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성서
“원칙과 자유의 균형”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7.11 17:4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 2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그들을 고쳐 주셨다. 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5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6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여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9:1~9/새번역)

유대 지방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해주시던 주님께 묻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2절과 3절이 한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치유 중인 상황에 뜬금없는 물음입니다. 본문에도 밝히지만, 시험하려는 덫이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당시 힐렐학파는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샴마이학파는 음행한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셔도 반대자그룹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치유가 급한 상황 앞에서 자행되는 편 나누기라면, 그 문제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슬픕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다투고 싸우는 동안 고통은 연장되고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적지 않은 선택이 ‘옳을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 사이의 갈림길은 아닐지. 하나님의 의를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의를 하나님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사랑을 등진다면, 그만한 위선도 드뭅니다.

▲ Willy Verginer, “초현실주의 나무조각”

주님의 대답은 샴마이학파에 가까워 보입니다. 음행한 경우를 예외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은 당연히 가능하고 조건만 음행으로 제한한 관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짝지어 주신 결혼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뜻이 아니지만, 음행처럼 정말 힘든 문제는 예외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대답과 결론뿐 아니라 접근방식도 주목하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에 묶이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에 갇히지 않으시듯, 이혼증서를 써주면 가능하다는 규정에도 갇히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에 담긴 뜻에 무게를 두시듯, 결혼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중심을 두십니다. 하나님 뜻을 붙잡기 때문에, 때론 자유로워지기도 하고, 때론 더 엄격해지기도 합니다. 문자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따르게 하십니다. 교회도 이미 그렇게 해오지 않았습니까. 부모를 욕했다고 돌로 치지 않고, 여자라고 교회에서 침묵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음행과 같은 예외사항에 담긴 주님 마음과 통해야 합니다. 음행이 배우자로서 견디기 힘든 예외사항이라면, 다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계속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이 쉬 고쳐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하나님 뜻을 이유로 결혼을 유지하라고 한다면, 주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몸으로 묶어주신 사랑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절박한 상황이 어찌 정죄의 대상이겠습니까. 함께 눈물 흘려 아파할 상황입니다. 그래서인지 바울도 주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면서 이혼의 예외사항을 추가합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원하는 이혼은 허락하죠(고전7:15).

그렇다면 주님께 이렇게 여쭤보면 어떨까요? “주님, 당시는 가부장제 남성중심 사회입니다. 이혼할 자격은 남자에게만 있었죠. 주님 가르침에도 아내의 음행만 거론하십니다. 남편의 음행, 폭력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까? 아내가 이혼을 원할 수는 없습니까?” 주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대답은 주님과 각자의 대화에 맡기려 합니다.

다만 가나안 여인과 주님의 대화를 기억했으면 합니다(마15). 가나안 여인의 믿음 앞에 주님께서는 거절을 돌이키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던 말씀을 돌이키십니다.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절박해서 그런 것일 뿐일까요? 주님 말씀과 다르다고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보면 무리일까요. 주님 품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자유롭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