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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사상과 양명의 치량지의 교육(3)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마지막회)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9.08.28 16:36

‘상상적 공감력’(common sense, 惻隱之心/仁)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
그리고 아동교육

전편의 ‘미감적 감각’과 ‘감정’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 이해에 이어서, 아렌트와 양명이 파악한 판단력과 양지의 두 번째 특성은 ‘사심 없음’(disinteressness)과 ‘불편부당함’(impartiality) 등이다. 이것은 원래 우리 마음의 순수한 상태로서 어떤 사적 욕망에 사로잡힘이 없는 것을 말하며, 자아가 중심이 아니라 세상이 중심이 되고, 어떤 목적에 사로잡힘이 없이 여기․지금의 평안함(Gelassenheit, carelessness)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로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린 시절 아직 세상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충분히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어 본 경험으로 가능하고, 그 반대로 한 번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아이, 항상 혹독하게 미래의 과제와 목표에 휘둘려서 온전히 현재에 살아보지 못한 아이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심 없음’과 ‘공평함’의 평안함에 도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서구는 특히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시대 이래로부터 심한 목적주의에 사로잡혔다. 전 대륙적으로, 전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부와 명예와 성공의 목적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서 살게 되었으며,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혹독한 과정에서 제일 피해를 입는 것은 노약자, 이방인, 어린이들이다. 이 시기에 살았던 히틀러의 아버지는 의심 많은 출생과 가난, 외로움을 겪고 고된 노력을 통해 자수성가해서 국가공무원이 된 사람으로서 가정에서 ‘복종’을 가장 중요한 생활수칙으로 삼았던 전제군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 둘째 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어린 시절 학업성적과 훈육 등을 이유로 거의 죽일 것 같이 때리는 아버지의 매질을 받고 자랐고, 그런 히틀러를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거의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그녀 역시 그 아버지 앞에서 철저히 약자였다.(1)

비슷한 시절에 나서 자란 스위스의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도 보면, 어떻게 한 아이가 그 부모와 그를 배출한 마을과 또한 허영심에 가득 찬 교육자들의 목적주의로 인해서 마치 ‘수레바퀴 아래에’ 끼인 것처럼 무섭게 학업만 강요당하다가 죽어갔는지를 잘 그려주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루소는 그의 『에밀』에서 “자기애”와 “이기심”을 구별했다. 그러면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연인인 유아시절에 자기애가 충족되지 못한 아이는 나중에 남을 위해서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서 두 개의 힘과 싸우고, 두 개의 힘 사이에서 방황하여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이바지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뿐이라고 했다.(2)

의무와 과제와 미래에의 목표에로 내몰리기 전에 아이들은 충분히 여기 지금 현재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현재에서 항상 여유를 가지고, 힘이 남아서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생기고, 그래서 그 주변과 자연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발견한 세계와 자연을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대상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여유를 가지고 있을 때 대상을 찬찬히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편파적이지 않을 수 있고, 무엇이 아름답고 역겨운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의 본질은 ‘기다림’이라고 한 루소나 페스탈로치의 이해는 매우 타당하다. 앞에서 말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그렇게 공부로 내몰리기 전에 풀을 말리던 일, 토끼하고 놀던 일, 낚시질을 가서 강가에 누워 있었던 일, 불을 지펴 감자를 굽던 일들을 다시 해볼 수 있기 위해서 여유가 생기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그를 더욱 학습에로 몰아갔고, 결국 거기서 그는 신경병에 걸리게 되었으며,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우왕좌왕하는 아이로, 나중에는 어떤 것도 배울 수 없는 화석 같은 아이가 되어서 결국 죽음을 택했다. 오늘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주변에 과도한 학습량에 눌려서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줄을 잇고 있는데, 서구에서 1, 2차 세계대전 전후 제국주의의 약육강식과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의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16세기 동아시아의 양명은 당시 일반적인 어린이 교육이 매일 오직 글귀를 읽고 과거시험답안 쓰는 연습만을 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몸가짐은 잘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예로써 인도할 줄 모르고, 총명할 것은 추구하면서도 선한 길을 가르쳐 줄줄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들을 줄로 묶고 매질을 하여 마치 죄수처럼 다루니 학교 가는 것을 감옥 가는 것처럼 싫어하고, 선생이나 어른 보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긴다고 양명은 지적한다.(3)

