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을 매다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가던 한 사람이 반문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단순한 모독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메시야라면, 그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절규로도 들립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이자 살아남아 가슴 치는 이들의 절규로 메아리칩니다. 곁에 있던 다른 사형수는 꾸짖지만 주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꾸짖을 수 없는 아픔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절규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못하신 걸까요? 고통 받고 살해당하는 이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냉혹한 침묵이라 손가락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침묵은 방관의 침묵이 아닙니다. 함께 죽어가는 신음입니다. 함께 죽어가며 그 죽음 속에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죽음이 생명의 길이 되게 하는 침묵입니다.

아무 잘못 없이 살해당하고 있음을 알았던 다른 사형수가 청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꼼꼼히 살피며 난해한 구석이 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오늘” 낙원에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사흘 후에나 부활합니다. 돌아가신 날 낙원에 다녀오십니까? 그날 그 사형수만 특별히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십니까?

▲ 지거 쾨더(Sieger Köder),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우리와 함께” ⓒGetty Image

산자락에 살다보니 봄을 놓치기가 쉬웠습니다. 꽃이 피는구나 싶어 꽃놀이를 가보면, 벌써 다지고 꽃잎들만 길바닥에 날리곤 했습니다. 산은 춥고 봄이 늦어 아랫동네 꽃잔치 지나는 줄 모르는 탓입니다. 그러면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했습니다.

그런 아쉬움이 김선우 시인의 싯구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꽃으로 오기 전 너는 무엇이었나/거꾸로 선 폭포였나 진흙창 뒹굴던 놋반지였나”(「백목련 진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중에서) 마음속 목소리가 이 한 구절에 대답합니다. ‘낙화는 이별이기만 한 것이 아니구나. 꽃으로 피기 전 머물던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구나. 다시 꽃은 하늘로, 흙으로, 바람으로, 빗물로 돌아가 언제나처럼 함께 있네.’

하나님 뜻 이뤄지는 그 나라는 어떨까요? 주님과 함께 거하는 낙원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막에 기상 이변으로 며칠 간 폭우가 내리자 꽃밭이 되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사막에 꽃밭이 이미 있었듯이, 봄은 겨울 속에 이미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언젠가 활짝 피어날 주님의 정원(본문의 낙원은 일종의 정원을 의미합니다), 풍성한 열매 주렁주렁 탐스러울 그 나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그 끔찍하게 메마른 광야로 돌아가 봅니다. 죽음 직전에, 죄인으로, 강도로 죽어도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많은 이들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면 놓치기 쉽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놓칩니다. 겨울 속에 가득 차 있는 봄을 놓칩니다. 죽어서나 갈 낙원으로 미뤄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오늘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위 그 부조리함을 통해, 그 속에서부터 부풀어 오르게 할 누룩의 오늘입니다. 숨지시는 모습만으로도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던 오늘입니다.(막15:39)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루신 오늘 낙원이 움터옵니다. 다만 그 낙원에 눈을 뜨고 살아가며, 꽃 피울 일이 남은 오늘일 뿐입니다. 누군가의 골고다에서 그 오늘을 지켜내도록 부르십니다. 그 오늘을 믿어주고 함께 이뤄가는 낙원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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