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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지고 계속해서 전할 것인가사랑받는 자녀들이 신앙으로 충만한 성인들이 된다 (3)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7.04 19:20

매일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기적은 충성의 응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는 상상력이 풍부한 반복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이런 세대간의 의사소통에 중심적인 구절은 신명기 6:4-9일 것이다.(1) 모세의 명령의 가시적인 부분은 손에 있는 “기호”(sign), 이마에 있는 “표”(emblem), 그리고 문설주 위의 “기록”(writing)과 같은 것이다. 기호와 표와 기록은 오히려 원시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신명기, 즉 위급한 경우에 고안된 신학적 교육은 뚜렷한 기호화(signing)가 기이성을 가능하도록 유지하게 하는 방법임을 아주 잘 이해했다. 기호는 매일 매일 깨닫게 되는 내부인들을 목표로 삼는다. 기호는 외부인들의 면전에서 보이는 용기 있는 행동(an act of nerve)이 아니다. 가족은 그것의 가시적인 기이성에 당황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시적인 기호는 실제적인 큰 소리로 말하는 암송을 위한 신명기의 수사학에 종속한다. “암송하다”(shinnen: recite)는 동사는 반복하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다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8-9절에서 “기호로 삼는다”는 것은 4-5절에서 울려나온다. 되풀이하여 말해야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 확인의 말씀이다. 암송은 집중 증언(saturation witness), 즉 모든 대화의 진정한 주제이다. 집에 있을 때나, 길에 있을 때나, 누워있거나, 일어서 있거나, 다시 말해서 모든 시간을 일괄하는 아침과 저녁에, 언제, 어디에서든,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대화이다. 동일한 종류의 동사들이 사사기 5:10-11에서 사용된다.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사사기 5:10-11은 마을의 우물가나 물긷는 장소에서의 일상적인 잡담을 그리고 있다. “잡담”(gossip)의 주제는 우리가 위에서 고찰했던 모든 대답들과 동일한 것이다. 그 주어는 이 힘없는 농부들을 위해서조차도 삶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야훼의 변혁적인 기적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야훼 하나님

기호화되고 소리로 전해지는 신명기 6:4-9의 이 집중 증언은 그것의 주어로서 야훼, 너희의 하나님 야훼, 다만 야훼만(Yahweh alone), 오직 야훼만을(Yahweh only), 한 분 야훼(one Yahweh)를 갖는다. 되풀이하여 말하는 이 증언 속에서 중심 주제는 이 가족의 범위의 중심에 해방자와 명령자로서 알려진 한 분을 위치시키기 위해 “우리”와 우리가 얻고 사용하는 것 모두, 그리고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희망들로부터 옮겨진다. 신명기 6:4-11에서 지배적인 명령은 구원하는 이야기의 핵심 배우인 이 야훼가 사랑하고, 신뢰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고, 갈망하며, 의지해야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와 그 백성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를 통해 교육시키며 신앙을 이어갔다. ⓒGetty Image

집중교육(saturation)은 누군가의 삶 전체가 다른 분에게가 아닌 이 한 분에 대한 신뢰와 충성으로 헌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도한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의 기이성, 즉 공동체의 대안적 양육의 초점은 공동체의 도덕성이나 행동이나 “가치”가 아니라, 충성이 향해져야 하는 이 한 분, 즉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기적의 행위자이다. 야훼에 대한 이런 초점은 기적 행위자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삼가는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삶을 일련의 규칙들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전투적인 보수주의에 반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기적 행위자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랑(충성)을 암송자의 몸을 통해 그 자체의 방법으로 행하게 한다.

