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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박진규 목사, 나는 아직도 동운이에게 미안하다
윤병희 | 승인 2019.05.27 15:59

경기도 오산 소재 한신대학교(총장 연규홍 교수) 교정을 들어서면 양옆으로 기다린 캠퍼스 좌우를 가르듯 그 한 가운데 오월계단이라는 공간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한 가운데 또한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류동운 열사의 추모비라고 한다.

▲ 경기도 오산 소재 한신대학교 한 가운데 위치한 오월계단에 세워져 있는 류동운 열사 추모비 ⓒ윤병희

그 추모비 앞에 그의 짧은 생애가 적혀 있다.

1961년 1월 3일 경북 포항 출생
1976년 광주진흥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연행. 단식투쟁으로 3일 만에 풀려남
1979년 3월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입학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에 의해 상무다로 연행, 심한 고초를 당하고 5월20일에 풀려남. 
1980년 5월 26일 도청 사수 중 일시 외출,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라는 일기를 남김
19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투쟁 중 계엄군에 의해 사망

이 추모비 안내에 따르면 류동운 열사는 197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한 신학도였다. 교회와 사회, 신학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던 그에게 광주민중항쟁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광주로 내려간 류동운 열사.

그렇게 류동운 열사는 광주도청을 최후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이러한 류동운 열사를 각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진규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예심교회 담임)이다. 류동운 열사와 한신대 신학과 동기다.

에큐메니안은 박진규 목사를 만났다. 박진규 목사의 육성을 통해 류동운 열사와 추모비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추모비 세우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 어떻게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나?

80년 광주 이후는 그곳이 ‘광주 사태’로 매도되고 침묵으로 일관된 때였다. 류동운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고 내가 총무를 맡았다.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광주 사태로 매도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많은 토론을 벌였다. 동기회(한신대79동기회)에서는 이를 ‘광주민중항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그때가 86~87년 전두환 말기였다.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민중항쟁’이라고 규정했다. 독재에 억눌렸던 민중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본 것은 처음일 것이다. 광주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경제적 약자,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동운이(류동운 열사)는 그 자신이 민중이라는 말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늘 그렇게 살았고...

▲ 추모비 제막식은 1986년 5월 27일이었다.

86년 초부터 추모비 건립 논의를 시작했다. 어느 한 사람의 기금에 의존하지 말고 기장인(한국기독교장로회)들의 의지가 담겨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노회마다 모금을 했다. 당시에는 쉽지 않았다.

▲ 교통편으로 인해 갈 수 없었던 제주노회를 제외하고 전 기장 노회를 돌며 모금한 것으로 세워진 류동운 열사 추모비는 그래서 더 값있다고 한다. ⓒ윤병희

노회에 찾아가 천원 이천원 모금을 해서 그 돈으로 세웠다. 제주만 못 갔고 거의 전국 모든 노회를 찾아갔다. 누군가의 거액 기금으로 세운 게 아니라 기장의 땀이 묻은 돈으로 세운 것이다.

▲ 추모비는 높이 3미터의 솟구치는 형상의 커다란 돌로 되어 있다. 앞면에 “광주민중항쟁류동운열사추모비”라고 씌어 있다. 이 비문은 누가 썼나?

강희남 목사님께 부탁했다. 찾아갔더니, 글씨를 쓰시기 전에 냉수로 몸을 씻으셨다. 정성과 힘을 다해 쓰신 것이다. 글씨를 보면 죽창이다. 혁명이 담겨있다고 할 정도로 마음을 다하여 쓰셨다.

글씨가 들어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 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렵게 찾았으나 다시 문제는 이 돌을 이곳으로 들여오는 것이었다. 경찰들이 쫙 깔렸다. 이걸 막으려고... 날 잡으려고...

그때 지혜를 주시는게, 덮고 들여오면 걸린다, 차라리 까고 들여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덮개를 씌우지 않고 들여왔다. 경찰들이 쫙 깔려있는데, 경찰은 이것이 위장이 되어서 들어올 것이라 여긴 것이다. 경찰은 덮개 있는 것만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맨돌을 트럭에 싣고 들어오니까 경찰이 신경을 안 쓰더라. (웃음) 그래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글씨 파신 분은, 교회 장로님인데, 글씨를 보고 기가 막혀 하더라. 자신도 큰 어려움이 생길 거라... 한참을 보고 있다가 방을 잡아달라 하시더라. 하루에 다 못 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못 들어 오실까봐 여기에 스치로폼 깔아드렸다. 그 위에서 주무시면서 글을 새기셨다. 

추모비 왼편 측면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한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없는 강물에 띄워주세요. (고 류동운 열사의 마지막 일기에서)” (그리고 그 밑에 약력이 적혀 있고, 하단에 “1986년 5월 27일 흰돌 강희남 씀”이라고 새겨 있다.)

▲ 추모비 왼쪽 옆면에 있는 글은?

마지막 일기다. 5월25일인가... 아버지가 동운이를 도청에서 끄집어내어 집으로 데려온다. 류동운 열사는 집에 갔다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도청에 들어간다. 들어가서 27일에 복부에 총상을 맞고... (죽은 것이다.)

▲ 류동운 열사와 신학과 동기로 추모비 건립에 애를 썼던 박진규 목사. 그는 아직동 친구 동운에게 미안하고 그립다고 했다. ⓒ윤병희

류동운 열사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했던 말이 전해진다.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이 다 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을 했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 합니까? 아버님의 평소 소신이 이럴 때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설교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럴 때 아버지의 신념이 흔들리지 마시고 붙잡지 말아주세요.”

