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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주기도문, 일용직 노동자들의 기도Q복음서의 노동자 (3)
김재현 교수(계명대) | 승인 2019.05.24 14:14

Q-주기도문에 속하는 Q11:3을 해석할 때 소위 말하는 방랑 선교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1) 필자는 Q 편집의 차원에서는 방랑 선교사의 정황이 감지된다는 이민석의 논지를 수용한다.(2) 그러나 Q 전승의 맥락에서는 일용직 노동자의 맥락에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Q-주기도문은 누구를 향한 가르침이었나

Q-주기도문도 마태나 누가의 주기도문과 같이 ‘당신 간구’와 ‘우리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Q 주기도문의 우리 간구에는 부채의 탕감을 구하는 기도(Q11:4) 이전에 양식을 구하는 기도(Q11:3)가 위치하고 있다. Q11:3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τὸν ἄρτον ἡμων τὸν ἐπιούσιν []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Q11:3)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내일 양식을 주십시오(Q11:3). 

이 구절에서 결정적인 단어는 τὸν ἐπιούσιν(톤 에피우신)이다. 여기에 사용된 επιουσια(에피우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단어이다.(3) 그리고 이 επιουσια는 그 해석이 매우 복잡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루츠(U. Luz)는 이 단어의 해석을 5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이 단어는 επι(에피)와 ουσια(우시아)가 결합한 것인데, ουσια를 본질(Substanz)로 번역하면 αρτος επιουσιος(에피우시오스)는 “우리의 본질과 하나가 되는 빵”이다. 둘째, ουσια를 실존(Existenz)으로 번역하면, επιουσιος는 “실존에 필요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셋째, επιουσιος는 “오늘을 위한”으로 이해될 수 있다. 넷째, 언어적으로는 볼 때 επιουσιoς는 επιεναι(에피에나이/도래함) 혹은 η επιουσα(헤 에피우사/다가올 날)의 파생어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επιουσιος는 “내일의”를 의미할 수 있다. 다섯째, 네 번째 해석의 결과로서 επιουσιος를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종말론적 식사의 빵으로 해석할 수 있다.(4)

▲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루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녹아 있다. ⓒGetty Image

루츠는 위에서 나열된 επιουσιος에 대한 5가지 해석 가운데 네 번째 해석을 지지하며 따라서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내일을 위한 빵을 주소서”(5) 루츠의 독법의 근거는 어원학적인 것이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도 επιουσιος를 ‘내일의’로 번역하는 것에 찬성한다. 예레미아스는 επιουσιος가 επιεναι에서 파생되었다는 어원학적인 증거 외에 교부 제롬의 견해를 또 다른 증거로 제시한다. 제롬은 나사렛인들의 복음서에서 ‘내일’을 의미하는 아람어 מהר(maḥar[마하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επιουσιος에 해당한다는 것이다.(6) 크로산도 επιουσια가 “다가올 날”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7)

루츠는 이 기도에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정황이 담겨있다고 추론한다. 그는 우리가 이 기도에서 내일 다시 일거리를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상황”(die Situation eines Tagelöhners)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8) 필자는 Q11:3을 일용직 노동자의 상황에서 읽는 루츠의 해석에 동의한다. 하지만 루츠와는 다른 근거에서 Q11:3을 일용직 노동자의 기도로 파악한다.

해그너(D. A. Hagner)는 επιουσιος를 “내일을 위한”으로 읽는 독법에 반대한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내일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예수 자신의 말씀(마6:34)과 모순된다. 그는 내일 양식을 구하는 것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둘째, 내일 양식을 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라도 문장 말미에 오늘날(σημερον/세메론)이라는 단어가 불필요하게 강조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지만, 두 번째 문제제기는 신중한 대답을 요한다.