우리는 7절의 “암송하다”(되풀이하여 말하다)는 단어에서 잠시 멈추어야 할지 모른다. 언뜻 보기에는 4-5절에 나타난 규정된 공식은 뒤풀이하여 나오는 주문(呪文)과 같이 들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신명기서 전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되풀이하여 말한다”는 동사가 엄청난 상상력의 해석적인 자유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대화 중에 있는 전도자는 숙련되고 섬세한 해석자가 되어야만 한다. 신명기서는 반복적인 공식에 맡겨지거나 그것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암송한다”는 것은 야훼와 야훼의 사랑이 믿는 자녀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생기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성인 공동체는 기적 행위자인 야훼의 사랑이 모든 단계와 모든 상황 속에서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 신조적인 공식(creedal formula)은, 야훼의 주권과 야훼에 대한 헌신이, 적대적인 모든 주장에 반대하여, 정의적이 아니라고 하는 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우리의 해석상의 전통을 위한 근원점일 뿐이다. 자녀는, 이 가족 내에서 이미 알려진 인물인, 야훼의 면전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고 재구성할 것을 허락 받는다.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열정 속에 다음 세대를 포함시키고 싶어하는 이 공동체는 안전하게 젊은이에게 위탁할만한 신앙의 능력을 얻는 것에 관해 많이 걱정한다. 이 문제에 관한 걱정은 부유한 가족이 자신의 재산에 관해 걱정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 그것은 재산을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유산을 책임 있게 물려받아 유지할 신뢰할만한 자녀들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가 신명기에서 (그리고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 속의 관련된 본문들에서) 이제까지 인용해온 교훈적 전통은 이러한 근심에 관해 명백하며 직접적인 듯이 보인다. 그것의 어조는 절박하며, 나는 그것이 젊은이에게 강압적인 것으로서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집중 교육을 행하는 것은 세대간의 계속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지 모르며, 마지막에는 비생산적이며 자멸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런 교훈적 전통에 대한 양자택일의 방법과 조정하는 방법으로서, 나는 이제 아주 다른 일련의 본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들은 성인 공동체의 통제와 관리를 넘어서는 이런 전달매체에 관해 감추어지고, 수수께끼 같으며, 신비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야기의 주제, 야훼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끄셨는가

모세-여호수아의 본문들과는 대조적으로, 창세기서 안의 조상의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창 12-50장). 축복은 생명력, 즉 이 공동체에 약속되고 주입된 삶을 위한 능력이다. 창세기 12-50장의 설화들의 증언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 가족이 저주로 짐진 세상 속에 하나님의 축복의 독특한 전달자(carrier)라는 것이다.(2)

이것은 이 가족이 심지어는 엄청난 곤란에 맞서서도 살아남는 삶을 위한 능력을 위탁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축복의 이 주장을 좀더 익숙한 범주들로 번역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 가족 안에 역사의 패배나 죽음의 결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삶의 회복력과 확언이 주어진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와 동일한 회복력과 확언은 믿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엄청난 곤란에 맞서서 효과적으로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는 해방되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삶의 전달자로서 자아에 대한 건강한 용인을 포함한다. 창세기서는 “능력(the force)이 너희와 함께 한다”는 확언을 창세기의 중심사상(leitmotif)으로서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삶의 이런 “능력”이다.

신명기와는 다르게 창세기가 이 주제에 관해 교훈적이 아니며, 그런 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 명백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주목하라. 창세기의 설화는 (신명기가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야훼의 능력, 즉 축복을 따라 가기를 원하는 것만큼, 가르침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상의 이야기들 속에서, 근본적인 초점이 여러 세대들 사이의 구분점 위에 되풀이하여 놓여진다. 이야기들은 축복을 받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축복을 다음 세대에 안전하게 놓이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아버지와 어머니 각자는 이 직무에 열중하게 되며, 자녀 각자는 이 특별한 길에 속하려는 열망 속에서 기다린다.

각각의 창세기 자료집 속에서 그 주제는 동일하다. 축복이 통제하고 할당하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축복이 가족 안에서 그리고 가족을 통하여 그 자체의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아들들과 딸들이 배워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은 이야기되고 다시 이야기된다.

