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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흑(黑)을 검을 현(玄)으로”운학 박경동의 서각 「무애무증無愛無憎」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1.01 17:17

“세상의 모든 것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짐승, 나무, 별, 모든 것이 상형문자다. 그것을 읽어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기 시작한 사람에게 그것들은 기쁨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보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그것들이 사람이고, 짐승이고, 나무고, 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야 너무 늦게 그것들의 의미를 깨닫는다.” 
-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8), 88.

그렇다. 모든 것이 상형문자이자 언어다. 발밑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 그 누군가를 빼앗기고 나도, 글자와 말이 살아난다. 바람은 더 이상 대류현상일 수 없다. 저 하늘도 푸르르면 푸르른대로, 흐릿하면 흐릿한 대로 각기 다른 음성으로 말을 걸어온다. 드디어 밤하늘 검은 빛이 한 가지 색이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애드 라인하르트(Adolph Frederick Reinhardt 1913~67)의 블랙 페인팅 작품을 한동안 바라볼 눈이 열린다. 검은 색으로 가득한 작품들이 더 이상 흑암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각기 다른 검정의 무늬와 결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출처: http://adreinhardtfoundation.org

사물을 상형하여 의미와 글자를 엮어가는 한자는 존재를 읽는 눈을 열어준다. 그런 한자에서 검정은 무엇을 상형하여 표현했을까? 한자에 검정은 두 글자가 있다. 검을 현(玄)과 검을 흑(黑). 그러나 현과 흑은 다른 검정이다. 

흑(黑)은 아궁이 아래 불이 타는 모습에서 따온 글자다. 다 타고 남은 그 재의 검은 색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현(玄)은 활시위를 형상화한 글자로 본다. 활시위에 옻이나 송진을 발라 검은 색을 띄게 된 탓에 현(玄)이 검다는 뜻이 되었다. 이런 일본의 해석과 중국은 또 다르다. 중국에서는 누에고치를 상형했다고 본다. 누에고치 속 어둠에서 검다는 의미가 생겼다는 것이다. 누에고치 속 어둠으로 볼 때,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어둠이 바로 현의 검은 빛이 된다. 천지현황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하늘빛을 현玄으로 본다. 밤하늘의 그 어둠이 바로 누에고치 속 어둠이라는 의미다.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나게 할 태중의 어둠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누에고치 속 어둠을 현의 검은 빛으로 볼 때, 어머니 자慈, 사랑 자慈도 그 의미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누에고치 두 개를 받들고 있는 마음心의 모습이 자慈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을 품어 키워내는 어둠, 그것은 어미 태중의 어두움이다. 현의 어두움을 받들고 품는 마음, 생명을 길러내는 어둠을 겹겹이 짊어진 마음, 그것이 바로 자비이자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흑(黑)이 다 타버린 재의 허무한 검정이라면, 현(玄)은 활시위의 검정이자 누에고치 속 검정이다. 화살을 힘차게 날릴 수 있는 기운을 머금은 검정이자 새 생명을 품어 기르는 어둠이다. 나쁘고 사악하다는 의미도 지닌 흑(黑)은 그러므로 현(玄)과 의미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현묘지도가 흑묘지도가 아닌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현(玄)은 현묘지도라는 말도 있듯이 깊고 오묘한 신비를 머금은 검정빛이기 때문이다. 새벽 미명, 빛이 밝아오기 전에 어두움도 현이라 할 수밖에 없다. 새벽의 어둠은 그 속에 이미 낮의 빛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순서로 하루를 헤아렸나보다.

어머니 배 속에서 마주하는 어둠 역시 현이 어울린다. 아직 무슨 소리인지, 어떤 빛깔인지 알 수 없는 그 어둠을 배 속에서 만날 것이다. 현(玄)은 그 모든 신비를 함께 머금고 있는 검은 깊이이기 때문이다. 밤하늘 별빛이 빛나는 어둠은 흑(黑)이 아니다.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이 별을 만나 부딪히면 드디어 빛나지 않던가. 별빛은 어둠속에 이미 빛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밤하늘 그 어둠은 빛과 어둠을 함께 머금은 현(玄)이다.

