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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을 지키다”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0.28 16:35
36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38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복음 26:36~38/ 새번역)

기도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 때, 기도문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주로 메리 므로쪼브스키의 「환영의 기도」입니다. 요즘은 다른 기도문으로 기도의 빗장을 열고 있습니다. 기도가 정체된 것 같다고 했더니 벗이 보내준 마리아 고레띠의 기도문입니다. 처음 읽던 날 이상한 부분을 만났습니다.

“… 너는 그저 나의 사랑 앞에 네 마음을 열어다오. … 나는 네가 내 앞에 고요히 머무르길 바란다. 네 청을 들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눈물을 닦아 달라고 하지도 말고 무거운 짐을 덜어 달라고 하지도 말고 그저 여기 내 앞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란다.… 우리 둘만의 고요를 사랑하자.” 여기까지는 환영의 기도와 결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타인가 싶은 부분이 이어집니다.

“내가 만일 피곤하면 나는 너의 평화로움 안에서 쉬고, 네가 만일 피곤하면 내게 와서 쉬고 내가 만일 냉대 받음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나에 대한 너의 특별한 관심만으로 나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 나의 현존만으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너에게서 나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 머물러 있어 다오. 원하는 것 아무 것도 없이.”

▲ Antoine Jossé

하나님께서 피곤하시면, 기도하는 이의 평화로움 안에서 쉰다? 하나님께서 냉대 받아 상처 입으시면, 기도하는 이의 순수한 관심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내”와 “네”가 바뀌었나 싶었습니다. 끝까지 읽어보니 바뀐 게 아니었습니다. 바뀐 것처럼 보인 이유는 생각 못한 하나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위로가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상처도 받지 않으신다 여깁니다. 부동의 동자, 제1원인인 하나님, 온 세상을 구원하지만, 온 세상의 아픔과 절망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하면, 세상의 아픔에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세상보다 더 깊이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당사자보다 더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필요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 늘 간구하기만 했구나.’ 깨닫습니다. 물론 구하라 하셨고, 들어주시려는 하나님이시지만, 위안을 받으시기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하나님의 현존만으로 만족하는 기도자에게 위안을 받으시는 하나님! 원하는 것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곁을 지켜달라던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만납니다.

괴로워 죽겠다고 호소하는 예수님, 그런 주님께선 그저 깨어서 곁을 지켜달라고만 하십니다. 십자가가 지나가게, 고통 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곁에 함께 있어주련, 그저 깨어서 함께 머물러 주련.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더 애달픈 부탁입니다. 지금도 고통 받는 이들로 인해 아파하시며, 깨어서 곁을 지켜달라고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지금도 수많은 영혼이 주님께 간구하고 또 간구할 텐데, 주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저주하고 자신의 승리를 간청, 아니 강요할 텐데, 내 자식을 당신의 좌우에 앉혀달라고 할 텐데… 결국 간구의 말은 멈추고 그런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봤습니다. 안쓰러움, 죄스러움, 애처로움, 사랑어린 시선으로 한참을.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라는 마음을 머금은 침묵이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렵지만, 주님의 사랑만으로 충분하기를 바라는 침묵의 시선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주님 곁에 머물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묘한 변화가 그 하루를 물들입니다. 피하고만 싶었던 불안한 상황 앞에서 마음이 잔잔했습니다. 불편했던 사람을 만나도 잔잔합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그를 만납니다. 그의 말보다 주님의 마음이 더 가깝습니다. 그를 아파하시는 마음이 가깝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뜻밖의 하루입니다.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시편34:4) 이 시편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면, 건져주시는구나. 주님이 주신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을 찾아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구나. 두려워할 대상이 그대로여도 평화롭구나. 아! 주님만으로 충분한 사랑, 다른 무엇이 아니라 주님을 구할 때, 주님을 통한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을 구할 때, 드디어 구원이 두근거리는구나.’

설익은 깨달음입니다. 앞으로 기도하며 더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거룩해 보이는 욕망이 교묘하게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어느새 ‘주님만’ 구하는 중심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주님만을 구하는 기도로 누리는 자유’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 교묘하고 은밀한 어긋남에 깨어서 주님께 맡깁니다. 그저 주님 곁에 사랑으로 깨어 머물 수 있도록. 십자가 옆에서 들어드리지 못한 애달픈 부탁을 이제라도 들어드릴 수 있도록.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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