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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없이!(사 62:10-12; 히 11:32-12:2; 요 1:19-28)대림절 셋째주일(12월1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2.13 16:49

1. 새로운 세상의 시작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곧 딸 시온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이죠? 함께 봉독해 볼까요?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62:11) 이제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며 다시는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사 62:12) 따라서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이하라고 외칩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의롭고도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건설을 위한 찬양입니다. 이것은 시온, 곧 예루살렘의 확실한 안전과 보호에 대한 하나님의 굳은 언약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사야 62장이 속하는 제3 이사야(56-66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사야)는 동시대 예언자였던 학개와 스가랴와는 달리 성전건축에 대하여 비판적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의 시선은 예루살렘 성전을 넘어, 민족을 넘어,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상, 곧 보편적 인류의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사 66:18b)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사 6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방 가운데 특별한 민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대신, 다른 민족들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분을 맡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구약의 이러한 언약이 신약에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새로운 세상이 아기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예비하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예비자에 대한 말씀과 예비하는 일의 어려움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고난과 부끄러움에 관한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2. 예비자 요한

먼저, 신약에 나오는 새로운 세상의 예비자를 만나볼까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요 1:19) 묻는 이야기입니다. 이 물음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 1:26-27)

사실 요한은 자신의 말대로 메시아가 아닙니다. 엘리야도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예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 요한도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20-21)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묻습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 1:22) 그러자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2-23)라고 합니다. 사실 이들을 보낸 이는 ‘바리새인들’(요 1:24)입니다. 율법에 열심히 있는 바리새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요 1:25)

세례는 신약 성경에만 나오는 용어입니다. 물에 몸을 담그거나, 혹은 물로 씻어서 베푸는 거룩한 의식으로, 그 의미는 ‘죄를 씻어줌’, ‘완전히 새롭게 됨’, ‘삶이 온전히 변화됨’ 등입니다. 물론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해졌던 세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 사함의 세례, 혹은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예를 마가복음 말씀에서 찾아볼까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예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5-7)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한의 선포와 세례는 죄의 고백과 회개, 죄 사함의 선포와 변화된 삶의 구체적 증거(눅 3:7-14)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심판과 메시아를 통해 올 하나님 나라를 증거(눅 3:15-17)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요한의 세례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레위인들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가 자신은 예비자일 뿐, 더 크신 분이 오실 것이라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 1:26-27) 병행본문에서 누가복음은 ‘물이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눅 3:16)라고 말합니다. 예비자로서 자신을 겸손히 낮춘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요 1:19-28)에는 병행된 다른 복음서(마 3:1-12; 막 1:2-8; 눅 3:1-17)에는 없는 특별한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볼까요?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요 1:28) 장소로 베다니를 언급합니다. 베다니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무화과(無花果)는 말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꽃이 필 때 꽃받침과 꽃자루가 길쭉한 주머니처럼 굵어지면서 수많은 작은 꽃들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맨 윗부분만 조금 열려 있기 때문에 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무화과나무>

베다니는 신약성서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았던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묵었던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과 헤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리수가 부처와 관련되듯,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과 관련된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베다니의 의미를 통해, 앞으로의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복음서 1장에서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아무튼, 이렇게 준비하고 예비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일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로 사랑과 나눔의 촛불을 밝힙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림 셋째 주 사랑과 나눔의 촛불>

서신서 본문 말씀인 히브리서가 그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야 하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믿음장’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먼저 승리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다 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히 11:32-34)

그리고 고난을 견디는 믿음을 가진 이들을 소개합니다.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이죠? 이 말씀도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오는 식구들을 만난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을 달게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히 11:35-38)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조금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곧, 믿음의 조상들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곧 ‘예비 된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4. 예비된 좋은 것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리고 이것을 히브리서 12장에서 설명해 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a) 즉, 예비 된 더 좋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전함은 바로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40절을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히 11:40) 이해가 되시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들에 의해 믿음의 조상들이 완성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말씀입니다. 함께 통독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우리의 허다한 증인들이 되니, 죄를 벗고, 믿음의 경주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떤 삶인가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b)

약속된 것, 곧 온전함을 위해 지금의 고난, 곧 십자가를 참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본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당시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갈 3:13)이기에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기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 오히려 당당한 것입니다. 진리의 편에 섰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당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와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5.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의미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잘못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끄러움의 상실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실 부끄러움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부끄러움은 ‘양심에 거리끼어 떳떳하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수줍다’라는 말에 나타나듯, 천성적으로 남 앞에 드러나기를 수줍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부끄러움의 의미가 아니라, 첫 번째 의미의 부끄러움을 상실한 시대가 오늘 우리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三樂)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俱存 兄弟無故). 둘째,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요(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 而敎育之)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 번째 ‘앙부괴어천 부불작어인’은 운동주 시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는 시구절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정말 뻔뻔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어서,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헛된 공약만 늘어놓은 정치인들과 탈세전문 기업인들, 팩트에 근거하지 않는 가짜뉴스를 양산 기자들과 삶과 설교가 일치되지 않는 거짓말쟁이 설교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2013)은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진정성을 잃어버리고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1970년대 서울에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부끄러움의 의미를 조명한 소설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세 번째 결혼을 한 후, 고향인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된 주인공 ‘나’는 분주한 서울 생활에서 마음의 피로를 느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각박한 삶, 세 번에 걸친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동창생들과 함께 친구 경희의 집을 찾은 ‘나’는 화려한 세간과 세련된 동창생의 모습에 담긴 가식과 속물적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 학원에 다니던 ‘나’는 어느 날, 한국인 안내원이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에제 ‘나’는 모처럼 돌아온 부끄러움의 감정에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그 감정이 자신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을 살며, 세상만을 바라보고 부끄러움 없이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을 선택하시고, 이제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그 길을 이미 세례 요한이 예비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히 12:2a)’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구원의 완성은 물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끄러움 없이 정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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