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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사 25:1-9; 고후 4:7-18; 요 5:19-29)부활절 넷째주일(5월1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5.10 18:56

1.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오늘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절망과 고통의 한 가운데서 외치는 희망의 소리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큰 실망감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연대는 상실되었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며, 이웃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지 않는 정서적 공감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일찍이 독일의 시인 B.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라, 저는 이렇게 변주해 봅니다. “구박받은 며느리가 엄한 시어머니가 된다.” 어릴 적에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자신도 부모를 닮아, 자식을 학대할 때가 있습니다. 싫어하면서도 닮는 것입니다.

성급한 결론이겠지만, 오늘 우리 한국 사회의 비극은 86세대의 비극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를 통칭해 86세대라고 합니다. ‘80년대 학번, 60년대에 출생한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이 아직 30대였던 1990년대까지는 386세대라고 불렸고, 이후 40대로 접어들어서는 486세대라고도 했지만, 2018년 이후 언론에서는 그냥 86세대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단이 정한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입니다. 86세대는 영화 <변호인>, <1987>, <박하사탕>, <택시운전사> 등에 나와 있듯이,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불사른 세대입니다.

▲ 영화 <변호인>, <1987>, <박하사탕>, <택시운전사> 포스터

그러나 이러한 86세대가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자기 안의 파시즘을 키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발생사적 근원입니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 전반에 더 큰 실망감과 패배주의를 퍼뜨립니다.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지금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의 뿌리는 바로 86세대의 실망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86세대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민주적인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사명감이 한국 사회개혁의 중심이 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는 ‘86세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철해져 볼까요? 86세대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나요?

중·고등학생들은 살인적인 경쟁에서, 대학생들은 경제적인 압박에서, 청년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에서, 실업자들은 생존의 공포에서, 여성들은 성적 억압에서 해방 되었나요? 나아가 우리 사회는 더 평등해지고, 국가는 더 정의로워졌나요? 국민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사실은 ‘헬조선’, 곧, 시대착오적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86세대의 실패는 무엇 때문인가요? 김누리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첫째, 정치적 비전과 상상력의 빈곤, 둘째, 도덕적 우월감의 덫, 마지막으로 파시즘의 역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실패인 ‘정치적 비전과 상상력의 빈곤’은 86세대가 ‘군사독재 타도’가 일차적인 목표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인 해방’이 아니라, 정치 민주화라는 ‘특수한 해방’에 집중했기에 지금의 실패를 낳았습니다. 한국 사회가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 문화민주화는 여전히 요원한 현실은 바로 이러한 해방적 상상력의 빈곤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실패인 ‘도덕적 우월감의 덫’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86세대는 군사독재에 관해 늘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도덕적 우월감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득권 세력이 된 지금, 도덕적 우월감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실패의 원인인 ‘파시즘’은 안타깝습니다. 사실 86세대는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파시즘의 야만과 싸운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함이 일상에서는 이들의 한계가 되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브레히트의 말,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은 뼈아픈 통찰의 말입니다. 어느덧 적폐 세력보다, 더 적폐가 되어버린 86세대들의 얼굴들입니다. 닮지 말아야 할 것을 닮아버린 그들의 얼굴은 과거의 영웅주의적 환상만 가득 차, 오늘 젊은 세대들에게,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꼰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피난처 되시는 심판자를 찬양하며, 비록 인간의 연약성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복음의 능력을 통해 전도자의 영광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등됨, 곧 아들의 권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이자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인 오늘 부모 세대로서 어떻게 우리가 마지막 남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민주화를 경험했던 세대로, 무엇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피난처 되시는 심판 주

구약말씀 이사야서는 강력한 대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선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찬양을 함께 들어 볼까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사 25:1-3)

이러한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사 25:4-5)

피난처 되시는 심판의 주가 우리의 요새와 그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맥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 인간의 연약성과 복음의 능력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과 복음의 능력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질그릇과 보배의 비유로 표현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보배)’을 지닌 ‘연약한 인간(질그릇)’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0-14)

10절에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한다’는 말씀입니다. 11절의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고후 4:14, 공동번역)”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말씀을 같이 볼까요?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예수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아들의 권한

예수님의 삶을 표적(세메이온)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요한복음은 전통적으로 7개의 표적들로 편집되었다고 봅니다. 중심이 되는 4번째 표적인 ‘5천명을 먹이신 표적(아래 번호‘0’)’을 주님의 삶과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성만찬의 의미로 보면, 내용적으로 6가지 표적은 교차 대칭 구조를 띠게 됩니다.

