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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속의 전광훈 그림자, 그것을 지우라‘다른’ 기독교, ‘다른 복음’을 말하고 보이고 살아내야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6.25 19:01

전광훈, 참으로 부끄러운 이름이 세상에 회자된다. 여성비하 발언으로 자기 신도를 가늠하는 척도를 말하더니 개신교 근본주의자 황교안 앞에서 자기 정치력을 과시했고 급기야 촛불 정권을 히틀러 치하의 파시즘이라 망발하며 대통령 하야투쟁을 선언한 전광훈. 그가 개신교 목사요, 한국 기독교 대표자 중 한사람이란 것에 세상과 교회가 절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어디 그뿐인가? 천박한 자신을 덥고자 살신성인한 독일 신학자 이름을 더럽혔고 진리를 위한 투쟁수단인 단식을 조롱했다. 하야 시까지 단식하겠다던 그가 당뇨를 이유로 한 끼 식사를 거른 후 단식을 종료한 것은 실로 슬픈 코메디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한 때 그 곁에 서있던 보수 개신교 세력들마저 한둘씩 그와 거리를 두고 있는 바, 그 모습이 결코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최근 CCC 단체도 그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빤스목사’를 자신들 지도자로 삼았던 한기총, 그에 몸담았던 이들의 오점은 그렇다고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를 빌미로 정치세력을 얻고자 했고 타자 부정을 통해 자기 세력을 키우고자 했던 이들 종교인은 왕 되고자 했던 폭력적인 가시나무를 지독히도 빼닮았다. 이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정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기독교 정당을 만들겠다는 이들의 발상이야말로 ‘이단’이라 정죄 받을 일이다. 개신교계 원로들이 이 점을 적시한 것은 늦었으나 다행한 일이다.

이제는 보다 못한 시민단체들까지 더 이상 정치에 가담치 말라며 전광훈을 비난하고 나섰다. 주지하듯 세월호 참사 이후 대형교회들의 몰지각한 언사로 인해 기독교는 개독교로 인식되었다. 그 비난으로 기독교 전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 진 탓이다.

▲ 전광훈 목사와 황교안 대표가 만나 서로의 협력을 다짐했다. ⓒ연합뉴스

그에 더해 실정법을 무시한 교회건축, 교회 대물림 그리고 교회 돈 횡령으로 인한 대형교회 성직자들의 구속 등으로 개신교는 지난 역사를 졸지에 허물었다. 실상 이 모든 일은 종교와 정치의 결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종교는 정치를 비호했고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면서 양자 사이에 이익관계가 성립된 결과였다.

수천, 수만의 신도를 지닌 교회에 표에 굶주린 정치인들이 몰려들었고 정치는 종교의 후경(侯景)을 이루면서 교회가 정치집단화 되어간 것이다. 문재인 정권 이후 남북대화가 무르익고 기성 정치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었으며 난민, 비정규직, 성소수자 등을 인권차원에서 배려하자 분단체제에 길들여진 보수종교 세력들, 자기 정체성에 두려움 느낀 이들이 앞장서 이런 새 정치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외세 의존적 사고방식, 사회주의 이념에 적대적인 타성 그리고 기득권 정치세력과 공생관계에 있던 개신교 성직자들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고 정치가들이 이 흐름에 편승,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 부대의 다수가 대형교회에서 동원된 개신교인들이며 가짜뉴스가 생산되고 유통, 확대되는 진원지가 몇몇 대형교회라는 사실도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정치, 종교계에서 터져 나오는 일체 막말과 거짓 정보 등은 모두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고 급기야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그렇기에 시민단체들은 종교이름으로 더 이상 나라 정치를 흔들지 말 것을 경고했고 이들 종교 세력을 실정법에 고발한 것이다.

바로 이런 실상이 3.1 운동 백주년을 맞은 나라꼴이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이제 막 지난 개신교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부패한 중세를 구했던 개신교, 자주, 평화 그리고 세계주의를 표방하며 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당시 기독교의 위상은 어디가고 상식에도 못 미쳐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그와 송사하는 천덕꾸러기로 변질되었는가?

천박한 욕망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괴물, 전광훈

전광훈 목사의 문제는 그 한 개인의 혐오적 막말과 지극히 가볍고 초라한 처신을 떠나 이런 기독교 현실에까지 잇대어 있다. 그는 결코 한 개인이 아니라 그를 비판하고 있는 개신교 내 전체 흐름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 아무리 소수로 전락했다하더라도 개신교 전통에서 전광훈과 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에 우선 놀라야만 한다. 그는 개신교 밖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 일상적인 우리 기독교가 만든 인물인 까닭이다.

어찌 기독교가 이렇듯 신앙적인 괴물을 만들어 냈고 우리들 다수 속에도 여전히 이런 개연성이 담겨있는 지를 묻고 답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아직도 많은 개신교회가 전광훈의 악행에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와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예수를 초라하게 만든 전광훈의 영적 방종, 이로부터 자유 할 사람이 개신교 내에 누가 있겠는가?

