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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바탈태우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다석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4)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11.03 16:41

이제 웋일름[천명(天命)]에 따라 자신의 바탈을 태워 말숨을 쉬면서 성령의 얼김을 우주에 펴차는 얼생명의 양태를 살펴보자.

말숨과 우숨(얼숨)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 ‘말’은 ‘마루’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마루(뜻)라는 의미가 우리말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다. 하느님의 마루가 우리의 얼 속으로 들고날 때 우리 안에서는 생각의 불꽃이 튀게 된다. ‘말슴’은 그렇게 튀는 생각에 답하면서 하느님의 마루를 우리의 말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마루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이 ‘말씀’이다. 이렇듯 말숨을 쉰다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참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다석은 이 경우 속알 또는 바탈이라는 낱말을 즐겨 쓴다. 그리고 바탈이 ‘받할’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받할’은 ‘받’과 ‘할’이 모여 만들어진 글자로서, ‘받’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의미하고, ‘할’은 그 받은 것을 갖고 해야 할 바를 뜻한다. 따라서 ‘바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살아가면서 실행해내야 할 바를 가리킨다. 그것은 동양사상에서 흔히 쓰는 성(性)에 대한 우리말인 셈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우리의 속알, 바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이, 즉 성(性)과 명(命)이 이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말씀을 산다’ 또는 ‘말숨을 쉰다’는 것은 목숨을 쉬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목숨을 연명하며 육체적인 몸살이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말숨을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계속 이어나가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목숨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연적인 삶을 이어나가지만, 말숨의 차원에서는 문화창조를 이어나간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은 말숨으로 바뀌어야 된다. ‘공자’가 ‘논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으로서의 공자는 죽고 말숨으로서의 논어가 살아남아야 한다.

말숨살이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찾아 세워서 그 뜻과 일치해 살기 위해 몸살이 차원의 삶을 끝내고 뜻살이(얼살이)의 삶을 시작함을 말한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기본이다. 깨끗이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나를 끝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얼로서, 뜻으로서 나를 시작하여 채울 수 있다. 공자가 논어가 될 때 목숨이 말숨을 쉬고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는 논어를 씀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마루)을 씀 속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우리는 누에에서 훌륭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누에는 몸살이로서의 목숨을 죽여야 고치라는 집을 지을 수 있다. 다석은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말씀)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속에 타는 참의 불이다. 속에서 장작처럼 쓰여지는 것이 말숨이다. 참이란 맘속에 쓰여지는 것이다. 중용이란 우리 맘속에서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존재다. 하느님의 말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1)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에 말숨을 쉬면서 우리는 몸이 아닌 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얼’로 숨쉬는 한에서 말숨은 다른 말로 ‘얼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한얼[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다. 그러기에 얼숨은 또한 ‘우숨’(우주적인 숨)이다. 가장 큰 우숨은 절대생명과 하나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짓는 웃음[우숨]이다.(2) 얼숨은 바로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사는 양상이며, 그 임무는 우주 안의 보이지 않는 한얼을 우주만물 속에 펴차는[우주만물에 펼쳐 채우는] 데에 있다.

▲ 폐를 통해 숨을 쉬듯 사람은 말숨과 얼숨으로 살아간다. ⓒGetty Image

다석은 유비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펴참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는 가슴에 생명의 숨길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는 얼뜻을 가지고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우리의 얼나가 한얼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태양을 만나 바탈이 터서 자라 나무가 될 때 태양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속알(바탈)이 한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처럼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라는 차원을 고루 헤아려서 인간의 참 생명의 길을 유추해낸다. 우리는 생명의 숨결을 받아 잎사귀를 키우고 우리의 바탈을 꽃피워 얼뜻의 열매를 맺는다.(3)

생명의 첨단 ‘이 제 긋’

다석은 우주적 생명을 이어받아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낱생명으로서의 나를 ‘긋’이라 즐겨 표현한다. 광대한 우주생명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의 점에 불과한 나지만 내 안에 불타는 하늘의 일름[명(命)]을 깨달을 때 나는 하늘과 하나 되어 생명의 역사를 함께 써가는 얼나로 솟날 수 있다. 이렇게 몸생명을 깨끗이 끝내고 참생명의 역사에 동참하는 몸나로서의 나의 결단을 다석은 ‘가온찍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이다.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가온찍기(ㄱ·ㄴ)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 나는 한 끄트머리이며 하나의 점이며 긋수이기도 하다.”(4)

다석은 긋과 관련지어 ‘이 긋, 제 긋, 이 제 긋’이라고 다양하게 표현하며 설명한다.(5) ‘이 긋’은 가이 없는 무한 시간이 계속 이어져 내려와 지금까지 연속된 시간의 긋[끝]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주의 시작부터 이어 이어 내려오는 그 시간의 끝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다. 태극 이전 무극으로부터 이어내려 오는 그런 긋이다. ‘나’는 그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이어져서 오늘에 이른 존재이기에 ‘이 긋’이다. 그러기에 이 긋은 시간줄, 생명줄이 이어져 내려온 끝을 말한다.

