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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으나!(삼하 12:1-13; 행 3:11-21; 요 18:12-18, 25-27)사순절 둘째주일(3월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3.06 17:47

1.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살펴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말씀드렸죠? 그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천지와 JMS(정명석), 전광훈 같은 사이비 이단과 광신도들도 역시 그들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반드시 멸하실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룟 유다와 비슷하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에 넘어지고 실수하고 배신하고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한 인생의 길이 결국 가룟 유다의 길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의 길로 끝날 것인가는 오늘 우리들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으나, 오늘 세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와 다윗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먼저 신약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사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요 18:12-14)

신약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인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이후에도 유대 종교와 정치에 있어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그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됩니다. 이들은 주로 유대지역의 부유한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사두개파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결국 안나스의 가족들은 유대 종교를 타락시키고,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또한 18년간의 긴 가야바의 집권(주후 18년부터 36년) 기간으로 보아, 가야바가 로마 당국에 아부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 이후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들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 근처에 있던 안나스의 거처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안나스는 예수님께 제자들과 예수님의 교훈, 곧 가르침에 관해 물어본 뒤,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사위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냅니다(요 18:19-24). 오늘 본문에서 가야바가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었는데, 이것은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로 보내집니다(요 18:28).

<안나스 앞의 예수>

이렇게 스승이 붙잡혀 갈 때, 수제자인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릴 정도였습니다(요 18;10). 그러나 예수께서 끌려가신 후에는 몰래 따라갑니다. 본문을 계속 볼까요?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5-18)

마음이 짠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고 불을 쬐는 베드로의 모습에, 비록 날만 추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음도 추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스승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묻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요 18:25-27a)

3년을 따라다닌 예수님,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불렀을 때, 인생의 모든 문제에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따랐던 예수님!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 때문에 베드로 자신이 위험해졌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을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 18:27b).”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아마도 이 닭 울음소리는 평생 베드로의 귓가를 울렸을 것입니다.

2. 닭 울음소리와 양의 침묵

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1991)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다룬 현대 영화의 고전이죠. 조디 포스터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통해 더욱 유명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FBI 요원 스탈링(조디 포스터 분)은 몸집이 비대한 여자들의 살을 도려내는 변태살인자를 추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탈링은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인육을 먹은 죄로 감옥에 수감된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 분)를 찾아갑니다. 잔인한 지능범인 렉터와 스탈링은 긴장감 속에서 침착하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

이들이 추적하는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테드 레빈 분)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여 등피부만 벗긴 후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 피부를 옷처럼 만들어 자신이 직접 입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즉, 그는 여성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렉터 박사의 말에 의하면, 버팔로 빌은 사회가 낳은 괴물입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원했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자 빌은 여성이 되고 싶었고, 여성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살을 벗겨내 자신의 옷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렉터는 스탈링에게 그녀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렉터에게 말한 스탈링의 과거는 이렇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도 잃습니다. 이후 친척 농장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삼촌이 양을 도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스탈링은 양을 한 마리라도 살릴 요량으로 양 한 마리를 들고 집을 뛰쳐나왔지만 결국 그 양조차 죽고 맙니다.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는커녕, 양 한 마리조차 지키기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탈링의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을 렉터는 꿰뚫어 보았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빌을 잡은 스탈링에게 전화를 건 렉터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양의 울음소리는 그쳤는가?”

베드로에게 닭 울음소리는 그쳤을까요? 스승을 지키지 못했던 그 트라우마가 사라졌을까요? 요한복음 21장에 디베랴 호수(갈릴리 바다, 혹은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합니다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6,17)”라고 세 번을 묻습니다. ‘사랑’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분석하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물음을 해석하지만(예수님은 처음 두 번은 신적 사랑인 ‘아가페’로 물어보셨고, 세 번째는 우정인 ‘필리아’로 물어보신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리아’의 사랑으로 답한다고),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반복된 질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세 번을 대답하죠?(요 21:15,16,17) 그 이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 21:19c)”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트라우마는 세 번의 ‘사랑 고백’을 통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신적 사랑’인 아가페이든, ‘우정’으로 불리는 필리아의 사랑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기본 정신에는 자기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제는 베드로에게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닭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은 베드로는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요? 사도행전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 나아가 ‘복음의 증인’으로 담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3. 복음의 증인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일어난 베드로의 첫 번째 이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만드는 이적을 행합니다(행 3:1-10).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와 요한은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관해 증거 합니다. 본문을 볼까요?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1-15)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대제사장이 두려워 그들의 종들에게도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그 사건에 관해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복음의 증인인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에 이제 더 이상 닭 울음소리와 같은 트라우마는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 새롭게 된 사람,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볼까요?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6-19)

그렇습니다. 대제사장이자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안나스와 가야바의 꼬임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드로는 담대하게 외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의 은혜를 입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이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더 잘된 번역 같습니다. 신천지와 전광훈이라는 이단과 광신자들에게 빠진 영혼도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면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0-21)

말씀이 어렵습니다. 공동번역은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때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곧 그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때가 오기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예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때까지 하늘에 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회개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러했으며, 구약에 나오는 다윗이 그렇습니다. 그럼 다윗 왕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말씀을 볼까요?

4.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으나

본문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범죄를 엄중히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단에게 호된 질책을 받은 다윗이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수용하여,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말씀이 쉽기에 본문을 같이 보겠습니다. 먼저 나단은 다윗에게 비유를 들어, 한 예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삼하 12:1-6)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다윗이 정의롭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제 반전이 시작됩니다.

▲ 제이컵 베이커, <나단과 다윗>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 12:7-9)

보통 사람 같아도, 자신을 질책하는 이러한 말이 듣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입니다. 당장 나단 선지자를 칼로 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냥 듣고 있습니다. 나단은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재앙을 퍼 붓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보기에 악을 행한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 12:10-12)

5.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요

상당한 저주입니다.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보기에 악을 행하면 이렇게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물론 이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도 그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범죄한 다윗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이며,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엡 2:2). 따라서 죄의 종이었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a).” 이것을 바울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엡 2:5b)’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이끄는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시맨즈의 『치유하시는 은혜』 (두란노, 2013)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시맨즈는 ‘종(slave)’과 ‘자녀’의 차이를 여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종은 수용과 가치인정의 근거가 행위에 있지만, 자녀는 신분에 있다.
둘째, 주인이 진정 나의 일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 근심하면서 종은 하루를 불안과 염려로 시작 하 지만, 자녀는 가정의 안전한 사랑 속에서 쉼을 누린다.
셋째, 종은 일솜씨 때문에 받아들여지지만, 자녀는 관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넷째, 종의 소속은 능력과 행위에 달려있지만, 자녀의 소속은 한 사람으로서의 신분 자체에 달려 있다.
다섯째, 하루를 마칠 때 종은 자기의 일로 가치를 입증해보였다는 확신이 설 때에만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자녀는 하루 종일 안전하며 일이 자신의 신분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여섯째, 종은 일을 잘못하면 자리가 위태해진다. 실직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는 실수를 하게 되면 부모를 속상하게 해드렸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고 또 꾸중을 듣고 훈계를 받을 수는 있으나,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자녀는 가족의 일부로 소속이 되어있고 또 사랑을 받는 존재이므로 근본적으로 당당하며, 행위가 그의 신분을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날은, 비록 우리가 연약한 인생의 길에서 때로는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겠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되는 날, 곧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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