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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정치와 자유의 정치 - 모세 이야기 (2)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11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6.16 17:06

사도 바울의 모세 이해

바울은 오직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에서만 모세를 언급하는데, 고린도후서 3장 7절부터 18절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과 ‘영의 직분’, ‘의를 베푸는 직분’을 나누고, 전자를 모세의 직분으로, 후자를 그리스도의 직분으로 규정합니다. 돌 판에 새긴 율법을 선포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지만, 그 광체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은 돌 판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이고, 그 광채는 길이 남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모세의 옛 언약이 문자라면 새 언약은 영으로 된 것이고,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고후 3,15-18). 사도 바울에게 모세는 옛 언약의 대변자이며 율법의 대변자이지, 영이신 그리스도의 자유의 대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모세 이해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를 전승하는 마태는 예수님을 제2의 모세 혹은 새로운 모세, 더 나은 율법의 수여자로 이해합니다. 요한도 모세를 예수님과 여러 가지 형태로 병치시키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모세를 능가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요한은 모세를 율법의 전승자로 이해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것입니다(요 1,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 3,14). 그러나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 6,32)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두고 썼다는 것입니다(요 5,46).

히브리서의 모세 이해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 안에서 모세의 여러 가지 위상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는 하지만, 유대교를 그리스도교와의 비교에서 언제나 낮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오직 한 곳에서만 모세를 높이 평가하는데, 히브리서 11장 23절부터 28절까지가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떨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는데, ‘떨기’(히브리어, 스네)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출 3,1-6). 도대체 ‘떨기’는 무엇일까요?

천주교 ‘성경’과 개신교 ‘표준새번역’은 이 나무를 ‘떨기나무’로 번역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떨기나무’ 항목을 보면, 이 낱말은 ‘관목’(灌木)을 의미하고, 한자어 관목을 순우리말 ‘떨기나무’로 순화한다고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영어와 불어 번역본도 이 낱말을 ‘관목’(bush, buisson)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독일어 역본들은 한결같이 ‘가시덤불’(Dornbusch) 또는 가시떨기로 옮기면서 ‘가시’를 살려 번역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가시나무’는 무슨 의미를 가졌을까요? 인류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가시나무는 ‘깨달음의 나무’, ‘영생의 나무’로 나오는데, ‘가시나무’의 가시에 찔리면 영생, 곧 영원한 젊음을 얻게 된다는 설화입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가시나무는 아카드어 원문으로 ‘엣데투’(eddetu)인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타드’입니다. 가시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나무’의 표상으로 사용된 것이지요(시편 58,10).

그런데 전통적으로 이 ‘아타드’는 작은 덤불의 일종으로 보았으나(학명 lycium europaeum), 성서 식물학자들은 실제로 이 나무가 10미터 이상 자라는 큰 가시나무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가시나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우가릿 문헌’에도 등장하는데, 구약성서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시덤불’에 사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에서 나는 값진 선물과 가시덤불(떨기나무, 덤불)에 사시는 분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라. 이 모든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형제들 가운데서 뽑힌 그의 정수리 위에 내리리라.”(신명기 33,16)

초대 교부들은 모세에게 처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가시나무 안에 임재하셨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연결시켜 해석했습니다. 주후 2세기에 활약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 AD 150-AD215)는 ‘교사이신 그리스도’라는 문헌에서 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떠 올렸고, 불타는 가시덤불에 싸인 성부와 가시관을 쓰시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신 성자는 한 분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시덤불’ 혹은 ‘가시나무’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는 거룩한 나무라는 이해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가시’가 있는 덤불 혹은 가시나무냐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거룩한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이 이를 단순히 채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표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해가 참으로 놀랍고 새롭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나무를 신성시하는 전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 유산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라, 가시가 돋아난 덤불 혹은 작은 가시나무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신은 과연 어떤 신이란 말일까요? 그리고 왜 고대인들은 가시가 거룩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가시에 찔려야 영원한 젊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아픔 없이는 새로운 탄생이 불가능한 경험을 표상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시덤불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모세와 유일신 신앙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이집트학 교수인 얀 아스만(Jan Assmann)은 유일신교의 선구자는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왕으로 전해지는 아케나톤(BC 1352-BC1338)이라고 합니다.