전광훈 목사는 대형교회를 꿈꿨던 개신교회의 결과물이자 그 자화상이다. 이미 구체화된 대형교회뿐 아니라 이를 지향했던 한국 교회 풍토에서 자란 인물이라 할 것이다. 힘(권력)을 지향한 교회는 거듭 힘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입으로는 정교(政敎)분리를 주장하면서 결국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만든 것은 힘 지향적인 대형교회 출현과 대단히 밀접하다.

이단으로 판명된 종교집단을 자기 조직으로 편입시킨 것도 오로지 자신들 세 확장을 위해서였다. 자신들 힘을 늘려 세상에 과시할 목적이었다. 더욱이 대형교회와 그를 이끈 추동성이 자본주의 욕망과 연루된 것이기에 문제가 더없이 심각하다. 여기에는 기업가였던 이명박 정권의 탄생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개인이 부자 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하늘의 축복과 등가(等價)로 만든 탓이다. 이로써 돈과 정치(힘) 그리고 종교성이 삼위일체가 되어 이 땅 대형교회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는 예외 없이 인간의 욕망, 천박한 자본주의적 탐욕과 함께 성장했다. 본래 욕망과 종교(영성)는 상호 반(反)비례 되어야 제격이다. 하지만 이들이 비례적 관계로 성장했으니 이 땅에서 종교 무용론이 말해져도 할 말이 없다.

한국에 와서 기업이 되어버린 대형교회, 그렇기에 작든 크든 교회에 경영논리가 요구되었고 자식 승계가 부끄럼 없이 자행되어 왔다. 이런 풍토에 걸 맞는 종교성, 신앙으로 포장된 개신교 종교성이 생겨났던바 이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전광훈이란 기형적 존재의 탄생도 이런 배경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욕망의 결과 대형교회, 반성서적이다

우선 대형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교회일 수 없다. 성서는 대형교회로의 의지를 가르치고 말한 적이 없다. 경건의 형식보다 경건의 능력을 키우라 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대형교회를 이룬 교회의 종교성 혹은 신앙양식 또한 성서적일 수 없겠다.

하지만 전광훈을 낳았던 우리들 교회는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 없다’고 수 십 년간 말해왔다. 성서의 ‘믿음’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자기 최면처럼 여긴 것이다. 일주일 동안 수차례의 예배에서 성직자들은 청중들을 향해 ‘믿습니까’를 연발했다. 머리가 거절한 것을 가슴이 예배할 수 없건만 ‘믿습니까’를 강요함으로써 지성을 희생시켜 왔다. 머리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믿음의 이름으로 강요한 것이다. 이를 일컬어 ‘믿음의 폭력화’라 할 것이다.

이런 풍토가 ’빤스목사‘를 출현토록 한 배경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막말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것을 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는 망발도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 평당 37만원짜리 땅이 기도하면 370만원 가치로 바뀐다며 ’믿습니까‘를 연발했던 M교회 담임자의 설교를 접한 적도 있다. 결국 대형교회, 곧 힘(권력) 지향적인 종교성의 표현이 바로 ’믿습니까 아멘‘의 논리 속에 담겨져 있다. 이런 종교적 풍토에서 전광훈 같은 과물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사랑의교회 신축 건물. 하지만 각종 불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과물성은 기성 교회들 속에 감춰져 있을 뿐 해소되지 못했다. 그래서 성직자들 다수가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 전광훈, 그가 바로 우리들 내면의 자기모습인 탓이다. 많은 이들의 경우 오히려 전광훈이 지닌 파워를 동경하기도 한다. 이점에서 ’개신교의 ‘오직 믿음’이란 말이 중세의 ‘면죄부’보다 더 오/남용되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오직’ 믿음, 즉 ‘믿습니까 아멘’의 논리와 더불어 힘 지향적인 성직자들은 대개 ‘죄’를 말한다. 인간의 원죄를 가르치며 지옥/천당이야기로 사후생(死後生)을 가르쳐왔다. 인간이 죄인이란 것과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달리 생각될 부분이다. 죄를 앞세워 사후생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교회는 ‘믿습니까 아멘’의 논리를 유지 존속시킬 수 있었다.

잘못된 구원관이 몰고온 교회의 몰락

성서는 본래 원(原)축복(Original Blessing)의 종교로서 원죄를 앞세우지 않았다. 원축복이 사라진 세계를 죄의 현실이라 말할 뿐이다. 하지만 힘을 추구했던 한국교회는 인간의 ‘죄성’을 지독히도 강조했다. 여기에는 ‘영혼구원’이란 이분법적 세계관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은 살고 몸은 죽는다는 희랍적, 영지주의적 이원론이 한국 교회를 지배했던 것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죽음 이후 삶을 하느님의 기억으로 풀었다. 즉 영육, 그 어느 것도 소멸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하느님을 말한 것이다. 물론 잘못된 것도 기억하시는 분이시라 했다. 하지만 종국에 우리 몸과 영혼을 온전히 회복시켜 새(新)창조를 한다고 증언했다. 인습화된 교회적 사생관보다 몰트만의 해석에 귀 기울이고 싶다. 영원구원은 예수의 삶은 없고 그의 죽음만 가르쳐 온 결과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세상에서 자기 욕망 껏 살다가 ‘믿습니까 아멘’의 논리에 편승하여 영적 구원을 받으면 그만일까? 대형화된 한국교회에게 죄는 자본주의체제에서의 빛처럼 없어서는 아니될 요소가 되었다. 세상에서 지은 죄 소멸을 위해 헌금이 믿음의 대체물이 된 까닭이다. 영적 구원을 말하면서 죄 용서를 위해 헌금을 요구하는 이율배반적 종교성이 참으로 놀랍다. 이는 모두 이원론적 구원관에서 파생된 신학적 문제점이겠다.

