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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건 저울질”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1.25 16:0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한복음 12:24,25/새번역)

핸드폰 액정을 꽤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했습니다. 알아보니 대전보다 서울이 훨씬 가격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길에 찾아가 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광고했던 가격을 깎아내렸습니다. 결국 대전과 비슷했습니다. ‘얄팍한 상술에 속았구나. 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그 진실을 또 잊어버리고 또 공짜에 눈이 멀었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흔한 일입니다. 큰 글자로 표시된 할인 % 보고 들어가 보면, 살만한 물건은 다 작은 글자로 표시된 할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앙도 혹시 이런 얄팍한 유혹은 아니었습니까? 믿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 했건만, 예수님 말씀을 잘 읽어보면 뭔가 갸우뚱합니다.

▲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 「저울질을 하는 여인」

믿기만 하면 된다더니, 진정으로 진정으로 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 영생에 이른다니 무슨 말입니까?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오해의 소지를 없앴습니다. “누구든지 현재의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앞뒤를 재지 않는 사랑으로 그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걸 거저 얻으면, 그 가치를 누릴 수 없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최소한 목숨 정도는 걸어줘야 그 가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프레드릭 비크너는 그의 설교 “찬란한 패배”에서 바로 이런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했던 적수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적수,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적수인 이유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전에 모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전에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자아, 우리의 의지, 우리의 보물을 요구합니다.”
- 프레드릭 비크너의 “어둠 속의 비밀”, 36.

누가 예수님의 복음을 이렇게 얄팍한 상술로 덮어 버린 것일까? 누가 그랬든, 결국 책임은 각자의 몫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선 이미 진정으로 진정으로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그 대가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결국 궁극적인 물음은 단순 명쾌해집니다. 목숨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목숨을 기꺼이 걸 수 있는가, 그뿐입니다. 하지만 멈칫합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더니, 목숨까지 걸라고? 그게 어디 쉽나.

그러나 사실 누구나 목숨보다 소중한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생명을 깎아 먹는 줄 알면서도 몸에 좋지 않은 것을 먹고 마십니다. 건강을 상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과로하고 스트레스를 짊어집니다. 목숨은 결국 시간이고 삶입니다. 그런 시간과 삶을 분명 그 무엇인가를 위해 건네주고 있습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람, 명예, 부, 권력 등일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다를 뿐 분명 그 무엇인가를 목숨보다 앞에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면, 영생을 누리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될까? 그것은 각자의 몫일뿐입니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저울질의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된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목숨보다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목숨보다 소중한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보다, 영생보다 소중한 것인가? 쉬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답을 찾아도 살아내긴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이라는 저울이 있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느낄수록 저울의 기울기는 명확해질 것입니다. 다행이라면 이 저울질로 최소한 얄팍한 유혹에 속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럼 달아봅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저울질을 하는 여인」처럼 조심스레, 최후의 심판을 곁에 두고…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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