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씨를 심어 나무를 가꾸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꽃과 열매입니다. 그에게 씨앗의 완성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사람이 자기 목적을 위해 가꿀 때는 그렇지만, 자연은 달라 보입니다. 열매는 사실 씨를 품고 나무와 숲이 되려고 익어갑니다. 씨앗이 결국 열매를 맺지만, 열매는 결국 씨앗을 낳습니다. 숲이 열매를 맺지만, 열매는 숲이 되려고 떨어집니다.

▲ Mike Torevell,「Road To Emmaus」

예수님 가신 십자가의 길은 부활을 열매 맺었습니다.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에 이르면 하나의 완성을 이룬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 암시하는 부활은 완결이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다시 갈릴리로 향하는 시작이자 초대였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과 부활은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로 부르시는 초대였습니다. 빈 무덤과 십자가는 그러므로 부활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길를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열매에서 씨앗이 시작되듯, 부활이라는 열매는 다시 십자가라는 씨앗을 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때문에 제자들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주님을 따르면 결국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 두 제자만이 아니라 나머지 열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제자가 먼저 청을 넣어 약속을 받았다고 분히 여깁니다(24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으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종이 되는 길로 초대하십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길이자, 많은 이의 몸값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은 면제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 곧 제자의 길은 대속의 길이자 씨앗의 길입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자칫 구원을 일종의 거래로 착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핏값을 치러야만 용서해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또한 주님의 대속을 완불과 면제로 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부활이 모두를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는 이정표라면, 대속은 어떻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대속 역시 초대입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겨주셔서 섬기는 길로 부르시듯, 목숨을 몸값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의 길로 부르신 것입니다. 대속 받아 대속하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무고함에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대속은 살림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이웃의 고통과 사회의 죄를 자기 십자가로 지는 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누군가의 고통이 실은 우리 모두의 십자가요, 자기 십자가임을 선연히 보여줬습니다. 대속의 삶이 실은 우리 모두에게 요청됨을 보여줬습니다. 이웃을 위해 고독에 머물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소비를 줄이며, 환경을 살립니다. 이 모든 자기 비움이 실은 모두를 살리는 대속의 일상입니다.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사건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그러나 비통하고 억울한 그 죽음에서 배우고 또 배울 수 있습니다. 정치, 사회, 종교의 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이 오늘을 살리는 대속적 죽음으로 새로워집니다. 세월호나 메르스 사건을 통해 배우고 변화한 결과가 코로나 19 펜데믹을 맞은 지금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 억울한 죽음에서 배웠기 때문에 오늘 누군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무고함에도 자신을 내어주는 대속은 억울한 죽음에 새 의미를 불어넣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의미는 늘 변화에 열려있습니다. 억울한 죽음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오늘을 살리는 대속적 죽음으로 되살릴 수는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대하던 잔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대속 받아 대속하는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실 때, 드디어 구원을 누립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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