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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탐욕은 우상숭배(호 11:1-9; 골 3:1-11; 눅 12:13-21)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8.05 18:53

< 1 >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였던 랍비들이 담당했던 역할의 하나가 법적 문제의 해결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형 사이의 유산다툼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고 반문하심으로써, 유산에 관한 가족 분쟁에서 재판장이나 중재자 역할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일에 개입하지 않으신 이유는 랍비로서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산 분쟁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욕심’(慾心)이 결국은 가족 관계마저 상처내고 망가지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유산의 크기와 상관없이 재산 분할 때문에 가족이 깨어지고 심지어는 형제자매들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어떤 사람의 유산 분배에 관한 질문을 계기로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탐욕을 경계하도록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가 되자,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 쌓아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눅 12,18-19)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고 물으심으로써, 부자의 어리석음을 일깨우셨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아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입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는 까닭, 죽으면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산도 죽으면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쌓을 곳간이 없어서 있는 곳간 헐고 다시 더 큰 곳간을 짓고 가진 모든 물건들을 쌓아두었던 그 부자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죽으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탐욕은 그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이지요.

▲ 한국 전통에 망자는 입는 수의에는 주머기가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것이 ‘탐욕’(貪慾)의 본질입니다. 탐욕은 끝을 모릅니다. 충분을 모르는 것이지요. 자기 분이 충족되어도 그칠 줄 모르는 것이 탐욕입니다. 있는 곳간 좁으면 곡식을 내다 팔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터인데, 이 부자는 더 큰 곳간을 짓습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아마 또 더 큰 곳간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했다면 여러 해 동안 쓸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모았을 것입니다. 욕심이 개인의 문제라면, 탐욕은 구조의 문제입니다. 서민이 자기 집 한 채 장만하고, 번듯한 직장 가지려는 욕심을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탐욕은 끝이 없고, 필요를 충족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기증식을 하는 자본운동의 엔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멀리 하여라’라는 말은 ‘너 자신을 살피고, ~(탐욕)으로부터 지키라’는 뜻입니다. 탐욕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조심하여 멀리하지 않으면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거대한 블랙홀처럼 탐욕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가톨릭교회에서는 탐욕을 교만, 질투, 분노, 색욕, 식탐, 나태와 함께 ‘칠죄종’의 하나로 봅니다. 불교도 탐욕을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곧 ‘삼독’(三毒)의 하나라고 하지요.

그런데 누가는 탐욕에 대한 경계에 이어,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덧붙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눅 12,21)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잘 쓰면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에는 인색한 것에 빗대어 곧잘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으로 먹고 사시는 분이 아니지요. 게다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바치는 헌금으로 – 그 헌금이 크건 작건 –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을 ‘헌금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의 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의 사용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되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에 대하여 부요하게 되는 길’이 ‘모으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되는 길’은 ‘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가지도 못한다.’(마 6,19-20)는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뜻이지요.

하늘에 무슨 금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늘에 쌓아둘 보물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황금이겠습니까, 달러나 유로화겠습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이 땅 위에서 좋은 세상 만드는 일에 자신의 부를 나누는 것이지요.

< 2 >

그러나 탐욕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탐욕은 독점적입니다. 자기만을 섬기기를 요청하는 우상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상은 숭배하는 이에게 눈에 보이는 풍요를 보상으로 제공하지요.

예언자 호세아는 주전 750년부터 725년까지, 약 25년에 걸친 시기에 자기 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이 형제국인 남 왕국 유다와 아시리아에 의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을 이스라엘의 바알 우상숭배에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의 세계에 온통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비옥함과 관련된 바알 종교의 형식들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인 신앙까지 받아들여 야훼 종교와 혼합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과 자유의 하나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야훼 하나님도 바알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부의 보증자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풍요가 신(神)의 생식활동을 본받은 풍요제의에 의해 주어진다는 감각적 믿음을 예언자 호세아는 ‘우상숭배’이자, ‘간음’이라고 성격화한 것입니다.

바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부를 그들이 일해서 번 보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는 그들의 권리이고, 당연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화라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예언자 호세아는 부를 야훼 하나님의 소유로 보고,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선물로 간주합니다.(호 2,18-23)

그러나 신(神)을 다산, 곧 물질적 풍요에서만 찾는 종교적 전통이 어찌 가나안의 바알 신앙에만 있었겠습니까? 개인적 재화만이 아니라, 인류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자연재화까지 자기 개인의 소유와 권리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무책임하게 소비하는 우리 시대의 태도도 일종의 바알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알 신앙’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하고, 다산과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은 자유와 해방의 신,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를 거부하시는 거룩한 영, 야훼입니다.