아브라함-사라의 이야기는 아들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져 있다(창 12:1-25:18). 사라는 임신을 못하며 아브라함은 늙었다. 하갈이라는 존재는 한 아들을 생산하지만, 그 아들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다.(3) 약속된 상속인 이삭, 즉 축복을 옮겨야 하는 자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명령에 의해 오직 뒤늦게 주어진다. 더욱이 오직 뒤늦게 주어지는 이 아들은(21:1-7) 신앙의 시험으로서 즉시 “요구된다”(22:1-14). 주어졌을 때조차도 그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삭이 약속을 받는 것은(26:25) 이야기의 마지막 이전까지는 아니다-어머니 사라가 죽은 후(23:1-20, 그의 아내 리브가가 거처를 정한 후(24:1-67),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25:1-10)이다. 그는 한 아이로서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그 자신의 자녀들이 태어난 이후에(25:21-26), 그리고 그 자신이 기근의 위험에 처한 이후에(26:1) 약속을 받았을 뿐이다.

야훼께서 마침내 이삭에게 나타나 이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서다(26:2-5). 이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어졌던 그 약속을 받는다. 이제 이삭은 맹세의 초점이 되며, 그 자신의 자녀들과 상속자들을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약속된 그 축복은 정확히 아버지 아브라함이 순종했기 때문에 주어진다. 그 “능력”은 이제 이삭에게서 다음 세대로 물결쳐 흐른다.

27장에서 축복은 또 다시 위기에 처한다. 이제 이삭은 늙어서 축복이 자기 아들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이 때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그러나 25:21을 참조하라), 다툼, 즉 아들들의 출생 이전에 운명지어진 다툼이다(25:33).

그 다툼은 가족의 제일 중심에서, 각각의 부모, 즉 야곱이나 에서를 특별한 아들로 선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일어난다. 27장의 감동적인 설화에서 두 가지 문제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한편으로 축복은 사기(도둑질)에 의해 확보된다(27:18-29). 다른 한편으로, 축복의 수여가, 깊은 비애에 빠진 아버지를 남겨둔 채, 다시 되돌릴 수 없다(27:35-38).

그 이야기가 실제의 삶과 관련하여 읽혀질 때, 우리가 그들을 아는 것같이, 그것이 실제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가족들은 그것과 비슷하며, 자녀들도 그것과 유사하다. “미래의 파도”는 그것이 의도적으로 지정되어야만 하는 곳이나 혹은 지정되는 곳에서 언제나 가라앉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미래를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서 주장하는 아들들과 딸들이 있다. 그 결과는 때때로 어느 부모든지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가족을 위한 길이 된다. 야곱의 몰래한 행동, 리브가의 잔꾀, 그리고 이삭의 비애는 모두 결국은 꼴사납지만 강력하게 축복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이야기이다.

밝혀진 대로, 야곱은 약속의 강력한 전달자, 즉 약속을 충분한 가능성과 장점에 따라 이행시킬 준비가 된 자가 된다. 실제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것을 포함하여, 경이로운 약속을 받는다(28:15; 26:3 참조). 약속을 수동적으로 받는 그의 아버지 이삭과는 달리, 야곱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는 복종의 조건을 하나님에게 거꾸로 이야기한다(28:20-22).

축복의 세 번째 세대에서, 사라와 리브가에게 있었던 것과 같이, 문제는 불임이다(29:31). 불임과 축복의 긴 이야기는 어떤 순간에도 약속의 전달에는 쉬운 것이 없음을 단언하기 위해 이야기되어 진다. 다음 세대에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매번 문제가 생긴다. 그런 전달의 문제는 창세기 자료를 지배한다.

이 경우에, 축복의 위기는 요셉의 꿈에 의해 확대된다(37:5-11). 꿈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 꿈은 가족을 붕괴시키기 위해 찾아오는 불청객이 된다. 나이 어린 동생 요셉은 사랑 받는 아들이다(37:3). 그의 꿈은 자신의 특수한 신분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또 다시 그 가족은, 그의 형제들 즉 합법적인 상속자들이 이 버릇없는 사랑 받는 아이의 위협을 즉각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된다.

