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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차별주의자라면, 우리는 그 신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김보영의 소설 『천국보다 성스러운』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4.27 18:09

“절대자가 차별주의자라면, 우리는 그 절대성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묻는 작가 김보영은 『천국보다 성스러운』 (일마, 2019)에서 SF형식에 담은 페미니즘 우화로 신앙과 젠더, 종교와 페미니즘이라는 만나기 어려워 보이는 영역들을 ‘신의 강림’이라는 기이한 사건 속에서 풀어냅니다. 김보영 작가는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이자, 한국 SF 팬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었습니다.

아무튼 소설의 이야기는 두 축으로 진행이 됩니다. 퇴직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주인공 여성 영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영희가 잠자리에 들며 상상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한 축입니다. 먼저 한 축이 되는 영희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쉰 살이던 10년 전 퇴직한 아버지가 텔레비전 리모콘을 벗 삼아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희는 낮이면 밖에서 일을 해 돈을 벌고 퇴근해서는 아버지의 밥을 차리는 등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사노동은 여자 몫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딸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구차한 목숨을 이어갈 따름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는 신세 한탄을 한다. 요새 세상이 어떻게 되어먹었기에 아내까지 잃은 불쌍한 늙은이 하나 돌볼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는 채널을 돌리며 구차함을 잊고자 한다. 그는 선한 사람이고 사는 게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다가도 고작 삼시 세끼 먹기가 왜 이리 서러운가 싶어 울화통이 터지곤 한다. 그는 알지 못한다. 아주 간단히 그 구차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족에게서 괄시 대신 사랑을, 멸시 대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족의 화목과 삶의 풍요가 그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잃어버린 모든 품위와 권위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쌀을 씻어 밥통에 넣고, 냄비에 국을 앉히기만 한다면.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기만 한다면. 빗자루를 들어 집을 쓸고 걸레질을 한다면. 하지만 그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의 비천함은 오직 그가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그의 구차함은 오로지 남이 지은 밥을 대가 없이 제 입에 쑤셔 넣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11-12)

남성가부장제의 지독한 학습으로 아버지는 결코 부엌에 들어가거나, 밥을 짓거나, 세탁기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이어 소설은 ‘남자 형상으로 강림한 신과 싸우기’로 나섭니다.

소설의 두 번째 축은, 영희가 잠자리에 들며 상상하는 이야기들이라고 했죠? 이야기의 서두에는 똑같이 이런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모두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는 문장들입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은 영희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인류 역사에 대한 짧은 우화가 나옵니다.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그 차이를 성역화한 기나긴 과정이 신의 이름으로, 신의 의지를 빌려 자행되었음을 간추려 보여줍니다. 가령, 지상에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신은 “남자는 우수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라는 가르침으로, ‘고추 지상주의’를 부추깁니다. 사실 이러한 남근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는 남자를, 백인을, 이성주의자를, 이성애자를, 비장애인을 필요할 때마다 신으로 소환하지 않았던가요?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재미있습니다. 아이디어가 기발합니다. 200년 만에 냉동상태에서 깨어나, 로봇들만 남은 세상의 신으로 부활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미래의 신이 됩니다. 인류가 절멸한 미래에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을 멸종한 신으로 떠받들고 부활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합니다. 신전에 모인 로봇들은 회의를 거듭하지만, 신의 이러한 비합리성(뻘짓)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남성 신의 뻘짓은 이렇습니다. 냉동실에서 깨어난 그는 로봇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말고 여자 로봇이 시중을 들어주면 좋겠어. 너처럼 두툼하고 깡통처럼 생긴 로봇 말고 말야. 좀 꾸리꾸리하잖아.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여자가 옆에서 말벗도 되어 주고 밥도 좀 해주고 사실 그… 육체적인 것도 해주면 좋겠지만 기능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여자 로봇을 불러줘. 너희 중에서 가장 예쁘고 섹시한 친구로. 그거 말곤 난 별로 바라는 거 없어.’ 남자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 뒤, 자신의 너그러움과 소박함에 대한 가벼운 찬사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Al을 보았다. Al은 정지해 있었다. 숨을 쉬지도 눈도 깜박이지 않는 철로 된 생물(이라고 봐야겠지…)이 동작을 멈추고 입을 다무니 적막의 무게가 달랐다. 남자는 뼛속까지 도로 얼어붙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잘못했으니 그만 도로 냉동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하고 싶어질 즈음 Al이 입을 열었다. ‘여자가 무엇입니까?’ 남자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간인데 나랑 좀 다른 인간이야. 가슴이 있고…’ ‘그러면 로봇 중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알아.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여자처럼 생긴 로봇 말이야. 마르고 가슴이 있고 엉덩이가 좀 나왔고 얼굴이 좀 예쁜…’ ‘제 외모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남자는 이처럼 간단한 문제에 왜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한지 혼란스러워하며 Al을 앉혀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Al은 더 깊은 신학적 혼란에 빠졌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신이시여.’ Al은 신중하게 물었다. ‘지금 말씀하시는 여자라는 것은, 말하자면 모델명인지요?’”(35-37)

계속 읽어 볼까요?