하루가 밝아오기 전 의식이 먼저 돌아온다. 희미한 어둠을 바라보며, 마음이 너무 무거운 날이 적지 않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다 문안을 여쭌다. 지난 밤 어떠셨는지 살피면, 얼마나 아프시고 또 아프셨을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땅에서 한숨과 절규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곧 밝아올 하루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새벽들이 얼마나 많을지. 분명 하루가 밝아오겠지만, 낮이 낮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들, 낮도 그저 흑(黑) 빛 가득해 보이는 이들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를 더욱 의지한다. 그 기도는 간구이기 이전에 호흡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인공호흡이다. 출근길은 허스키견 하니와 함께 한다.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겨운 녀석의 생기가 목줄을 통해 팽팽하게 전해온다. 기쁨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몸짓이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이끌어 주는 듯하다. 카페에 나와 오픈 준비를 다 마치면, 원두를 갈아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부서져 나오는 원두 가루로 맛보는 향은 그 어떤 커피보다 맛이 좋다. 마음이 그 향을 들이키며 깨어난다. 그 한 잔을 마시며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

인공호흡 같은 기도, 한 생명과의 산책, 커피 향과 함께 하는 주님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예배이자 기도이다. 흑(黑)만 보이던 마음의 착각이 가라앉고 드디어 현(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착어린 사랑을 무애무증(無愛無憎)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태반이다. 그것 아니면 안 된다고 불안해하던 사랑을 자유케 한다. 사랑도 미움도 내려놓는 사랑으로 향하게 한다.

무애무증(無愛無憎)은 고려말의 고승인 나옹 선사(1262~1342)가 지은 싯구 중 한 구절이다. 이를 운학 박경동 작가가 서각작품으로 나무 위에 새겨 넣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서각 작품에서 사랑 애(愛)는 사람이 두 팔로 마음 심心을 품어 안은 모습이다. 확대해 놓은 애愛 자를 가만히 바라보면, 보일 것이다. 두 손으로 가슴에 마음을 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그 모습에서 수줍은 듯, 설레는 듯 벅차하는 한 영혼이 보이지 않는가.
  

가슴에 끌어안은 마음이 때로는 너무 큰 힘이 되지만, 때로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그 마음을 누군가를 향해 건네준다면, 그 누군가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 소유하려는 집착의 손길로 굳어지면, 이보다 더 큰 고통도 없다. 마음은 무게가 없어 너무나 가볍게 보인다. 그러나 눈송이가 쌓이고 쌓여 굵은 소나무 가지 부러트리듯, 놓지 못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영혼도 부러진다. 그래서 미움만 없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도 없다는 무애무증(無愛無憎)을 노래한다.

예수님께서는 무애무증의 역설을 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이신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누가복음 14:26) 이런 사랑의 역설을 문자주의자조차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과 몸짓에까지 사랑을 가득 채우는 절대적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림으로 모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신비 그대로다.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신비다. 누군가를 버리고, 누군가를 선택함으로 나머지 모두를 끌어안는 사랑이다.

흑(黑)을 현(玄)으로 밝히 보는 눈뜸이 필요하다. 무애무증이 움터오를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흑이 두려워 절망하는 집착에서 풀려나 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워 집착하던 사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흐르게 하는 기도가, 예배가 필요하다. 마음이 힘을 잃고 지칠수록, 사랑의 크기만큼 그 뒷면에 미움이 커져갈수록 필요하다. 흑을 없애 달라고, 적을 무찔러 달라고 더욱 매달리기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무애무증(無愛無憎) 가능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무애무증으로 사랑은 무르익는다. 사랑이 없고 증오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무감각, 무정함이리라.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미워하는 마음 그대로를 흐르도록 놓아주는 깊이가 아닐까. 낙엽 떨어지듯 미워하는 마음 쓰러진 곁에 사랑하는 마음 떨구는 깊이가 아닐까. 사랑하지만 놓아주고 밉지만 받아주는 품이 아닐까. 가능해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무애무증을 향한다. 꽃이 피어 결국 지고 열매를 남기듯이 무애무증을 향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 가시며 부르신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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