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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 부르신 이유”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2.30 18:01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한복음 5:15~21/새번역)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 익숙한 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일은 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베데스다 못 곁에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에서 소동은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고쳐주셨다고 박해했고(15,16절), 그에 대한 주님의 해명에 죽이려는 분노로까지 치닫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17) 유대인들은 이 대답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긴다며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습니다.

▲ Marc Janssens,「Untitled」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이유를 설명해주셨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 ”

아버지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동등하게 여긴 불경이기보다 절대적 순종과 사랑으로 보입니다. 단지 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는 삶의 고백입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매 순간 하나님 뜻에 귀 기울여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사랑하시듯 할 일을 다 보여주시니, 아들이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종하듯 그대로 행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니 권력과 명예를 누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존재론적이고 교리적인 해명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에 억압당하는 약자들을 해방시키려는 사랑에 찬 저항의 이름이 아닙니까.

대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것이 익숙합니다. 물론 여성신학 등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문제제기이고, 그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나님 아버지냐, 하나님 어머니냐? 아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신비는 이름에 갇힐 수 없으니 다 은유요, 비유로 상대화할 수밖에 없다? 보통은 별 생각 없이 자기 전통의 관습대로 부르고, 자기 전통의 논리대로 다른 호칭을 비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이름을 찾는 일은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지닌 의미체계 안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라 부르던, 그 안에 담으려는 뜻이 사랑과 순종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살해의 위협을 당해도 굽히지 않으신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저항하며 약자와 소외된 자를 끌어안는 사랑의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 보여주시는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려는 결단의 호칭, 자신의 존재 전부를 담은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친밀함과 절대적 은총으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너무나 중요한 맥락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Marc Janssens의 작품 「Untitled」은 날개와 지팡이가 오히려 사람과 삶을 가두고 옥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기도하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작용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과 순종, 해방과 저항의 맥락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적절한 호칭이어도 덫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살해의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은가에 민감한 만큼, 그 이름을 통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순종하는지에도 깨어있어야겠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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