이러한 싫은 감정을 감추고 더 놀고 즐기려고 거짓말하고 속이게 되어서 결국은 나쁜 아이들이 되고 만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러한 강제와 억지, 주입식 교육에서 다른 아이들이 나오고, 선한 품성이 길러지기를 기대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양명은 강한 어조로 아이들 각자의 타고난 능력에 주의하라고 권고한다. 한 아이가 만약 200단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100단어만 가르쳐주어 항상 에너지와 힘이 남아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럴 때만이 그 아이가 즐겁고 쉬운 마음으로 공부에 임할 수 있고, 그래야만 나쁜 행동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4)

즉 양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온전히 배웠는가가 중요한 것인데, 그래서 아이들이 글을 소리 내어 읽을 적에도 단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오로지 하여 그 뜻을 반복해서 되새기며 리듬과 목소리도 잘 맞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양명은 “공부란 언제나 상쾌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常快活, 便是工夫)이라고 했다. 또한 마음의 본체를 ‘기쁨’(憙)과 ‘즐거움’(樂)으로 이해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였다.

▲ 교육이 고통이 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Getty Image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교육에서 너무나 학교공부에로만 몰아치며 미래의 과제와 의무에로만 밀어 넣는 교육법에서 벗어나서 아이들에게 다시 여유를 돌려주고, 현재에 살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힘을 회복하게 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할 때 아이들의 판단력과 양지의 상상력이 살아난다는 것을 밝혀준다. 사심 없이 편벽되지 않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위해 행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온전히 자신이 되어서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건강한 판단력과 선한 공감력의 인간으로 자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뜻한 마음의 공감력을 잘 전개시키도록 하고, 반성과 사고를 위해서 여유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히만이나 히틀러와 같은 사람을 내지 않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공통감적 상상력’(imagination, 勇)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 그리고 아동교육

아렌트와 양명이 세 번째로 파악한 인간 정신의 판단력과 양지는 공동감적 상상력으로서의 그것이다. 아렌트는 줄기차게 판단력의 공통감각(상식)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결국 우리의 탄생성, 판단력이란 나 홀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생활 속에서, 인간간의 관계 안에서, 타인의 존재가 전제되어야지만 가능한 것임을 일깨워 준다.

교육은 무엇인가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아렌트는 오늘날의 현대 교육에서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교사’와 ‘전통’과 ‘종교’의 권위를 매우 중시한다. 이것은 다음 세대의 교육은 그저 그들 자신 그룹 속에 던져두거나 기성세대의 인도함 없이 그 세대들 간의 일로서 놓아두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책임 있는 기성세대의 인도가 따라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라나는 세대의 판단력은 과거와 전통에서 이미 실행되었던 판단력의 예들을 보고서 거기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보는 방법을 통해서 확장된다. 따라서 교사들은 기성세대의 대표자로서 이미 있었던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를 소개해 주는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이 세계를 지속시키는데 대한 책임”도 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5) 교사의 권위는 이 책임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아렌트는 20세기 대중의 사회는 책임의식의 부재가 그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바로 ‘어린이의 세기’라고 하면서도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의 이 책임의식의 부재로 “교육에서의 위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권위’(authority)없이 산다는 것은, ‘전통’없이 산다는 것은 삶의 어떠한 기준과 모델도 없이 여기에서 다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인식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판단력이 ‘공통감’(common sense)이라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것은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아렌트는 다시 ‘종교’, ‘전통’, ‘권위’의 로마적 삼중주를 말하고 그것이 정치적 삶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한다.(6)

인간의 양지를 단순히 지적 감수성이나 감각만이 아니라 인간 공동 삶의 구체적인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그것들의 ‘뿌리’(사단: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로도 파악하는 양명은 자신의 치량지가 물론 경전공부 등의 지적 공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은 바로 도덕적 실천, 구체적인 삶에서의 인간다움의 실행에 있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명은 앞의 초등교육의 개선을 위한 제언에서도 밝힌 대로 어떠한 교육 내용 보다 도덕 실천의 교육을 강조한다. 그는 매일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그들이 집에서 얼마나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진실하게 가졌는지, 예절과 말과 행동, 마음가짐에 있어서 거짓이 없었고, 편벽되거나 독실하지 못했는지를 묻는 일을 제일 먼저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여기에 대해서 사실대로 대답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의 대답에 따라서 교사는 간곡히 가르치고, 아이들이 이 가르침에서 깨우쳐졌을 때에야 조용히 물러가서 다른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자칫 경직된 도덕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갖게 하지만, 그러나 양명에 따르면,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여 사람간의 관계를 성실히 하는 것을 배우는 도덕교육이야말로 모든 다른 공부에 비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의 예의와 몸가짐을 점검하는 날에는 과거시험 글짓기 공부를 면제시켜 줄 것을 권고하고, 예의 공부를 위해서 규칙적으로 모든 학생들을 모아서 함께 모여 실행하라고 권한다.

