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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근본 정신믿음-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사1:1, 10-20;히11:1-3, 8-16; 눅 12:32-40)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8.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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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총리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지난 8월 2일에 시작된 ‘무역전쟁’을 계기로,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을 비롯해, 2015년의 ‘위안부 합의’ 등)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성찰하는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올해 광복 7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지 74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이 과연 진정으로 독립된 나라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1조 6천억 달러로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자, 국제적으로는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고, 여러 국제기구에 가입해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다시 말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명실상부한 자주적인 독립 국가인가라는 질문은 그렇다면 왜 제기되는 것일까요?

아베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것 때문에 불거졌지만, 사실 우리가 얼마나 대일 수입 의존적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첨단부품 소재를 일본에 의존해온 결과가 끼치는 심각한 타격을 보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 독립국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 아베 정부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자체 부품 소재 개발에 시간과 자본을 쏟지 않으면서, 일본에 의존하면서 압축 성장을 이루어온 것에 대한 반성을 하는 계기를 주었고, 온 국민이 한일관계사를 다시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를 주었기 때문이지요. 아베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를 계기로 대체 수입처 확보와 부품소재의 국산화, 남북경협을 통한 내수시장의 확대, 기술과학의 발전 등,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확실한 경제자립을 위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으니 참으로 아베 수상에게 감사할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를 ‘쉽게 끓었다가 금방 식는 냄비 같은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는 일본 집권자들과 우익집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이번에 시작된 이른바 ‘반 아베, 극일운동’이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정부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해(8월) 현재 약 6천억 달러의 수출규모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수입소재 단 세 가지에 기둥산업이 흔들리고, 일본의 전략물자우대 규제에 경제위기를 논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의 과학기술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번 사태로 향후 한국 기업실적의 둔화, 주가 하락, 실업증가 등으로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난관을 극복하면서 한국의 경제정책 및 산업구조에 어떤 취약점이 있는지 살피면서 중장기적인 대응을 한다는 범국민적인 결의와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경제독립국이 될 수 있는 도약의 기회를 자칫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국인가 하는 질문은 임진왜란, 식민지배의 뼈아픈 역사를 만든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일 무역 갈등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별로 관심이 없는, 아니 이런 와중에서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한-일간 무역 갈등의 와중에 미국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의 방위비분담금의 5배 증액을 압박했습니다. 5년마다 했던 방위비인상 협정을 미국의 요구로 1년 마다 하기로 해서, 지난 3월 9,062억 원에서 1조 389억 원으로 8,2% 인상됐는데, 50억 달러(약 5조 9천억 원)로 인상하려 한다는 현지 언론보도까지 나왔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요청하는가 하면,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장관은 아시아의 동맹과 협의해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일간 갈등의 중재, 동북아시아의 평화유지보다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 관철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보면 과연 우리가 ‘동맹’인지 ‘호구’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미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큰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 엊그제인데, 미국의 중거리미사일 배치 이야기가 나오자, 중국은 ‘이웃 나라가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숙고하라’고 강도 높게 위협하고 나섰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옛말처럼, 강대국들 틈새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것이 분단된 우리의 지정학적인 현실이고, 게다가 국제정세는 너무 복잡하고 전문가집단의 평가와 전망도 상이해서 우리같은 평범한 시민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힘없는 나라’가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강대국에게 당한다는 것을 자국이익을 최우선 판단과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매우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깨닫게 해주었으니,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지금 같은 세계화 시대에 그물망처럼 얽힌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의 경제독립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상호 호혜성에 기초한 자유무역질서가 아니라,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거나, 직·간접적 간섭 혹은 압력을 받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주, 자립하지 못하는 나라를 독립국가라고 할 수 없지요. 운동장은 이미 기울어져 있고, 선수들의 출발점도 서로 다른 상황에서 평등한 경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세계화 현실입니다.

< 2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주전 8세기의 유다의 현실도 그랬습니다. 북쪽에 있던 앗수르 제국이 제국주의적 정복 전쟁을 남서쪽으로 확장했고, 가공할만한 군사력을 동원한 앗수르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막으려고 주변의 작은 왕국들이 동맹을 맺고 저항했으나, 모든 저항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 Kimon Berlin, “La nouvelle J&#233;rusalem(Tapisserie de l'Apocalypse) / The New Jerusalem(Tapestry of the Apocalypse)” ⓒWikipedia

그러자 이웃 나라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동맹군이 유다 왕 아하스에게 반앗수르 연합전선에 동참하도록 강요합니다. 눈치를 보면서 흔들리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믿고 외국군대의 힘에 의지하지 말라고 권유하지만, 아하스는 이사야의 충고를 무시하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지금은 유다의 해방군으로 출병한 앗수르가 오히려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을 했고, 마침내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전 722년/721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고, 그의 아들 사르곤 2세는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많은 상류층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앗수르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멸망을 면한 남 왕국 유다, 이집트의 군사원조를 믿고 다시 반 앗수르 전선을 형성해 저항했지만, 주전 701년, 앗수르의 새 군주 산헤립의 단호한 징벌 원정으로 유다도 굴복했습니다. 유다는 조공 외에도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겨우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주전 8세기 중반기, 40년간(주전 740년-701년) 지속된 유다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유다 왕실과 유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미래를 전망한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의 파멸 원인을 외국군의 침략보다 먼저 유다의 귀족과 관료, 대토지 지주 등 상류사회의 부패와 유대 백성의 타락, 유다 사회의 내분과 분열에서 보았습니다.