해그너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첫째, ‘염려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다른 일이다. 해그너는 염려와 기도를 같은 것을 치부하고 있다. Q복음서에서도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친다(Q12:22b). 그러나 동시에 Q복음서는 먹을 것을 위한 기도를 제시하고 있다(Q11:3). 이는 염려와 기도는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빌4:6). 그런 의미에서 먹을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Q복음서 내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둘째, “오늘날” 내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충분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하루 구분을 고려한다면 이는 이상한 주장이 아니다. 빈데만(W. Bindemann)은 팔레스타인에서 하루는 아침이 아닌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필자는 빈데만의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Q11:3을 방랑선교사가 방문한 가정에서 드리는 저녁 식사의 감사기도라고 해석한 것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Q11:3의 어디에서도 이 기도가 감사의 기도라는 것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9) 오히려 이 기도는 양식을 간절히 구하는 간구이다.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라는 점과 Q11:3의 기도가 양식을 간구하는 기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용직 노동자의 삶의 정황이 Q10:3의 배경으로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저녁에 품삯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 일을 하게 되면 내일의 품삯을 받게 되어 내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Q-주기도문, 부채탕감의 문맥 속에 있다

Q11:3이 일용직 노동자의 삶과 연관된다는 사실은 이 기도에 바로 뒤에 Q11:4a(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빚진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푼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용서해 주소서)의 부채 탕감의 기도가 위치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빈데만은 이 기도를 채권을 포기하고 떠나는 방랑 선교사의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태성이 지적한 것처럼 방랑 선교사들이 채권을 포기할만한 입장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이 간구는 빚의 매커니즘으로 연결된 사회에서, 예수 운동이 공동체 내부의 부채탕감 운동이었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이해될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수입구조 때문에 항상 양식을 걱정해야 할 뿐 아니라 채무의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채무를 갚지 못하면 옷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Q11:4a는 Q6:30과 상응한다. Q6:30에서 예수는 무상증여를 명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빌리는 자에게 채권의 회수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Q11:4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적은 돈이나마 벌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부채 탕감을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은  빌려주는 자 역시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황은 방랑 선교사의 상황 보다 일용직 노동자의 상황에 더 가깝다.

예수가 말씀한 하나님 나라, 부채가 없는 곳이었다

Q-주기도문은 내일의 일자리를 확신할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기도였다. 그들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배고픔 만큼이나 내일의 불안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또 Q-주기도문을 통해서 내일의 불안을 넘어서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불안정한 수입구조는 일용직 노동자들 서로 간에 빚을 지게 만들었고, 그 빚의 문제는 인간관계를 파괴시켰다. Q-주기도문의 부채 탕감 기도(Q11:4)는 무상원조와 부채탕감의 말씀(Q6:30)과 연동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요한 프로그램의 일환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의 빵 문제가 해결되는 나라일 뿐 아니라 내일의 빵을 위한 염려와 불안도 함께 해결되는 나라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부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나라이다. 부채의 고통은 오늘의 결핍 때문에 미래가 저당잡히는 고통이다.

누구보다도 열악한 삶을 살아야했던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Q-주기도문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기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대표적으로는 노태성,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상): 말씀어록과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5), 74-81.
(미주 2) 이민석, “Q주기도문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박사학위논문, 경성대학교, 2011), 73-80.
(미주 3) J. S. Kloppenborg, Q, the Earliest Gospel: An Introduction to the Original Stories and Sayings of Jesus (Louisville and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89.
(미주 4) 이상,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1. Theilband Mt 1-7 (Zürich and Neukirchen-Vluyn: Benzinger Verag and Neukirchener Verlag, 1992), 345-346.
(미주 5) Ibid., 346.
(미주 6) J. Jeremias, 『신약신학』, 정광욱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283. 예레미아스는 나사렛인을 위한 복음서가 마태복음서보다 후대에 속한 복음서라는 사실을 안다.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나사렛인을 위한 복음서는 마태복음서를 아람어로 옮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서를 아람어로 옮겼던 나사렛인을 위한 복음서 저자가 평소 자기가 외웠던 기도문을 그대로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미주 7) J. D. Crossan, 『가장 위대한 기도: ‘주님의 기도’의 혁명적인 메시지』, 김준우 역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212.
(미주 8)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346.
(미주 9) 노태성,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상): 말씀어록과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5), 76.

김재현 교수(계명대)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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