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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몰락?(삼하 17:1-17; 계 19:11-16; 요 19:17-22)종려주일(4월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4.03 17:20

원래 구약 본문은 삼하 7:1-17입니다. 다윗의 씨를 통해 성전을 건축하고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 나귀탄 예수님을 다윗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죽임당하지만 계시록 말씀을 통해 궁극적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으로 맥을 잡았습니다.

1. “나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수난당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날입니다. 이때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Hosanna)라는 말은 시편 118장 25절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곧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렸던 것입니다. 사실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입성에 비하면,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했으며 그 모습을 환영했다기보다는 조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나오죠? 유대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 유대인이 유대인들을 위해, 한 유대인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마 1:1)’라고 자신의 복음서 첫 머리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행보와 달랐습니다. 골리앗 같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지도 못했고, 오히려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의 예수전』 (통나무, 2020)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고백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예수입니다. 나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북부, 갈릴리 지역의 한 작은 읍촌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올의 예수전에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곳에 가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약 성서 제일 처음부분인 마태복음 1장 1절을 뒤집는 선언입니다. 도올 선생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길 원했던 것은 예수님이 숨지고 난 40년 뒤, 곧 로마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베들레헴 출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메시아’가 필요했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유대민족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다윗의 혈통을 이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은 태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입니다. 마가나 누가가 그렇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갈릴리 사람들에게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방이었던 갈릴리는 유대 민족주의인 시오니즘(Zionism)이 뿌리 내리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도올의 예수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갈릴리 불가촉천민들의 친구입니다.” 나아가 마가복음의 예수를 중심으로 예수전을 쓴 도올 선생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의 신은 ‘야훼’가 아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야훼’는 본래 광야의 신이었으나, 유대인이 가나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죽고 죽이는 적대적 악순환에 빠져들자, 성전에 갇혔다. 신의 이름은 성전의 위계를 지배하는 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오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야훼’는 배타적인 질투의 신이지만, 예수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민중의 고통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하나님이다. 민중에겐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다.”

도올의 예수전에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민족의 신, 종족의 신 야훼가 아닙니다. 아(我)를 구하기 위해 타(他)를 몰살시키는 대립과 저주와 살육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아와 타를 함께 구원하는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아’는 나를 뜻하고 ‘타’는 너, 혹은 이웃을 말하죠? 또한 도올은 하나님은 결코 성전에 계시지 않다고 말하며 이렇게 보충합니다.

“건축에 86년 걸린, 권위의 상징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며 뒤집은 삼십대 청년 예수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십자가에 못 박히며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고독 속에서 숨졌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에게 세속적 욕망을 투영해, 그를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해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모퉁이마다 십자가가 선 이 땅에서도 예수는 세속적 욕망의 투영 속에서 고독하다.”

2. 왕의 굴욕,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란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구약은 다윗 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몰락의 시작은 다윗의 아들들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이 무려 열아홉 명이나 됩니다. 따라서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심각하게 벌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이자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의 아들 암논이, 다윗의 셋째 아들이자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겁탈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삼하 13:1-22). 이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게 됩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압살롬은 배다른 형, 암논을 포함한 여러 형제들을 에브라임 근처 바알 하초르에서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부하를 시켜 술에 취한 암논을 살해합니다. 이 일이 다윗 왕에게 알려지자, 압살롬은 외할아버지 달매에게 도망가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살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삼하 13:23-39). 그러나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이 압살롬을 반대했고, 다윗도 압살롬을 보지 않았습니다(삼하 14:24).

따라서 분노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고(삼하 14:30), 반란을 준비합니다. 먼저 압살롬은 자기가 탈 병거와 말들을 마련하고 자기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50명이나 거느리고, 매일 아침 예루살렘 성문으로 오는 사람들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 압살롬은 다윗의 허락을 받고 헤브론으로 가서,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읍니다. 그 가운데 다윗의 고문인 아히도벨도 압살롬은 사람을 보내 불러냅니다(삼하 15:1-12). 이렇게 아버지 다윗에 대한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에게 제갈공명과 방통이라는 지략가가 있듯이, 또한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에게 장량과 한신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듯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당대의 두 지략가 ‘아히도벨’과 ‘후새’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식탁을 같이 할 정도로 신뢰했던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붙어, 반정을 꾸몄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아히도벨의 입장에서 보면, 말년의 다윗 왕이 왕답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불의를 보고, 아히도벨은 이스라엘의 미래는 떠오르는 왕자, 압살롬에게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왕좌에 앉히고, 자신은 킹메이커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지지 세력들의 추대로 왕이 된 압살롬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삼하 17:15).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 아들과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언약궤만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광야 길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의 벗이자, 아렉 출신 후새가 압살롬을 교란시키기 위해 예루살렘 도성으로 돌아갔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삼하 15:24-27). 오늘 구약 본문은 예루살렘 도성에서 벌어진 압살롬과 참모들의 회의입니다. 이 회의에 아히도벨도 있었고, 후새도 있었습니다. 회의의 내용은 다윗을 어떻게 제거할까 입니다. 말씀을 함께 볼까요?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삼하 17: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친구 후새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계획을 꺾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삼하 17:5-6)” 이제 후새는 다윗을 구하기 위한 계략을 말합니다. 물론 압살롬은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삼하 17:7-10)

