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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망치는 몇 가지 사회악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창 12:1-4; 롬 4:13-17; 요 3:1-8)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3.10 16:21

< 1 >

어느 날 밤에, 바리새파 사람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그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을 보았거나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요 3,2).

요한은 니고데모라고 불리는 인물이 누구인지, 왜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가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세 번 등장하기 때문에, 존 스퐁 같은 성공회 신학자는 니고데모를 역사상 실존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유대교를 대변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지도자인 니고데모를 등장시킴으로써, 유대교와 초대 그리스도교 사이의 긴장, 회당과 교회 사이의 대화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니고데모는 ‘회당 안에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마지막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유대인들’, 심지어 회당의 지도자들을 상징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한낮이 아니라 밤에 찾아왔고(요 3,2),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요 3,11) 요한은 말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니고데모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거나, 그의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옹호한 사건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니고데모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라고 핀잔을 합니다(요 7,50-51).

그리고 마지막 등장,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모셨을 때,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 유대인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는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요 19,39-40).

이로써 우리는 요한복음이 니고데모를 유대교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바리새파 사람, 국사(國師)로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동시에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Crijn Hendricksz(1616&#8211;1645), 「Jesus and Nicodemus」 ⓒWikipedia

니고데모는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무언가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리새파 사람이자 유대인 지도자로서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단지 존경을 표했을 뿐, 사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태어남’(중생, born again), 혹은 ‘새롭게 태어남’(born anew)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정한 신앙인’과 ‘거짓 신앙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극적인 회심체험이나 방언 체험을 중생의 증거로 보면서, 그런 체험이 없는 사람은 마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앙을 왜곡하는 행위이자, 바람 같은 성령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적을 배제하지 않지만, 이적만이 신앙을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생기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힘이나 잠재력으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남’이라는 말이 ‘위로부터 태어남’(born from above)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새로 태어남’,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이라는 말로 ‘삶의 새로운 차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지, ‘새로운 종교적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듭남 이전의 삶은 죄로 가득 찬, 세속적이며 비천한 삶이고, 거듭남 이후의 삶은 고귀하고 경건한 삶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위로부터 태어남’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인간성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통찰력, 새로운 의식, 하나님의 품성에 연결되는 새로운 길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바로 이 새로운 길, 유대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율법중심의 문자주의로는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율법중심의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기존의 문자주의적(형식주의적) 세계인식에 아직 사로잡혀 있는 인물입니다.

율법중심의 문자주의, 이것은 단지 유대교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어떤 교리든지, 혹은 신념이든지, 윤리적 가르침이든지 그것을 절대화하여,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의 차원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빛에서 자기 삶과 세계를 보지 않으면, 오직 ‘아래로부터,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율법중심의 문자주의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다’는 말씀은 오랫동안 세례와 동일시되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물로 태어나다’(born of water)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양수로부터 이 세상의 생명 속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미국 성공회 주교인 존 스퐁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됨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차원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사실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은 바람과 같아서,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요 3,8). 성령은 주님께서 주시고 싶은 사람에게 주시고, 주시고 싶은 방식대로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하기에, 우리는 다만 성령을 그 때 그 때마다 은혜로 받는 것이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요한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그리스도교 세례와 연관시켜 주장한 것이라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특별한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죄의 용서’와 ‘육체적 삶’의 긍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우리가 육체와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그런 신적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과 함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치고, 상처받고 병들고 마침내 소멸할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지상의 육체적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세례와 함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런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보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에게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자유에 맡기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니고데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요? 니고데모는 유대교, 율법중심주의라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온갖 종교적 경계선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있지만, 결코 기존의 것, 기득권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 아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상을 대표합니다. 니고데모는 빛이신 예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삶으로 들어가지 않고, 무덤에서 멈추고 맙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미래에 과감하게 발을 내딛지 못하고, 안전한 현재, 유대교 기득권 안에 어정쩡히 머무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지식인의 중산층 교양정도로 생각하는 이른바 착하고 리버럴한(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 신앙을 문자적으로 강요하는 이른바 근본주의적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인간상이지요.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열린 새로운 세계에 과감하게 자신을 던지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분명하고 견고한 율법적 세계의 안락함에서 불안한 해방의 미래에로 나가지 않는 전통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바로 이 경계선들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도록 이끄는 비전보다, 이미 알고 있는 안전한 어둠을 선호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심판도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심판은 인간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빛보다 어둠을 선호하는 것이고, 자유보다 안전을 선택하는 것이며, 현실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 3,18).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 3,19)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 2 >

