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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어서 진보가 아니라 진보이기 때문에 운동임을북핵 문제를 실마리로 해서 진영론을 탈피한 운동을 고민해 보다
황용연 | 승인 2006.11.22 00:00

북핵 문제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볼 때마다 꼭 하게 되는 생각이 있다. 북핵 문제를 두고 지금 이른바 '자위권'이니 '한반도 비핵화'니 '반전반핵'이니 '반핵반김'이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양심적 병역거부'를 놓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특히 북핵을 '자위권'이라고 옹호하는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텐데.

'양심적 병역거부'야 '자위력'이나 '국방력'을 이미 갖춰 놓은 다음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같이 놓고 비교할 수 있냐는 질문이 가능할까. 그러나 근본적인 '양심적 병역거부'는 그 '자위력'이나 '국방력'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던져야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니, 어쩌면 '어떻게 같이 놓고 비교' 운운하는 질문이 정말 나온다면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양심'과 '평화' 등의 문제에 대한 질문자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19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은 '반전반핵'을 외쳤다. 지금 한국 사회운동은 '반전평화'를 외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반미반전'을 외치기도 한다. 핵무기를 두고 국제적인 사회문제가 일어난 상황에서 정작 '반핵' 구호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반전반핵' 대신 '반전평화'나 '반미반전'을 외치면서 북한의 핵실험을 '자위권'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핵무기 자체를 긍정하거나 찬성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정작 '반핵'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가치를 '자기 편'인 경우나 혹은 그렇게 동일시될 수 있는 경우에 관철할 수 있어야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남'이나 더 나가면 '적'이 가진 핵무기를 두고 '반핵'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든 당연한 것일 테니.

'반핵' 남에게뿐 아니라 자기에게도 모두 적용되어야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일 터인데, 왜 이렇게 가치 실현의 방법 문제가 아니라 가치 실현을 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두고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앞에서 했던 반핵에 관한 이야기를 실마리삼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혹시 사회운동을 한다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쪽의 편을 들어주면 된다는 생각에 지배받고 있는 건 아닐지.

방금도 이야기한 것이지만, 사회운동이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보적 사회운동집단’이니까 우리의 모든 행동은 ‘진보’를 구현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를 들어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의 ‘평화통일위원장’이 북한의 ‘핵 자위권’을 정당화하는 글들을 퍼나르면서 굳이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사족을 붙이는 상황을 보면, ‘기독교운동’에 걸맞는 행위가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보적 운동는 진보를 구현하기 마련일까

사실, 남한의 사회운동은 북핵 문제에 현실적으로 어떤 독자적인 실천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북한의 핵실험 소식에 놀라고, 북한-중국-미국의 비밀회담으로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선언이 나오는데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입장을 내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실천이 없는 걸까?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반핵이나 평화와 같은 가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편’이 이기면 그런 가치가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싶다. 때문에 그런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과 운동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행동에 박수치거나 마음 졸이거나 하는 결과만 낳은 것이다. 즉, ‘반핵’과 ‘평화’ 등의 가치를 ‘진영론’의 도구로만 사용해 온 귀결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좋은 곡식들이 잘 자라는 것처럼 보이던 밭에서 어느날 갑자기 가라지가 발견되는 비유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좋은 밭’에 자라는 건 모두 ‘좋은 곡식’일 거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일꾼들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가라지가 발견된 상황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걸까.

황용연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대학부장

황용연  hyysc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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