지금 다윗을 쫓아가 만약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운을 띄우고, 후새는 다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계략을 말합니다. 물론 압살롬은 후새의 속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삼하 17:11-13)

그러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삼하 17:14a)”, 결국 이것은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삼하 17:14b)”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후새는 다윗 왕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다 준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에 후새가 (다윗 편인)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합쳐져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있는 샘)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삼하 17:15-17)

이렇게 목숨을 건진 다윗은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후새의 말을 듣고 다윗왕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다 주었기 때문에, 아히도벨은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삼하 17:23)”지내게 됩니다.

<압살롬을 떠나는 아히도벨>

3. 왕의 못 박힘, 왕의 굴욕

이렇게 다윗 왕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시는가요? ‘인간미?’, ‘자식교육을 잘 시켜야 된다?’, ‘다윗이 신하를 잘 두었다?’ ‘만약 아히도벨의 계략이 성공했으면 오늘날 다윗은 없었다?’ 제가 볼 때, 말년의 다윗 왕은 참 보잘 것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혔고, 아들의 반란에 줄행랑을 치고, 자신의 범죄로 인해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았고(대상 21:11-14), 또한 간신히 신하의 도움으로 왕좌를 지켰던 운이 좋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다윗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아니 다르게 해석됩니다. 이것이 역사적 관점의 차이죠? 우리가 성경공부 때, 신명기 사가와 역대기 사가의 핵심적인 차이를 공부했는데, 바로 다윗에 관한 해석의 차이였죠?

아시다시피, 구약성서 안에는 ‘신명기 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있고, ‘역대기 역사서(Chronicler’s History)’로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의 최종적인 형태는 바벨론 포로기 때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그들의 역사를 재정리하게 됩니다. 이들은 질문을 합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으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면, 지금 그 땅에서 쫓겨나야만 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창조주인가? 아니면 바벨론의 마르둑 신이 더 위대한 하나님인가?”, “여호와 하나님과 마르둑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은 죽었는가?”, “정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신명기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오.”

그렇다면 포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명기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이 화를 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잠시 동안 바벨론으로 쫓아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 올 것이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관점이 잘 반영된 것이 사사기와 열왕기서입니다.

사사기는 원래 사사들의 행적에 관한 고대 전승에, 신명기 역사가가 재편집하면서, ‘배신-징벌-회개-구원’의 도식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열왕기서 역시 역대 왕들의 평가 기준에, 신명기 역사서의 관점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시내산 계약’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시내산 계약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게 됩니다.

다윗 왕에 대한 평가도 이러한 가치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우리아에 대한 이야기와 12장에 이어지는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위대한 왕 다윗도 ‘배신-징벌-회개-구원’의 도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신명기 역사가의 입장인 것입니다. 즉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야훼 종교에서 멀어지는 솔로몬의 악행(왕상 11:1-3)을 신명기 사가는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려고 기록한 것이기에, 역사적 관점이 좀 다릅니다. 따라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전한 ‘성전예배를 드리는 신정사회’와 ‘이상적인 왕국의 건설’, 곧 ‘다윗 왕조 선택 사상’을 위하여 역사를 재해석합니다. 그들은 다윗 왕조를 야훼가 다스리는 왕조라고 높이 평가하며, 예루살렘성전 제의를 유일하고 합법적인 예배라고 표현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물론이고, 솔로몬조차 이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째로 자신의 기록에서 삭제합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북왕국의 왕들의 역사가 역대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도 삭제되었고, 솔로몬 왕의 경우, 지혜의 왕으로 찬양하며 그의 범죄는 다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경건한 성전 건축가요, 현명한 통치자라는 인상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여망은 예수님 당시에도, 또 예수님 죽음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여망의 변질입니다. 당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 세속적 욕망을 투영해, 예수님을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또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 마다 십자가가 들어 선, 이 땅에서도 예수님은 세속적 욕망의 투영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 말씀은 다윗처럼 도와줄 후새라는 참모도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힘없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의 몰락’이 아니라, ‘왕의 못 박힘’, 곧 ‘왕의 굴욕’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7-18)

그리고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 19:19).” 보잘 것 없는 왕의 몰락, 아니 십자가에 못 박힘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그 왕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 19:20-22)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

4. 왕의 승리, 공의로 심판하다!

