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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살이를 통해 영성의 시대를 살다다석의 인간관 - “자리 없는 사이.”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3)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12.08 17:11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적인 사유다. 노장 사상(도교), 불교, 유교, 기독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의 삶의 길을 터줄 수 있는가에 다석은 관심을 가졌다. 몸만을 아끼는 삶에는 한계가 있다. 전에는 맘의 차원까지도 강조가 되었다.

몸살이와 먹음(알음알이)

하지만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점차 친구 사이에도 네 것 내 것 없이 같이 어울려 서로 함께 먹고 놀던 풍토도 사라져버려 없다. 그들은 기계(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기계와 함께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 사건들의 경우 많은 부분 아이들이 현실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계화된 마음과 현실에 인간의 양심과 마음씀이 들어설 수 없다.

인간이 몸에만 집착하여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기계에만 빠져든다면 산업적인 구두기(미주 1)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산업적인 구두기에 빠져 몸살이에 사는 사람들은 ‘먹다’라는 낱말을 가장 좋아한다. 사람들이 서로 마음써주는 교류 없이 몸이나 물질 또는 기계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대하다 보니 사용하는 낱말도 인간들 사이의 마음의 교류가 아닌 육체적 차원의 신진대사에서 따온 말들이 주를 이루면서 생겨나는 현상 때문이다. 사람 사이만이라도 사이좋게 사이 나눔을 하여야 한다.

빔 사이, 몸, 물체와 연관지어서는 감각적인 차원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알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몸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개체적이고 구체적인 알음이다. 알음알이를 통해서 알게 되는 알음이다. 여기서는 육체적인 근육이 힘이 크게 작용한다.

맘살이와 삶 앎

다석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뜻과 얼의 차원이다. 몸나의 차원에서 즐겨 쓰는 말이 ‘먹다’이지만 보편적인 표현은 ‘보다’이다. 맘 사이의 보편적인 표현은 ‘알다’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는 것이다. ‘알다’에서 ‘알음’이 나왔다. 모든 알음은 ‘알이’고 모든 ‘알이’는 ‘앓이’다.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몬 사이, 사람 사이, 몸살이, 맘살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알이는 그런 알음알이다. ‘알이’는 무엇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알게 되는 그런 알음이다. ‘알’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알음’이다. 이 알음에서 ‘아름다움’이 나왔다. 몸차원에서 알음이 알음다움[아름다움]이다.

맘의 차원에서 알음이 보편적인 지식으로 확대되어 그것은 앎[지식]이 된다. 몸의 차원에서 생명의 활동이 단순히 육체적인 에너지를 사르는 ‘사름’으로서의 삶이라고 한다면, 맘의 차원에서는 그 삶을 알아 이 앎을 다시 삶에 되먹임하는 그러한 ‘삶을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앎이 지혜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Getty Image

사람은 그러한 삶의 지혜를 갖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앎의 관계를 우리는 착함(선함)이라 표현한다. 착함은 ‘작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작다’는 ‘싹’에서 나왔다. 새싹은 아주 작다. 이 작은 새싹이 착함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석의 우리말 풀이를 계속해보자. 기본 닿소리인 ㄱ, ㄴ, ㄷ, ㄹ는 앞에서 얘기하였다. ㅁ은 모으는 것이다. 모아서 모이면 넘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위나 옆으로 넘친다. ㅁ, ㅂ, ㅍ이 그 현상을 형상화한 글꼴들이다. 넘쳐서 나른 데로 간 것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ㅅ이다. 그것은 다시금 ㅅ, ㅈ, ㅊ로 넓어져 퍼져나간다.

뜻살이와 깨침

뜻으로서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뜻을 읽어내는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뜻을 읽어내려 시도한 책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민족의 뜻을, 더 나아가 ― 다석이 강조하듯이 ― 하느님의 마루 뜻을 읽어내야 한다. 이 마루 뜻이 우리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뜻의 차원은 깨침이고 참 곧 진(眞)이다. 진리로서의 참은 속이 꽉 차 있음을 말한다. 참은 채움이다. 채운 것은 자람이 있어야 한다. 작은 새싹이 돋아나 자라서 자신을 채워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땅에 떨어져 다른 생명을 위한 음식이 되어 자신을 나눠주고 자신을 비워 새로운 생명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속알→싹(솟다)→자라다→채우다→열매→나눔→비움의 우주적 연관관계에서 참다운 이치를 알아볼 수 있다. 인간은 거기서 자신의 본모습과 역할을 배워야 한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속알(우주의 생명력 또는 바탈)을 알아보고 그것을 자라게 하여 꽉 채워 열매로 맺어 내놓아야 한다.

얼살이와 깨달음

얼나의 차원에서는 비우는 것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추는 차원이 더 있다. 하늘과 땅 사이라는 생명의 차원에서 볼 때, 생명의 원칙은 비움과 나눔이다. 생명의 세계는, 하나의 씨앗이 그 껍질[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썩히고 비우고 나누어야 새싹이 돋아난다. 그리고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땅속으로 돌아간다.