“최고회의장은 얼음 같은 침묵에 빠졌다. 로봇 인류 중 최고의 지성만을 모아놓은 자리였건만 신의 이 기이한 주문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들 중 가장 신앙에 회의적인 원자학부의 Cal이 말문을 뗐다. ‘저는 신이 아무리 모순적인 지시를 한다 해도 따라야 한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신의 주문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좀 황당할 뿐이지요.’ 대신관 Al이 변명했다. ‘좀 황당한 수준이 아닙니다. CPU도 저장용량도 메인보드도 아니고 가슴과 엉덩이 부품의 크기로 로봇을 분류하고 역할을 나누라는 이 엽기적인 지시는 뭐란 말입니까? 우리를 전선 모양이나 엔진 색깔로 분류하라는 지시가 그보다 덜 황당하겠습니다.’ ‘신께서 이런 지시를 하신 의도가 뭘까요?’ 신전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그래서 대신관에게 호의적인 편인 건축학부의 K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신의 뜻은 오묘하니 감히 우리 피조물이 가늠하기…’”(38-39)

인간의 비합리성이 이렇게 희화(戱化)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희 아버지를 닮은, 남성 인간 신은 이렇게 ‘뻘짓’을 일삼다가, 다시 죽임을 당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유난히도 노을이 붉은 저녁, 과학이 지배하지 않는 시절이었다면 신관들이며 점쟁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신의 계시라며 호들갑을 떨 만큼 짙은 핏빛으로 하늘이 물든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하늘의 신이 내려오며 시작됩니다. 신은 백인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영희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어쩌면 사람이 이토록 초라한가. 초월자로서의 능력도 지혜도 교양도 후광도 초능력도 거대함도 위엄도 없는 사람이, 신과 고작 단 하나의 닮은 점밖에 찾지 못한 하찮은 피조물이, 고작 그것 하나를 두고 신이 자신과 동류라는 확신에 젖어 말한다. 제 옆에 있는 가족더러 너는 그렇기에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겠느냐고, 너는 나보다 열등하지 않느냐고, 받아들이고 나를 경애해달라고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하지만 TV를 보던 어떤 사람들은 다른 말을 했다. ‘역시, 신은 백인이었어.’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친구, 동료, 애인, 아내를 벅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성함과 우월성을 확신하며 동시에 상대의 열등함을 확인하는 얼굴로. 말은 계속 이어졌다. ‘코카서스 인종이야.’ ‘남방계인데.’ ‘역시 노인이로군.’ ‘장애인이 아니야.’ ‘이성애자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에 여드름도 없지.’ ‘대머리도 아니고.’ ‘역시 키가 커.’ ‘근육질이야.’ ‘관상학적으로 태양인이네.’ ‘귓불이 넓어.’ ‘복점 있는 것 봤어?’ ‘유태인 전통 복장을 입고 있잖아! 역시 신은 유태인이었어!’”(56-58)

알량한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은 신의 형상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에 매달리지만, 주인공 영희와 작가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들어볼까요?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본인 자신이 신이기에 신을 소환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뿌려진 신의 파편이며 지상에 내려온 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자신과 성별, 성적 취향, 세대, 피부색, 민족이 같은 신을 소환하여 자신의 주장과 존재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역사를 통틀어 늘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과 닮지 않은 자들의 역사는 늘 지워졌고, 그 사실은 광화문 광장의 하늘에 신이 내려온다 한들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영희의 삶과 머릿속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기이한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삭제되지만, 영희는 무언가를 깨닫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영희의 마지막 상상은 먼 미래가 아닌, 우리 세대의 한 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천국’과 같은 세계가 아닌 가능한 다른 세계로서의 우리가 디딘 ‘지상’입니다. 신을 소환하지 않는, 천국보다 성스러운 지상을 만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보다 성스러운 지상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가 온 세상에 뿌려진 신의 한 파편임을 지각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그들은 차별적인 신을 자신의 형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을 소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별받는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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