모든 것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런 식의 신앙적 천박함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대기업이 생겨났듯이 이런 종교성을 근거로 교회들 역시 대형화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믿습니까 아멘’의 논리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동전 양면처럼 함께 작동해왔다. 전광훈 목사의 막말은 이런 종교적 장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막말은 몰락의 전조

성(聖)의 공간에서 숫자와 돈 그리고 교리를 갖고서 철옹성을 쌓은 목사들 중 속(俗)의 공간에서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정치하는 이들이 자신들 교회의 성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말했듯이 표에 연연하는 이들을 좌지우지 할 권력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자신들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 판단했다. 그럴수록 이들은 반공과 반(反)이슬람주의 그리고 반(反)동성애를 말하며 이에 반하는 생각을 죄로 규정했으며 악마 화했다. 타자부정의 방식으로 자기 세를 결집했고 그 힘으로 정부를 역공하고 있는 것이다. 못된 정치가들이 이에 편승하는바, 보수정치세력과 결탁하며 기독교 정당을 통해 속(俗)의 권력까지 획득하려고 야단법석이다.

이 와중에서 그의 막말은 자신을 들어내는 일종의 전략이리라. 이들은 결코 사과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자신들 방식으로 정치권력 화하여 의회진출을 도모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들 사고 속에 뿌리내린 기독교 절대주의가 다원화된 사회를 해치는 까닭이다.

이 땅을 기독교 국가로 바꾸는 것을 신의 명령이라 여기는 탓에 이들은 대한민국의 헌법조차 무화시켰다. 아픈 곳이 몸의 중심 되듯 세상 아픈 곳을 치유하려는 예수(복음)의 정치학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를 잊고 절대성, 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가르쳐 이를 세속 공간에서 실현시키려는 한 전광훈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봐도 좋겠다.

우리 안에 전광훈, 어떻게 지울 것인가

그래서 전광훈의 그림자를 지우는 일이 우리들 속에서 화급한 일이 되었다. ‘다른’ 기독교가 있음을 삶으로 글로 증명하는 일이 우리들 과제가 된 것이다.

타자부정이 아니라 자기 부정을 우선하는 기독교, 약자를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는 기독교, 자본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가난과 창조영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독교, 전능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가르치는 기독교, 자기 절대성을 공존의 능력으로 치환하는 기독교, 온갖 타자들을 자기 초월의 차원에서 수용하는 기독교, 문자가 아니라 뜻을 찾는 기독교, 방주와 같이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아픈 세상을 찾는 조각배 같은 기독교, 외세 의존치 않는 주체적인 한국적 기독교, 가슴뿐 아니라 머리에 호소하는 기독교, 복음의 빛에서 교회조차 상대화시킬 수 있는 기독교, 믿음만이 아니라 삶의 수행을 강조하는 기독교, 이런 모습이 본디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인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이렇듯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그곳서 선포되는 말씀이 이런 내용을 담을 때 전광훈은 더 이상 기독교계에 발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들 눈앞에서 막말하며 예수를 조롱하는 괴물로 변한 전광훈 목사가 결코 두렵지 않다. 이/저곳서 그를 나무라고 틀렸다 지적해도 전광훈의 막말은 앞으로도 그쳐지지 않을 것이다. 목하 교회에는 이/저도 결단할 수 없는 다수와 신도와 전광훈 식(式)의 확신범들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선량한 신도들을 그런 교회로부터 자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마저 괴물로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두렵고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을 눈떠 보게 할 책무가 우리들 몫이 되었다. 전광훈 류(流)의 기독교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켜야 옳다.

그러려면 앞서 말한 ‘다른’ 기독교, ‘다른 복음’을 말하고 보이고 살아내야한다. 이것 없이 전광훈의 입을 닫을 수 없으며 그에게 감금된 기독교를 구할 수 없다. 전광훈 목사를 비난하되 자신속의 전광훈을 찾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거짓과 압박, 잘못된 수단을 갖고서 스스로 최고가 되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한 그가 목사든, 총장이든, 정치인이고 교수이든지 그 속에 이 시데의 가시나무, 전광훈이 살아있기에 말이다.

백사천난(白死千難) 한 일이겠으나 이제부터라도 ‘다른’ 기독교, ‘다른 복음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 그것은 대단히 급진적인 일이겠다. 하지만 ‘급진적’인 것이 ‘근본적’인 것과 의미 상통하기에 이 생각을 그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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