< 3 >

사도 바울도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했습니다(골 3,5). 탐욕은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거짓말’을 낳습니다(골 3,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은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골 3,5). 그리하여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데,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른’ 그리스도인입니다.(골 3,10)

그렇다면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참 지식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참 지식’, 그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눅 12,15)는 너무 오래되고, 너무나 평범한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람들에게 재화를 나누어 가난해질 때, 하나님께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깨달음이지요.

구조적 차원에서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참 지식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 시대 ‘탐욕’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와 같은 탐욕은 무엇일까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풍요가 넘쳐나는 이 지구 행성에서, 2005년 기준으로,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간 유엔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는,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질서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기아만이 아닙니다. 소는 배불리 먹는데 사람은 굶는 현실, 사막화와 산림파괴도 다국적 금융자본과 그 과두제에 의한 부의 무한축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탐욕이 체제가 된 것이지요. 체제가 된 탐욕을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 법칙’,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 ‘정글 자본주의’ 등이 그것이지요.

1987년 올리버 스톤이 제작한 영화, ‘월 스트리트’가 있습니다. 기업 사냥꾼이자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불법주식거래로 떼돈을 버는 고든 게코(Gordon Gekko) 역을 맡은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이지요. 영화에서 게코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똑똑하고, 굶주려 있어야 해, 감정은 없고’라고 말합니다. 게코가 영화에서 남긴 유명한 연설은 오늘 우리 시대의 탐욕이 무엇인지 극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핵심은 탐욕은 좋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탐욕은 옳고, 작동합니다. 탐욕은 진보적인 정신의 본질을 명백하게 하고, 관통하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삶을 위한, 돈을 위한, 사랑을 위한, 지식을 위한 탐욕이 다양한 형태로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탐욕만이,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델타 제지회사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또 다른 부실기업을 구해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든 게코가 마침내 그가 찾는 동료,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굶주려 있는, 그러나 감정은 없는 폭스 버디(Fox Buddy)를 끌어들이면서 한 말도 유명합니다.

‘미국 최상위 1%가 미국 부의 절반인 5조 달러를 소유하고 있네. 그 중 3분의 1은 일을 해서 생기고 나머지 3분의 2는 상속이나 이자에 이자가 붙어 미망인이나 우둔한 자식들에게 축적되거나, 내가 하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생겨. 말도 안 되지. 미국 시민의 90%는 순자산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지. 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아. 난 소유해. 우리가 규칙을 만드는 거네. 뉴스, 전쟁, 평화, 기근, 내란, 종이클립 가격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그걸 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거야. 설마 우리가 민주주의 제도 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니겠지? 이건 자유 시장이네. 그리고 자네는 그 일부분이야. 자네는 그 킬러본능이 있어. 기다려보게. 아직 가르쳐 줄 게 많이 남았으니.’

탐욕이 체제가 된 이 세계에 존재하는 192개 국가 중에 122개국이 남반구에 있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외채를 모두 합하면 2조 1천억 달러가 넘습니다. 부채와 기아는 세계를 지배하는 제후들(전 세계 총 생산량의 52퍼센트 이상을 장악한 500대 다국적 기업들)의 강력한 대량살상무기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체제가 된 탐욕이야말로 소수의 풍요를 위하여 다수의 사람을 희생 제물로 삼는 우리 시대의 우상 숭배라고 생각합니다. 옛 이스라엘의 풍요와 다산의 우상들은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받았으나, 우리 시대의 우상들은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받았던 몰록과 같지요.

그런데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된 거대한 체제와 싸우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 깨기, 마침내 그리고 언제나 지는 게임처럼 보여 많은 변화를 꿈꾸는 이들을 절망시킵니다. 과연 체제가 된 탐욕의 사슬로부터, 이른바 지구적 정글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미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과의 ‘무역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무역 분쟁이니 갈등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아예 무역 ‘전쟁’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작금의 무역전쟁은 협상을 가장한 강대국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횡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무역 전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갈등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각 나라 집권세력들의 치밀하게 계산된 이해관계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시민사회입니다.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일본의 양심적 시민사회와 교회,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탈냉전 시대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희망을 찾는 한국의 양심적 시민사회와 교회가 만나야 합니다.

세계의 구조적 빈곤을 분석한 장 지글러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변화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의식 변화’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타인이며, 동시에 타인은 나다. 타인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행동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이런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우상에게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으며, 투쟁을 조직하는 사람이 우리 시대의 예언자이고,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참 지식에 이른 새 사람’이 곧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입니다.(골 3,10)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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