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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방법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평화를 향한 갈망(마태복음 11:25~3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0.06.24 16: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개역)

언제 들어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저마다 짊어진 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짐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적으로 고통일 수만은 없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언제나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언제 들어도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맥락이 분명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정황, 그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대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전쟁(66~73) 곧 로마가 유대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 직후 상황에서 팔레스틴 북부 시리아 남부지역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기록되고 읽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청중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고통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 고통의 상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극한의 전쟁과 그에 이은 유대민족 국가의 멸망 상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여전히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사고방식,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짓밟힌 민족의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테러의 위협 아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팔레스틴 주변에서의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는 공공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정통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유대전쟁 후, 나라가 완전히 사라진 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강화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무리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받아 쫓겨납니다. 팔레스틴의 변방에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사실 바로 그런 정황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극한적인 폭력 사태 이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동족들로부터도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던 것이 팔레스틴 주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의 폭력에 시달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팔레스틴 주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공통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폭력적 상황, 특히 전쟁과 그 직후의 폭력적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서입니다. 다른 공동체들이 유대의 전통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데 반해, 마태의 공동체는 유대의 전통을 단순히 극복하려는 성향을 띠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래서 그 율법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율법의 정신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율법의 완성을 믿은 이들이 마태의 공동체였습니다. 율법주의에 대항하면서도 율법의 완성을 역설하는 긴장이 마태복음에는 깔려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민족적 일체감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마태 공동체의 사정을 반영합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피해자 민족주의’ 성향, 또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말을 따르면 ‘민중적 민족주의’의 성향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마태 공동체의 상황은, 힘 있는 민족에게 짓밟힌 치욕의 역사를 당한 모든 민족들의 정황, 전쟁의 참화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정황, 또한 항상 각자가 짊어진 짐 때문에 늘 허덕이고 힘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황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소망, 꿈을 가지고는 있다고는 하나, 언제나 장벽에 부딪혀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황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 청산되지 않은 가운데 남북분단의 질곡을 겪고 있고, 그나마 진척된 화해와 평화를 향한 여정이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 제국주의 침략국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불안정한 상태에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로 인해 음으로 양으로 일상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말씀은 바로 폭력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동족들부터 당하는 폭력, 그것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들 모두가 부딪히고 있는 장벽,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 모든 영혼들에게 주는 진정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 진정한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안정을 뛰어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현실을 벗어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딘가 도피하지 않고 삶 자체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로운 삶, 안식을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멍에’를 내팽개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도피와 방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책무, 새로운 삶의 연대성에 대한 적극적 선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짐을 가볍게,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메라고 하시는 그 멍에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메워진 멍에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메워주시는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와 안식의 조건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강포함’과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군림’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의 자세일 뿐 아니라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포한 세상과 군림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그렇기에 그것을 뒤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전쟁터와 같은 일상의 삶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보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 10:16)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뱀 같은 지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비둘기 같은 순진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뱀 같이 슬기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이 둘 모두는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지배질서를 넘어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더불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평화의 갈망과 평화의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6.25 민족화해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70년 전 발발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전(終戰)이 아니라 정전(停戰) 상태입니다. 민족화해주일은 그 전쟁,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그 전쟁 상태의 비극을 기억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지난 해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사실상 진전이 없는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16일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북측에서 이미 예고한 대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다들 깜짝 놀라고, 한반도의 미래가 어찌 되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북측의 이번 행위가 어떤 메시지를 지니는지 대개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북쪽 내부를 겨냥하고, 둘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재정책에 옴짝달싹 못하는 남쪽 정부를 겨냥하고, 세 번째는 전쟁상태와 제재를 지속하는 데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물론 가장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남쪽 정부일 것입니다. 남북간의 합의도 미국에 매여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메시지입니다. 그 언사나 방법이 거북스럽기는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한 것 아닙니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는 저 지난 주간(12일) 한국전쟁 70년 신학 심포지엄을 열고 분단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를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호소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발표 전날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때마침 정의평화위원회를 열고 있는 중 연락사무소 폭파가 확실하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16일). 긴급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NCCK에서는 준비한 평화 호소문을 발표하고(17일), 다시 모여 급박한 사태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시국토론회를 열고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18일). 이 상황 가운데 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는 일련의 성명문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 요체는 분명합니다. ‘강 대 강’의 대결로는 화해와 평화의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역시 평화의 방법으로 평화의 목적을 이루는 것 말고 달리 길이 없습니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해법을 모색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인도적 지원마저도 가로막는 동맹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힘을 앞세우는 제국주의적 패권의 질서 안에서는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질서 안에서는 군비경쟁과 대결밖에 없습니다. 한쪽이 굴복하지 않으면 그 대결의 상태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질서에 균열을 내고 평화적 해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입니다.

사태에 책임감을 느끼고 사임한 통일부 장관은 말했습니다. “결코 증오로 증오를 이길 수 없다.” “남북관계에는 치유할 상처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상처를 덧붙이면 치유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저의 물러남이 잠시 멈춤의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재임 시절 상황을 타개하는 데 어떤 적극적 역할도 맡지 못한 건 안타깝고 아쉽지만, 현재 엄중한 상황에 대한 진단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진실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도록 교회가 앞장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들 저마다의 일상의 삶의 평화 또한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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