유다 통치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유다 백성들은 마치 망한 고모라 성읍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형식적 제의에는 열심이었지만(이 1,1115), 정작 제의의 근본정신, 곧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힘없는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변호하지 않았습니다(이 1,17). 심지어는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했습니다(이 5,20). 도둑의 짝이 된 지도층은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녔습니다(이 1,23). 백성을 짓밟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갰다고 합니다(이 3,15).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깨끗할 수 없지요. 백성도 서로 억누르고, 서로 치고, 싸우면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대들고, 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에게 예의 없이 대했습니다(이 3,5).

나라가 흔들리면, 지도자라도 굳건히 서야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유다를 공격하려고 하자, 유다 왕 아하스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이 7,2). 그러자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서지 못한다!’(이 7,9).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일관된 행동이 백성의 신뢰를 받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근본적인 힘은 지도자가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리는 데서 나옵니다(이 32,1).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고,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때, 통치자가 경솔하지 않고, 사려 깊게 행동할 때(이 32,3-4), 나라가 굳건히 설 수 있다고 예언자 이사야는 호소한 것이지요.

그러나 유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을 갔습니다. 결과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패망과 유다의 속국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주님만이 아니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열방들을 심판하시는 만군의 야훼 하나님과 신정통치의 이상이 성취되는 새로운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 나라는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는 나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이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되는 나라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는 나라,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는 나라입니다. 사자도 없고, 사나운 짐승도 없는 길, 그 길을 따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나라입니다(이 35,5-9).

그리고 새 나라를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이들을 이사야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주변 강대국들인 앗시리아,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 에티오피아와 엘람과 바빌로니아와 하맛 등에 흩어져서 남아있던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이 11,11). 악하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지키는 사람들, 망해가는 나라 한 복판에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은 이 ‘남은 백성’을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셨듯이, 앗시리아에서 돌아오게 하여(이 11,16), 이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드실 것이었습니다.

< 3 >

이사야가 노래한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1차 박해가 지나가고(히 10,32), 2차 박해가 시작된 주후 80년에서 9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히브리서는 박해받는 (헬라화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욕과 환난을 당했고,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감옥에 갇혀 고통을 받았고, 자기 소유를 빼앗기면서도 그런 일들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히 10,33-34).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고난 받고 있는, 미래가 캄캄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은 절망적인 어둠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비록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살다간 믿음의 조상들을 증언합니다.

형제인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믿음으로 아직도 말하고 있는 아벨,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간 에녹, 아직 보이지 않은 일들에게 대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을 때, 그것을 믿고 방주를 마련하여 구원받은 노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닌 아브라함, 수태할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임신한 사라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증언하는 것은, 이로써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 것인데, 다시 말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과학자들은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은 실재의 부분이 아니라고 가정합니다. 검증 가능한 것이 아니면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일종의 ‘도그마’(독단적 교리)입니다. 물리학이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믿음, 이른바 ‘물리주의’이지요.

그러나 ‘보이는 것만 있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혹은 실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은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들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가 현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믿음이지요. 사람은 대부분 ‘지나간 과거’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약속된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지요.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던지, 아니면 그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세 개의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현재의 희망 속에 있으니,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 여기의 현재만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미래의 어떤 불확실성도 그를 흔들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그를 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4 >

그러므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혼인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깨어 기다리는 복 있는 종들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오는 것처럼, ‘인자’, 곧 ‘구세주’가 올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눅 12,40).

역사의 전환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 예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갑자기 시작된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아베 총리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것이,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를 중지시킨 것이 한국은 물론, 일본과 전 세계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과연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카이로스’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준비되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증거 된 과거’로 확신하는 믿음을 가진다는 뜻이지요.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깨어있고, 준비된 종들입니다. 깨어있고 준비된 사람들만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편 가르기와 색깔론과 극단주의’로 분열된 광복 74주년을 맞은 올해가, 우리나라를 진정한 의미의 독립국으로 만들 수 있는 ‘모멘텀’이 될지, 못 될지는 한국과 일본의 그리스도인, 두 나라의 성숙한 시민사회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깨어 공영과 평화의 미래를 함께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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