니고데모가 옛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로 과감하게 나가지 못하는, 율법과 전통에 사로잡힌 바리새파 사람,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전형이라면, 아브라함은 그 반대 유형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을 때,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어난 고향, 살고 있는 하란 땅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길을 떠난 인물입니다(창 12,1-4). 그 땅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생긴 땅인지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이 언제나 빛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짙은 어둠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후에, 가뭄이 들자 그는 재빨리 그 곳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그렇게 일찍 떠나는 것은 그의 불신앙의 표징입니다. 그는 의심이 많고 하나님의 약속을 회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자기 아내를 왕에게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면서 가슴만 태우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이상적인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웅의 모습도 성자의 모습도 우리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내 사라와 이집트 사람 여종 하갈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하거나 화해시키지 않고 그저 무력하게 지켜본 것도 아브라함입니다(창 16,4-6).

그런데 왜 인류의 3대 종교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고백하는 것일까요? 그의 인격의 비밀은 그의 경건한 삶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비난받지 않을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또 그가 종교적인 영웅이나 초인으로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능가했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인격의 비밀은 그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결단했다는데 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주저주저하면서 어정쩡하게 현실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코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계,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신앙인의 전형을 봅니다(롬 4,4). 특별히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할례를 중심으로 갈등이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할례를 강요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유대 율법과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은 다만 죄를 알게 하고 진노를 불러오는 기능을 할 뿐, 그것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롬 4,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로써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았지만,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롬 4,17)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던 것입니다(롬 4,18).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는 사람’입니다.

< 3 >

‘코로나 바이러스 19’ 감염병의 세계적 확산과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심상치 않습니다. 가까운 시기 안에 이 사태가 진정되고, 우리나라와 지구촌에서 이 신종 바이러스가 사라지리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라들 사이의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혐오와 배제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계속되면, 바이러스 감염병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 영향으로 흔들리는 경제, 사회적 불안감과 불신이 우리에게 더 심각한 타격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언젠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19’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알겠습니까? 새로 변종된 ‘코로나 20, 21’ 등이 언제 또 다시 나타날지. 우리가 진정으로 이번 사태에서 무엇인가 깨닫고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병이 몰아쳐올 때마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기후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번 바이러스 사태도 우리 인간 자신이 자초한 인재(人災)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르게 관리하지 못한 죄, 우리 욕망을 채우려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하고, 수탈한 죄의 결과이지요.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행태를 회개하고 반성하기는커녕, 감염병 사태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온갖 가짜뉴스를 생산해내고, 집단지성으로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집단광기로 위기를 더 극대화시키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 이단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목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원인은 중국정부가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목사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세균이 한국을 강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고 설교시간에 말했다고 합니다.

서울시가 ‘코로나 19’ 확산을 막기 위해 광화문 광장과 서울광장 등에서의 집회를 당분간 금지했으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혼난다’고 발언해 문제를 야기했던 목사는 광화문 광장 집회를 강행, “예배에 참여하면 걸렸던 병도 낫는다. 우리는 병 걸려 죽어도 괜찮아, 하늘나라가 확보된 사람이다.”고 황당한 주장을 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또 다른 목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한 폐렴은 떠나갈지어다!” 하고 외치자, 참석자들이 큰 소리로 “아멘”하면서 환호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이것이 한국교회 수준이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싸잡아 기독교를 비웃을 터이니, 차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1925년 당시 56세의 나이에 ‘청년인도’라는 신문에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8가지 사회악’이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인격 없는 교육, 노동 없는 부, 윤리 없는 쾌락, 인간성 없는 과학, 헌신 없는 종교, 책임 없는 권리가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몇 개의 사회악이 지금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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