‘제 긋’은 제각각 자기의 긋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명의 시간이 계속 이어 이어 내려와 지금 여기 이 곳, 이 나라, 이 땅, 이 민족에서 각자의 제 긋이 된다. ‘이 제 긋’은 무한한 시간이 이어 이어 내려와 각자의 선택 없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서 이어져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긋은 시간의 긋[끝], 공간의 긋[끝]이다.

텅 빈 무한 공간에다 원을 그리고 그 원이 태극이라고 한다면(이것은, 그 밖은 무극임을 전제로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원 안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그것이 제 긋이다. 무한한 생명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이 긋이고, 그것을 내가 이어받아 차지하고 있는 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긋이 제 긋이다. 나의 ‘이 제 긋’은 150억 년이라는 태극의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오래 살아야 백년 정도니,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이 제 긋이다.

나의 긋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 즉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때-사이’와 가이 없는 ‘빔-사이’에 떨어진 한 방울 물과 같다. 그렇지만 그런 나와 마당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한 마리의 강아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가온찍기의 역할 때문에 그렇다. 강아지 한 마리가 가지고 있는 ‘결’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강아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강아지도 ‘때-사이’를 이어 여기까지 왔지만 강아지는 의식적으로, 주체적으로 그 사이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때-사이’는 우주의 시작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고 ‘빔-사이’는 우주공간 밖까지도 벗어나 간다. 그러기에 인간은 사이를 잇는 존재다.

나에게서 이어지는 생명의 숨줄은 단순한 육체적인 목숨으로서의 숨줄만이 아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생명의 숨줄을 이어주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생명으로, 숨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한얼이다. 바로 인간이 몸으로서의 나가 아닌, 이러한 한얼과 일치될 수 있는 내 안의 얼을 깨울 때,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본래의 나를 찾을 때, 내 안에 있는 얼나로서의 내가 솟나(솟아 나) 얼나로 살 때가 바로 ‘가온’이다. 내가 나의 본바탈의 한가운데를 찍어 적중시키는 것이다.

다석은 가온찍기(ㄱ·ㄴ) 하는 인간을 ‘긋’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숨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나다. 성령은 나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숨줄인 영원한 생명줄을 붙잡는 것이다. 붙잡은 생명줄이 이 ‘긋’이다. ‘긋’은 숨줄 긋이다. 이 숨줄 긋을 붙잡는 것이 가온찍기(ㄱ·ㄴ)이다.”(6)

나는 가고 가고 오고 오는 시간의 영원함을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 단순히 몸으로서의 내가 자신을 꽃피운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 전체 진화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고 그 뜻과 일치하는, 그 뜻 속에 품어져 있는 얼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 가온찍기다. 다석은 가온찍기를 몸과 맘의 차원보다는 뜻과 얼의 차원에서 강조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이에-있음[사이존재]으로서의 인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가온찍기’로서 설명한다.

“나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추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ㄱ·ㄴ)이다.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이 나타난 것이다. 기역(ㄱ)은 니은(ㄴ)을, 그리고 니은(ㄴ)은 기역(ㄱ)을 서로 높이는데 그 가운데 한 점을 찍는다. 기역과 아오(․)라는 한 점과 합치면 ‘가’가 되어 가고 영원히 간다. 아오(․)의 오와 니은이 합치면 ‘온’이 된다.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찍기(ㄱ·ㄴ)’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곧이 가온찍기(ㄱ·ㄴ)가 인생의 핵심이다. 그러나 깨닫는 가온찍기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끝끝내내 표현해보고 나타내보고 나타내 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알을 그려보고 내가 참 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내내이다.”(7)

‘끝끝내내’와 관련지어 다석이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깨끗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끝까지 깨어 부숴 자기 자신을 없애 버린다는 뜻이라고 다석은 풀이한다. 또는 몸으로서의 나를 깨서 몸나와는 끝장을 보라(끝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몸으로서의 나는 언젠가는 끝이 난다. 나의 몸은 내가 모르는 사이 시작되었고 그 끝을 향하여 간다. 육체의 삶이란 것은 이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얼나는 그와 같이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얼로서의 나는 거꾸로 먼저 끝을 내어야만 한다. 몸나가 끝나는 그때부터 얼나가 시작된다.

미주

(미주 1) 류영모, 『다석어록』,  205.
(미주 2) “언제 숨이 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숨지기 전에 숨을 길러놓아 영 지지 않는 목숨을 길러내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다. 그 길은 목숨을 말숨으로 바꿔놓는 일이다. 목숨을 말숨으로 바꾸고 말숨을 웃숨으로 바꾼다. 웃숨(天命)을 웃는 말숨만이 영원한 목숨에 들 수가 있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76.
(미주 3) 참조. 김흥호, 『다석일지 공부. 류영모 명상록 풀이 1』, 510 이하.
(미주 4) 류영모, 『다석어록』, 30.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217, 294, 370, 861.
(미주 5)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210, 336, 339.
(미주 6) 류영모, 『다석어록』, 41/2.
(미주 7) 류영모, 『다석어록』, 3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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