양명은 자신의 치량지의 공부법을 맹자의 개념을 빌어서 ‘항산’(恒産, always doing something)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코 지적 공부와 실천, 과거시험공부와 사회적 책임, 책 읽는 것과 일상의 일들이 서로 완전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준다. 오히려 참된 공부란 모든 일들 가운데서, 깨어있거나 자는 동안에도, 일생동안 우리의 양지가 그 때 그 때마다 대상과 일을 만나서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확충하는 공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7) 이것은 마치 18세기 유럽에서의 페스탈로치가 일생동안의 자신의 교육적 탐구를 한 마디로 “삶이 곧 교육이다”(Das Leben bildet)라는 명제로 마무리한 것을 상기시킨다.(8) 또한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라고 한 지혜를 생각나게 한다. 즉 진정한 교육이란 삶과 동떨어져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그 삶에서 같이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건강한 공통감의 판단자, 보통사람을 키우는 교육

한편 이와 유사한 지혜를 우리는 아렌트의 ‘관객’(spector, 관찰자)의 이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가 그렇게 ‘행위’와 ‘행위자’(actor)를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 삶의 의미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는 ‘관객’(spector)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9) 그녀에 따르면 ‘천재’(genius)와 ‘행위자’(actor or maker)가 위대한 행위를 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여 제작하고 그것을 ‘전달할 만한 것’(communicable)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전해주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그 위대함과 아름다음을 알아주고 판단하는 다수의 ‘관객’(spector)이 없이는 결코 그들의 위대성과 아름다움도 드러날 수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 삶과 역사에서 의미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판단자인 관람자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행위자는 사실 진정으로 자발적이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명성이나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는 판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10) 또한 공론의 영역은 관객의 비판과 판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행위자나 창조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11)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에게도 더 중요한 것은 행위자보다는 판단자인 ‘관객’들이고, 위대한 지식보다는 ‘상식’이며, 공동체의 삶에서 이루어진 ‘공통감’이다.

아렌트는 여기서 확장된 의식, 공평무사하고, 개인의 사적 이익이나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수칙을 가지고 있는 관객의 의식은 다시 “다른 관객들”의 판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12)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공통감에서의 다수성의 조건을 강조하는데, 그녀에 따르면 칸트에게서의 관객은 ‘다수’(in the plural)이지만 헤겔에게서의 관객은 ‘단수’(in singular)로 나타나고, 그 단수도 절대정신의 철학자인 헤겔 자신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헤겔철학의 독재성과 역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13)

관객으로서 판단력을 가지고, 상식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봐주고, 무엇이 인간적인가의 판단으로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해야 할 것을 사심 없이 구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말로 비록 천재는 아니고 위대한 행위자는 아니지만,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세상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세계를 전체주의의 폭압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있고, 온갖 실리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관객들을 많이 배출하는 일이다. 또한 거기서의 상식이란 인간 간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길러질 수 없는 것인데, 그 인간 간의 관계에서 길러진 인간적 덕목이 바로 상식의 내용이고, 판단력의 내용인 것을 잘 드러내 준다.

어떤 스페셜리스트도 아니므로 그들 존재의 유용성에 대한 시비는 항상 있어왔다. 하지만 제너럴리스트로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서 세상을 판단해주는 인문학자들, 철학자들, 이들의 공통감이 없이는 아름다움이 보존될 수 없고, 세상이 그 자체로서 지속될 수 없으며, 이 세계는 온통 실리주의의 잣대 앞에서 사라지게 되고 잉여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준다.