축복에 관계되는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기이하다. 첫째로, 요셉은 이삭과 야곱이 자신보다 먼저 그랬던 것처럼 어느 곳에서도 공식적으로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는 축복된 미래를 꿈꾸었고 그 다음에 그것을 인식했지만(45:1-8), 그것이 전부이다. 그는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 축복을 발견했다.

둘째로, 아버지 야곱이 늙어서 축복이 위태롭게 될 때,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축복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적인 조처를 취한다(48:1-20). 놀랍게도, 이 순간에, 축복은 요셉을 무시한 채 세대를 건너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런 배열에 관해 아주 분명하다(48:5-6). 게다가 27장에서와 같이, 축복은 48장에서 그릇되게 지정된다. 이 때 그것은 사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설명되지 않은 실수로서 이루어진다(14절). 야곱에게서처럼 지금도 더 어린 아들 에브라임은 으뜸가는 축복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실수는 취소될 수 없으며, 에브라임은 다음 세대로의 축복의 전달자이다.

이런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즉 부모들과 자녀들을 늘 따라 다닌다. 분명히 그것들은 출애굽기-여호수아서에서 낭송되는 것들 속에 있는 이야기들과는 아주 다른 장르에 속한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공통적 기억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분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것들 속에서 이야기가 그것에 관계된 자들 중 어느 누구의 의도나 통제를 넘어서는 헤아릴 수 없는 측면을 담고있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어떻게 이야기해 줄 것인가

모든 세대에서 축복의 전달은 문제가 많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신비를 지닌다. 다음 세대로의 전달의 과정은 인간의 의도성을 통해 충분히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삭은 자신의 축복에 늦게 나타난다. 게다가 이삭은 야곱이 첫 번째가 되도록 운명지어진 자궁의 신탁에 따라 축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야곱 자신은, 늙었을 때에, 자신의 손을 불가사이 하게 교차시킨다!(창 48:14)

나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 자신의 세대간의 사역을 위해 중요한 모형들임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축복의 임재가 우리의 통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임을 우리에게 단언한다. 아무도 신앙의 형태를 다음 세대에게 명령할 수 없다. 부모들은 실제로 다음 세대 속에서의 신앙의 결과가 종종 우리들의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거나 혹은 심지어는 우리들의 최선의 추측에 따른 것이 아님을 거듭해서 배운다. 이해될 수 없는 여러 세대 사이에는 이미 보내진 신비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축복이 기이한 방법으로 수여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이, 비록 가족 이야기를 말하는 자가  있음직 하지 않거나 부적합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인물들에 의해 전달될지라도, 싫든 좋든 다음 세대 속에서 잔존했다는 것을 축하해야할지 모른다.

미주

(미주 1) 이 결정적인 본문에 대해서는, Patrick D. Miller [Deuteronomy (Interpreta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0), 97-106)의 토론과, J. G. Janzen, S. Dean McBride, Patrick D. Miller [“The Most Important Word: The Yoke of the Kingdom,” Iliff Review 41 (1984), 17-30]의 연구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보라.
(미주 2)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축복의 능력에 대해서는, Hans Walter Wolff, “The Kerygma of Yahwist,” Interpretation 20 (1966), 131-58과 재 출판된 Walter Brueggemann & Hans Walter Wolff, The Vitality of Old Testament Traditions, (Atlanta: John Knox Press, 1990), 41-66; 그리고 Claus Westermann, “The Way of the Promise through the Old Testament,” The Old Testament and Christian Faith, ed. by Bernhard W. Anderson (New York: Harper and Row, 1963), 200-224를 보라.
(미주 3) 하갈의 설화는 조상들 가운데서 축복을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며 전형적인 경우이다. 하갈 설화의 내부적 본문성에 대해서는 Phyllis Trible, Texts of Terror: Literary-Feminist Readings of Biblical Narratives (Overtur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9-35를 보라. 그리고 성서 기사의 역사적이고 설화적인 전례에 관해서는, Jo Ann Hackett, “Rehabilitating Hagar: Fragments of an Epic Pattern,” Gender Difference in Ancient Israel, ed. by Peggy L. Da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12-27을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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