 토리노의 말 ⓒGetty Image

4.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하면, 억압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잠복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잠복된 억압은 에너지를 축적하여 밀도가 심해지는데, 이렇게 강화된 억압은 화산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폭발합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증상으로 표출되는 이러한 억압의 폭발은 개인적으로는 ‘강박신경증’으로, 집단적으로는 ‘종교’라는 집단 신경증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신경증이 개인 종교라면, 종교는 집단 신경증”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 나오는 프로이트의 말을 들어볼까요?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 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둠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이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오이디푸스 혁명(아버지 살해)이 승리한 결과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종교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와 불교, 다신교와 모세, 유대교와 기독교, 가톨릭과 개신교 등 부친 종교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반역 승리이자,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혹은 동일시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독교는 ‘근원적 죄의식(프로이트식으로는 부친살해)’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종교’,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즉 기독교는 아들을 통한 신과의 화해, 부친과의 화해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에게 저질렀던 죄업을 예수를 통해 속죄 보상하는 행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원죄를 씻어주는 예수를 구세주요, 해방자로 고백합니다. 케노시스 기독론은 바로 그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낮아짐, 곧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고백록』에서 “기독교에는 플라톤 철학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유대교가 부친살해의 억압된 기억에 근거한 부친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이를 인정하면서 부친과의 화해를 말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시작이 바로 케노시스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는 낮아짐과 그 낮아짐을 높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낮춤의 절정인 죽기까지 복종하심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그리스도교는 패배의 종교가 아닙니다. 승리의 종교입니다. 그 승리는 낮아짐에서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눅 6,21)

5.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기 비움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순종입니다. 그 마음을 품는 것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1-5)

예수의 마음품고 낮아짐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높이시는 역사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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