일상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길러진 상식, 인간 간의 관계맺음에서 기초적으로 길러져서 전 우주의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공통감, 이 인간 삶에서의 공통감과 다수성에 대한 희망과 신뢰로 아렌트와 양명은 인간의 또 다른 조건인 ‘사멸성’도 ‘무심하게’(careless) 받아들인다. 양명의 임종 시 남긴 말은, “내 마음 광명하도다. 이제 무슨 말을 더 되풀이 하겠는가?”(此心光明, 亦復何言.)였고,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보고로 큰 어려움에 있었을 때에라도 그 시대의 위대한 판단자로 평가받는 로마 교황 요한 23세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의 임종 시 한 말 “Everyday is a good day to be born, everyday is a good day to die.”(모든 날이 태어나기에 좋은 날이고, 모든 날이 죽기에 좋은 날이다)를 “그의 가장 위대한 말”로 삼은 데서 드러난다.(14)

교육적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길

오늘 한국 사회에서 목도되는 ‘교육적 전체주의’의 위협은 가공할 만하다. 교육이 온통 실리주의의 도구가 되어서 아이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되어야 하며 그래도 안되면 그 교육자들에 의해서 “전체주의적 해결”(totalitarian solution)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기러기 아빠, 대입성적을 위한 자퇴, 새벽이 되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입시학원가, 대학도 온통 실리주의의 각축장이 되어서 누구라도 언제든지 잉여자가 되어서 뿌리 뽑힐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자살로, 가출로, 가족해체로, 도박 등의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교육은 특히 인간의 ‘자연’과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연을 건드리려는 교육에서의 전체주의적 시도는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15)

아렌트는 지적하기를 자연은 “고쳐지는 것”(changing)이 아니라 “파괴될 뿐”(destroying)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연’(性, nature)인 것이다. 이 자연의 조건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 이 겸양의 덕목이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것 같다. 그래서 ‘비관주의’도 말고 ‘낙관주의’도 말고 “매순간의 일”(die Sache des jeden Augenblicks)로서 다시 우리의 책임을 다하라는 ‘책임의 원리’(das Prinzip der Verantwortung)도 생각나고(16), 아렌트와 양명이 전해주는 가르침도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오!(oh), 늘(always)!’의 지속성(誠)과 진실성(敬)의 영성을 살아내는 데서 현현한다.

미주

(미주 1) Alice Miller, Am Anfang war Erziehung, Suhrkamp Taschenbuch 951, 1983, 175ff.
(미주 2) J. J. 루소, 『에밀』, 정붕구 옮김(서울: 범우사, 2000), 33.
(미주 3) 『傳習錄』中 195 조, “若近世之訓蒙?者,日惟督以句讀課倣,責其檢束, 而不知導之以禮,求其聰明, 而不知養之以善. 鞭撻繩縛,若待拘囚. 彼視學舍, 如囹獄, 而不肯入. 視師長如寇仇, 而不欲見,窺避掩覆, 以遂其嬉遊,設詐飾詭, 以肆其頑鄙,?薄庸劣,日趨下流。是蓋驅之於惡, 而求其爲善也,何可得乎!”
(미주 4) 『傳習錄』中 195 조, “凡授書, 不在徒多. 但貴精熟. 量其資稟,能二百字者, 止可授以一百字. 常使精神力量有餘,則無厭苦之患,而有自得之美。”
(미주 5) Hannah Arendt, “The Crisis in Education”,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Penguin book, 1993), 186.
(미주 6) Ibid., 193ff.
(미주 7) 줄리아 칭,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길』, 이은선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1998), 163.
(미주 8) 이은선, “뜨거운 영혼의 사상가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 『한국 교육철학의 새 지평』 (서울: 내일을 여는 책, 2000), 222.
(미주 9)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One-Volume Edition (San Diego, New York and London: HBJ Book,  1978), One/Thingking, Two/Willing, Appendix/Judging, 95.
(미주 10) Ibid., 94.
(미주 11) Ibid., Appendix/Judging, 262.
(미주 12) Ibid., One/Thinking, 94.
(미주 13) Ibid., 96.
(미주 14)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New He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2), 335.
(미주 15)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and London: A Harvest/HBJ Book, 1983), 459.
(미주 16) 이은선,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와 교육”, 『한국 교육철학의 새 지평』 (서울: 내일을 여는 책, 2000), 280.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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