(1)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요 2:1-12)
(2) 죽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4:46-54)
(3) 안식일 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5:1-16)
(0)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표적(6:1-21)
(3-1) 안식일 날, 날 때부터 소경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9:1-41)
(2-1)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1-1)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은 이야기(19:25-37, 특히 34절 말씀)

(3)과 (3-1)은 ‘안식일 날 치료’하신 표적이고, (2)와 (2-1)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표적입니다. 그리고 (1)과 (1-1)은 ‘포도주(피)와 물’에 관련된 표적입니다. 각각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십자가에 쏟으신 자신의 피로 세상을 구원한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일의 주인이자,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성찬식을 통해 따르라는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3)과 (3-1)은 안식일 논쟁을 의미합니다. 안식일 논쟁의 경우, 요한복음은 오직 예수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안식일에도 주인 되신 예수께서 생명을 구원하는 자비의 행동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3)의 표적은 또 한 가지 세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유대교의 율법이나 다른 종교적인 실천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병고침과 죄사함을 주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3)의 표적 이후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선포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심판의 권한을 받으시어, 예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길지만, 본문 말씀을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교독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19-27)

21절의 말씀이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요, 공동번역에서는 좀 더 쉽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듯이,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요 5:21).”라는 말씀입니다. 즉, 아들의 권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이 말씀을 듣는 자는, 곧 ‘아들이 원하는 자(21절)’로 심판을 면하고, 참 생명의 길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5.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앞서 86세대의 실패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86세대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68세대를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사실 독일의 68세대는 미국에서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1968년 여름에 절정을 이룬 ‘68년 운동’의 영향입니다. 미국에서는 기존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적인 생각이 그 기본을 이루었습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에 반항하는 히피족(hippie)이 이때 나타났습니다.

히피문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해, 전 세계 청년층에 확산되어 하나의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스콧 매켄지(Scott McKenzie)의 팝송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는 히피들의 찬가였습니다.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You're gonna meet some gentle people there. For those who come to San Francisco, Summertime will be a love-in there. In the streets of San Francisco, Gentle people with flowers in their hair. All across the nation Such a strange vibration, people in motion. There's a whole generation With a new explanation.
(당신이 만일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반드시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당신이 만일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거기서 온유한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온 사람들을 위해, 여름엔 그곳에서 사랑의 집회가 열릴 거예요.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선 온유한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있어요. 온 나라가 그런 새로운 분위기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활기에 넘쳐요. 새로운 생각을 가진 건전한 세대가 살고 있어요.)

▲ 스콧 매켄지의 팝송 <샌프란시스코> 음반 표지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히피들은 자연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일상적으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라는 땅이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을 예찬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나누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한 아시시의 성(聖, saint)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2~1226)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후 히피 문화는 와해되었지만, 히피 세대가 즐겼던 장발과 수염, 커다란 펜던트, 샌들 등의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이 독일로 건너와, 당시 독일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의 젊은 세대들은 2차 세계 대전을 치룬 부모세대들에 의문을 던지며, 기존세대에 반항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68년 운동’은 지금까지 ‘반(反)권위주의’적인 운동으로 독일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독일은 68세대의 작품입니다. 부조리한 세계, 억압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68년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오늘의 독일을 만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의 변화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올바른 정치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김누리 교수의 말을 들어볼까요? “68세대의 지지에 힘입어 전후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브란트 정부는 68세대의 꿈을 현실로 옮겼다. ‘경쟁은 야만’이라는 철학 아래 경쟁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학교, 학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보수’라는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검소하고 유능한 의원들로 채워진 연방의회,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 100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사회. 이것이 68세대가 만들어낸 독일이다.”

이렇게 독일의 68세대는 나치 전력을 가진 자가 수상이 되는 파렴치한 나라를 철저한 ‘과거청산의 나라’로 바꾸어놓았고, ‘라인강의 기적’ 속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나라를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감행’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동서독의 오랜 적대를 허물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동방정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마디로, 68세대는 ‘새로운 독일’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등의 개혁 법안을 국회 토의 안건으로 상정(패스트 트랙)함으로 개혁의 틀을 잡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86세대가 초심을 잃지 않고, 다른 세상의 기틀을 만들면 됩니다.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촛불세대들에게 지금보다 못한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것, 헬조선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우리 부모세대, 혹은 86세대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소리 없이 감당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를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6-9)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어느덧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지고, 몸이 예전같이 않지만,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이 우리(86세대)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의 부모 세대 여러분, 5·18을 통해 파시즘과 싸웠던 86세대 여러분, 우리의 영적 샌프란시스코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을 예찬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나누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한 성서의 에덴동산이자,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며, 성 프란체스코가 사모했던 곳입니다. 그 샌프란시스코에 가기 위해 머리에 꽃을 꽂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어버이주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달아드린 꽃을 가슴에 꽂지만, 마음으로는 머리에 꽂으시기 바랍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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