예수는 이렇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의 백성에게는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조롱받고, 버림받았으며, 로마 제국에 의해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란자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예수의 부활’과 또한 교회의 역사는 ‘예수의 다시 오심’을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이죠?

계시록은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라고 하는데, ‘칼립토(숨기다, 두껑을 닫다, 가리다)’라는 말과 ‘아포(~로부터 분리하다)’라는 접두어가 결합된 말로, “두껑을 열고 숨긴 것이 드러나고, 가리워진 것을 치우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파국과 종말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또 조직신학에서도 제일 뒤에 배치됩니다. 그런데,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자신의 종말론에서, 종말의 내용을 기존의 ‘죽음, 심판, 공포, 두려움’ 대신, 신앙의 본질인 희망을 발견하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종말론인 요한계시록은 몰트만에 의하면, 오시는 하나님을 희망 속에서 기대하는 말씀이 됩니다.

아무튼 요한계시록을 보면,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특히 말이 많이 나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새로 출시되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말은 값비싸고, 소중한 동물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보스는 ‘말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다(필레오)’와 ‘말(입포스)’의 결합입니다. 바울의 편지 빌립보서에 나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빌립보는 빌립보스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동물들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옵니다. 사자(레온), 송아지(모스코스), 독수리(아에토스)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생물(ζῷον, 조온)이라 불리고(계 4:7), 사자, 표범(파르달리스), 곰(아르코스) 등이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짐승(θηρίον, 테리온)으로 불리게 됩니다(계 13:1-2).  조온, 곧 생물이라 부를 때는 생명력이라는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며, 테리온, 곧 짐승이라 부를 때는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어떤 때 동물들을 짐승으로 부를까요? 구약의 묵시록 다니엘서 7장을 보면, 사자와 곰, 표범, 그리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쇠 이빨과 뿔이 열 개 달린 동물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짐승, 곧 테리온입니다. 그리고 이 짐승의 정체를 다니엘 7장 17절은 이렇게 소개해줍니다. “그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라.” 그리고 여기서 짐승인 왕은 특정한 영역에 대한 통치와 지배를 갖고 있기에, 국가와 동일시됩니다(단 7:23). 곧 바벨론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을 뜻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당시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안 황제(Domitian, 81-96)와 로마 제국을 뜻합니다. 로마의 11대 황제(가이사)이자, 가장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했던 황제입니다. 처음에 도미티안은 로마의 전통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따라서 로마 시민들로 하여금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게 했습니다. 주피터, 헤라, 아폴론, 비너스 등등.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마침내 도미티안은 자신을 ‘신들의 신’, 혹은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선포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합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한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 흉상>

특히 로마는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방편으로 황제 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시 전역에 금과 은으로 토미티안 황제의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1년에 한 번씩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도록 지시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 기념 주화>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황제 숭배와 황제를 주(主)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로마제국과 황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요한이 보기에, 백성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왕이 아니라, 짓밟고 부서뜨리며 압제하는 왕은 짐승에 불가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짐승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서의 ‘천년왕국’과 그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짐승을 멸망시키는 ‘백마를 탄 자’에 관해 소개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뜻합니다(신천지는 이만희가 백마를 탔기 때문에 그를 구세주로 믿습니다만). 말씀을 볼까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백마를 탄 자의 이름이 충신(πιστός)과 진실(ἀληθινός)이라고 합니다. ‘신실하고 참된 자’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아멘(אָמֵן)’을 번역한 것이죠. 곧 신실하고 참된 자, 아멘이신 자가 불의한 제국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백마를 탄 자가 불의한 제국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2-16)

여기서 불꽃같은 눈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과 통찰력을 표현합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릅니다. 또한 포도주 틀을 밟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따라서 왕의 몰락으로 보였으나, 이제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신실함과 진리로 심판하러 오시는 분, 그리스도 예수님을 요한은 이렇게 환상 가운데 보았고 그것을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섭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셨고, 갈릴리 민중들과 고통을 함께 받으셨으며, 마침내 우리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옮음과 진리를 위해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상징적인 이미지가 바로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백마를 탄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고 외쳤던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과 같은 왕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 혹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 고통 받는 이들, 현재 핍박받는 이들, 지금 눈물을 흘리는 이들, 코로나-19로 인해 죽어가는 이들, 그리고 아픔을 함께 하고 소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들 모두를 위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도미티안 황제와 같이 제국의 권력으로 힘없는 이들을 짓누르는 짐승 같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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