생명 자체는 끊임없이 나누고 비우는 나눔과 비움이다. 서양사람들은 생명의 현상에서 비움과 나눔이 아닌,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살육경쟁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똑같은 생명현상에서 적자생존, 자연도태, 우승열패 등으로 설명되는 생존경쟁을 보았고 그것을 모델 삼아 무한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생명관이 다르기에, 세계관이 다르기에 그들이 본 진리와 우리가 본 진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얼의 차원은 깨닫는 것이다. 깨침과 깨달음은 다르다. ‘깨침’은 머리의 차원이다. ‘깨달음’은 머리로 깨친 것을 이제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혼자서만 그 진리를 품어서는 안 되고, 세상에 널리 알려 그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선포하여야 할 사명까지도 있다.

깨달음은 거룩함과 연관되어 있다. 다석은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하느님과 관련지어 말하면서 ‘없이 계심’이 거룩함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비움과 나눔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나누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태극 밖에는 무극이 있고 모든 사이를 가능케 하는 사이로 텅 빔이 있다. 

21세기의 영성적 인간

우주진화의 꽃인 인간 안에는 지난 140억 년의 우주적 영성이 무의식적인 앎의 형태로 녹아 있다. 우주적 진화 속에서의 인류의 발달도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은 인류의 진화의 역사가 그 흔적을 개개인의 몸 속에 남기며 그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어두운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종족발생적 차원의 경험들이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개체의 삶의 과정 속에 개체발생적으로 반복되며 서서히 새로운 경험의 요소와 차원을 넓혀가고 종족발생적으로 이러한 새것들을 유전자 속에 각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종족발생적인 차원에서의 인류의 현 시대적인 시점은 개인의 발달사에서 어느 시점을 나타내고 있을까 한 번 생각해봄 직하다. 주체의 시대인 근대가 그 극에 이르고 이제 주체의 죽음과 해체를 주장하는 탈근대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대를 되돌아볼 때 자기의 뜻과 주장이 확고하여 마음먹은 바를 꼭 관철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불혹의 나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들의 인생관에서 50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적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루어 놓고 시간이 남아돌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이는 아닐까? 그 남아도는 시간을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에, 스포츠에, 소비에,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 찾기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가(자유)시간을 여행에, 다양한 취미생활에, 다양한 문화생활에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음악과 미술과 같은 창의적인 예술활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새로운 형태의 초월을 체험하고 신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세속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이 모든 것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허탈감 속에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재적인 경험이 장래의 어느 시점에 종족발생적으로 인류의 무의식을 각인하여 인류의 미래의 모습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탐욕, 다툼, 경쟁, 지배, 소유, 소비, 소모, 방탕, 후안무치 속에 50대에서 삶을 끝낼 것이라면 지금 이대로 기계화된 마음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도 아마 21세기를 온전하게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천년은 아마도 인간 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인간이 우주진화의 꽃이자 구슬로서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이 그토록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갈구하며 고대했는가 보다.

21세기는 새로운 영성, 정신성, 종교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자세히 고찰해 볼 때, 그것은 우리의 개인 발달적인 삶의 전개하고도 통하는 점이 있다. 우리는 50대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 자신의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우주의 숨은 명을 알아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육체에 묻히거나 가족이나 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거나, 돈이나 이념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고, 나 중심, 민족 중심, 종파 중심, 인간 중심에 빠지지 않고, 욕망을 비우고 맘을 자유롭게 놓아 우주의 얼과 하나되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럴 때 인류가 고대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들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가치들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나이 50은 이렇게 영적인 나인 <얼나>로 깨어나 내 안에 있는 속알[性, 天命]을 깨우쳐 알아 그 바탈을 태우게 되는 나이이다. 나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력제를 찾아다니는 나이여서도, 가족과 가문에 매여 문벌·학벌·재벌의 울타리에 갇혀 명예와 권위에 안주하며 만족해하는 나이여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와 이념의 일면성에 눈이 멀어 자기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정당화 속에서 언어의 놀이에 도취되는 나이이어서도 안 된다.

침묵 속에서 내 안에서 말걸어오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해 우주적 대해탈의 역사에 동참하려는 원대한 꿈을 키워야 할 나이이다. 인류의 나이는 기술문명의 편함에 모든 것이 퇴화되어 버린 그런 무기력한 나이에 고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영적인 <얼나>의 단계로 솟나야 한다. 그럴 경우 우주의 진화는 그 방향을 달리 하게 될 것이며, 이 우주는 인간을 털어내서 인간 없이 그 생성과정을 계속하려 하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천년들을 맞이하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다석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습니까? 똥벌레 같은 인류가 생각[념(念)]으로 사상을 지어내는 점이 동물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나마 고마워해야겠지만 그 사상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 위 신천지(新天地)에서 정의를 기(企)하여야 합니다. .. 우리의 사상은 누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은 신념을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에겐 반드시 관념(觀念)이 있어야 합니다. 몸은 비록 30대까지만 자라지만, 마음은 80, 90세까지 계속 자랍니다. 영원한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관념보다 강한 신념(信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에는 정의나 진리의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신념 시대입니다.”(2)

 

미주

(미주 1)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적 심리발달의 가장 아래 단계로 구두기와 항문기를 꼽는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입 속에 넣어서 입으로 확인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성적 쾌감의 부위가 입에 있다고 해서 구두기라고 표현한다. 그러다가 자라면서 이 쾌감의 부위가 입에서 항문으로 간다고 본다. 배설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배설물을 뭉개면서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에는 성기를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로 넘어간다고 풀이한다. 따라서 산업적 구두기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인간이 가장 어렸던 유아단계로 퇴행해감을 뜻한다.
(미주 2)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795.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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