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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긴다” - 弱之勝强, 柔之勝剛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78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7.02 04:00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니, 단단하고 강한 것을 쳐서 능히 이기는 데는 물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물을 거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김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기꺼이 행하는 사람도 없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의 수치(멸망)를 받아들이는 이를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재앙을 받아들이는 이를 일컬어 천하의 왕이라 한다. 바른 말은 반대로 하는 것 같다.”
- 노자, 『도덕경』, 78장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爲(謂)天下王, 正言若反

노자는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긴다고 강조한다. 그 예로써 물을 든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이 물을 막거나 가두어 두는 것도 일시적일뿐이고 결국에는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알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행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노자는 이러한 국가와 정치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나라의 멸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재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천하의 왕이라고 한다. 역사 이래 왕이 나라와 사직을 지키려 하면 전쟁은 불가피하고 그 모든 피해는 인민들의 몫이 된다. 따라서 나라의 멸망을 보고 나라를 지키지 않는 것이 사직의 주인이 되는 길이며, 천하의 왕이 되는 길이다.

▲ 부드러움이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Getty Image

노자는 바른 말은 이처럼 거꾸로 들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자의 말을 받들어 <장자 잡편 양왕편>에는 대왕 단보의 이야기가 있다.

대왕 단보가 빈땅에 살 때, 적인이 그를 공격했다.
이에 대왕 단보는 가족과 비단으로 섬겼으나 받지 않고,
개와 말로 섬겼으나 받지 않았다.
또 구슬과 옥으로 섬겨도 받지 않았으니,
적인이 요구하는 것은 땅이었다.
대왕 단보가 말했다.
“나는 남의 형과 같이 살면서 그 아우를 죽이고,
남의 아비와 살면서 그 자식을 죽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다.
그대들은 함께 일하면서 살아라.
내 신하가 내 백성이 되는 것이나 적인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또 내가 들으니 백성을 기르는 것(땅) 때문에
길러야 할 것(백성)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콘 껍질 지팡이를 짚고 떠나니 백성들이 줄지어 그를 따랐다.
마침내 기산 아래에서 나라를 세웠다.
대저 대왕 단보는 진정 백성들의 생명을 존중히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능히 남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는 아무리 부귀한 자리에 있더라도
부귀로써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리 빈천하더라도 이익을 위해서 몸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세상의 사람으로서 높은 벼슬이나 존귀한 지위에 있는 자는
모두 그것을 잃을까 마음이 무겁다.
이익을 보면, 그 몸을 가볍게 하고 망치고 있으니
어찌 미혹이 아니겠는가?”
- 장자, 잡편 양왕편

우리 사회에서 어떤 영역에서 최고의 자리를 왕이라고 한다. 나라의 최고의 지도자를 왕이라 한다. 그런데 전혀 어떠한 권력이 없었고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던 예수님을 왕이라고 한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말하자 헤롯은 그 지역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인 일도 있었다.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산헤드린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재판을 넘기면서 기소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 죄목이 “유대의 왕 나사렛 예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옷까지도 빼앗긴 예수님은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었다. 오직 그의 목숨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생명뿐이었다. 삶의 마지막에 자기의 목숨을 억지로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거슬러,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았다.

자기와 함께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이 펼쳐진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희생하였다. 이렇게 죽임 당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이 어떻게 죽이는 세력을 이길 수 있었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유다인의 왕”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누명에 불과합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은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죄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로 고백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INRI를 예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속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렇게 누명을 써서 고통과 죽임을 당한 생명의 권리를 회복하고,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와 실천 속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부르는 것은 또다시 예수님을 음해하는 것이며, 새로운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왕 중의 왕”으로 부르면서 스스로 그 왕의 반열에 끼어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에서 이러한 일을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가장 열심히 따른다고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높여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행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단지 권력의 획득이나 경제적 부를 얻는 부적으로 전락시키는 것, 예수님의 가르침을 편안한 삶이나 대학진학을 위한 주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예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누명을 씌우거나 매도하는 것 또한 권력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의 상징인 예수님을 또다시 죽이는 행위입니다. 힘 있는 자들의 싸움과 음모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군대에서, 비행기 안에서, 감옥에서 절규하다 죽어간 사람들, 지금도 그러한 누명 때문에 명예와 생존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진상이 밝혀지고, 죽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더 이상 무고한 생명의 위협이나 억울한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유대인의 왕(?) 예수”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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