▲ 5월27일 소식은 어떻게 전해들었나?

당시에 나는 경찰을 피해 숨어 있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도청 함락 소식과 함께 사망자 명단에 류동운이 있는 거에요. 얼마나 울었는지... 나는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죽음 소식을 듣고 너무 죄스럽고...

▲ 류동운 열사에 대한 기억은?

류동운은 너무 토론을 좋아해요. 피아노도 잘 치고... 음악 재능이 대단해요. 크레이지보이를 그렇게 잘 불러. 미친거 같은 세상이니까...

내 기숙사 방에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많이 했어요. 이 친구 얘기의 결론은 항상 같아요. 나라가 이런데 한국교회는 뭐하고 목사는 뭐하는 거냐... 우리는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죽자. 목사 몇 명만 죽으면 세상이 달라진다. 이 친구 주장은 그거에요.

매일 밤 토론을 하면서 결론은 이거에요. 죽어야 한다 우리는 썩어야 한다 밀알 아니냐... 하는 거에요. 짧았지만 자기가 늘 얘기하던 그대로 그렇게 살다 끝났어요. 짧게 살았지만 굵은... 내 소원이 있다면, 이 친구에게 명예목사를 주는 거에요.

▲ 당시(1980년) 류동운 열사가 다녔던 교정은 수유리였나?

(이곳 오산캠퍼스에) 추모비를 세우기 전에도 신중을 기했던 점이다. 선배들은 수유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이곳을 고집했다. 산자의 땅으로 가야 한다. 계속해서 후배들이 나오는 곳에 (추모비를) 세워 후배들에게 힘을 주는 상징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결국 선배들이 졌다.

이곳은 방어하기가 좋다. 철옹성이다. 당시 제막식할 때(1986년 5월27일) 전경차 서른 대가 들어왔다. 경기 인천지역에서 모두 동원된 것이다. 제막식이 끝나고 일주일간 전투를 했다. 학생들이 의자를 쌓아 막았다. 학생들 백여 명이 일주일 이상을 이곳에서 노숙하면서 (추모비를) 지켰다.

▲ 류동운 열사 이외에 다른 목회자는 없었나?

5.18때 전도사 두 명이 죽는다. 한 명은 류동운, 또 한 명은 문용동이다. 문용동 전도사는 호남신대 졸업하고 교단은 예장통합이다. 문용동 전도사는 당시 시민군과 갈등이 있었다.

시민군은 도청에 계엄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을 장치해 놓았는데 문용동 전도사는 만일 폭약이 터진다면 광주시가와 시민이 다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문용동 전도사가 (그런 위기의식 때문에) 폭약 폭발장치를 제거했고, 계엄군이 쳐들어 왔다. 해석의 차이가 있다.

예장 통합쪽은 이번에 세미나를 계획하면서 류동운과 문용동을 같이 다루었다. 나에게 연락이 왔길래 나는 문용동만 하라고 제안을 냈다.

▲ 고이간직 하고 있던 류동운 열사 추모비 제막식 사진을 꺼내 보여준 박진규 목사. 사진 속 인물은 강희남 목사이다. ⓒ윤병희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도청을 침탈하고 다른 시민군과 함께 류동운, 문용동 두 사람은 살해되었다. 박진규 목사에 따르면, 문용동에 대해서는 당시에 프락치 논쟁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문용동의 희생을 통해 그의 폭약 제거 주장은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예장 통합은 지난 5월16릴 한국기독교회관에서 ‘5.18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도들’이라는 주제로 1980년 과주도청에서 숨진 문용동과 류동운의 행적과 신학적 평가 등을 다루는 포럼을 열었다. 이 포럼에서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의 도주명 목사가 발제를 했다. 박진규 목사에 의하면 류동운 열사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예장에서는 위원회 차원에서 계속 사업을 지속시키고 있다. 솔직히 부럽다. 우리는 그런 게 없다. 동기회(한신대 79학번 동기회)를 중심으로 추모제와 학술포럼과 기도회를 해오다가 내가 기억하기로 2010년 이후로 거의 아무 행사가 없다. 지금은 관리도 되지 않고 있다.

지금 5.18정신이 훼손되고 망언을 일삼는 무리가 있는 상황에서 안타깝다. 최근의 우리 역사에서 5.18과 세월호 두 사건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 사건들이다. 예수가 갈릴리로 돌아간 것과 같다. 우리는 다시 갈릴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기장총회가 류동운 열사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이전에 우리 동기회는 류동운 열사 장학사업을 하기도 했다. 한두해 진행했던 것 같다. 나의 꿈은, 류동운에게 명예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다. 류동운은 그렇게 목사가 되고 싶어했다. 명예졸업은 된 바 있다. 몸은 죽지만 정신은 죽지 않는다.   

1980년 5월의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특별히 류동운, 문용동, 김의기가 있다. 류동운은 당시 한신대학교 신학과 2학년생이었고, 문용동은 호남신대를 졸업하고 상무교회 전도사였다. 이 둘은 5월27일 새벽 광주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당했다. 김의기는 80년 5월30일, 서강대 재학 중 광주만행을 규탄하며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경찰진압에 맞서 싸우다 6층에서 떨어져 산화했다.

윤병희  ubiquit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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