▲ Master of the Dinteville Allegory, 「Moses and Aaron before Pharaoh」 (1537) ⓒMetmuseum.org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인 아케나톤은 이집트 다신교의 신상(神像)과 제식(祭式)숭배를 폐지하고, ‘아톤’(Aton)이라고 불리는 빛의 신을 숭배하는 순수하고 새로운 유일신교를 수립했습니다. 그는 17년간 이집트를 지배하면서, 다신교 전통을 급진적으로 거부하고, 다신교 전통 위에 서있던 이집트 전체 문화체계를 위로부터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사원들은 폐쇄되었고, 신들의 성상은 파괴되어 그 이름이 지워졌고, 그 신들을 위한 제식도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축제들의 폐지는 이집트 개개인들의 정체성을 앗아가는 일이었고, 좀 더 나아가 불멸에 대한 그들의 소원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 축제에서 신성함을 따르는 것이 내세에서 최상의 행복을 얻는 가장 처음이자 가장 필요한 단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유일신교는 진화가 아닌 혁명의 관점으로 옛것과 새것의 관계를 만들어 냈고 모든 오래된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들을 이방인이나 우상숭배로 배척했습니다. 우상숭배가 망각과 퇴행을 의미한다면, 유일신교는 기억과 진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케나톤 사후 그의 이름은 곧바로 왕의 명단에서 지워졌고, 그의 유물은 훼철(毀撤)되었으며, 비문과 조상(彫像)들은 파괴되어 그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거의 다 소멸되었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이집트에서 유일신 종교도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의 이름조차 완전히 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중반,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하에서 이집트 역사를 쓴 사제 ‘마네톤(Manetho)’은 모세를 문둥병자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 성직자로 서술합니다. 마네톤의 글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 중 몇몇 글들이 인용문과 발췌문의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쓴 ‘아피온 반박문’에 발췌문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책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한 비난들, 특히 이집트 사가인 아피온과 다른 그리스 사료 편찬가들의 비난을 반박하려고 애썼습니다. 요세푸스의 텍스트는 성서 외적인 출애굽 역사에 대한 자료로서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 즉 두 나라 이야기를 이집트의 관점에서 기술한 대단히 가치 있고 체계화된 문헌입니다.

마네톤의 첫 번째 발췌문은 ‘힉소스 왕족’에 대하여 기술합니다. 힉소스 왕족은 칼 한 번 사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500년 이상 이집트를 지배했다고 합니다. 그 후 테베의 왕들이 연합반군을 일으켜 힉소스 왕족을 쫓아내자, 이들은 시리아로 도망가서 지금 유대라 불리는 곳에 정착하고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마테톤의 두 번째 발췌문은 신을 보기를 원했던 아멘호테프 왕이 모든 문둥병자들을 제사장들과 함께 동쪽 광야의 채석장으로 강제노역을 보냈는데, 문둥병자들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13년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은 힉소스 왕족들의 고대 수도인 아바리스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고대 도시 헬리오폴리스의 사제인 오사르시프를 지도자로 선출합니다. 오사르시프는 이집트에서 금지된 것은 모두 허용하고, 거기서 허용된 것은 모두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처음이자 중요한 계명은 여러 신을 숭배하지 말 것, 두 번째 계명은 외부사람들과 교제하지 말 것 등이었습니다.

바로 이 오사르시프가 후에 ‘모세’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아멘호테프와 그의 손자 람세스가 누비아에서 돌아와 문둥병자들과 그의 무리들을 몰아낸 것이 이른바 출애굽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평가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모세는 이집트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들이 사실은 힘이 없고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이른바 이집트 제국의 ‘정적 승리주의의 종교’를 해체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신들이 가진 공통점은, 이들이 빼앗아 가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끝없는 생산을 요구하고 만족을 모르는 무한생산 시스템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집트 최고 권력자인 파라오의 체제가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권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 결과 파라오 세계의 신화적 정통성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제국의식의 산물인 이집트의 신들을 부정하였으며, 그 대신 주권적 자유로 행하는 지고의 존재이신 야훼는 특정 사회적 현실로부터 추론되거나 어떤 사회적 인식 도구로 파악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그 자신의 품격에서 출발해 자신의 목적을 향해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 ‘억압과 착취의 정치’를 해체했습니다.

모세는 질서와 승리를 내세우는 정적인 제국의 종교에 대해서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억압의 제국 정치에 대해서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여러 신들에게 예속될 때가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절대자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모세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보호하는 근거이자 가능성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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