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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고민하버마스의 규범적 진화이론 (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0.08.02 00:52
▲ 대중의 히틀러 선택을 지켜보며 젊은 날의 하버마스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Getty Image

독일 “국가사회당”(나치)의 출현에서부터 정권장악까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던 몇몇 학자들은, 어떻게 인간이 심리적, 대중 조작적 정략에 호도되어 이성적 비판능력을 잃고, 드디어는 국가구성원전체가 한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지배 통치될 수 있을까 하며 불안스러운 의혹에 몸을 떨었고 보이는 파국을 예측케 하는 조짐에 대해서는 “설마!”하며 강한 도리깨질로 불길한 예감들을 떨쳐버리려 했다.

책을 태우기 시작하는 곳에 인간을 태울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마따나 곧 전체주의의 어두운 먹구름은 전 독일을 휘덮었다. 그 먹구름은 유럽 전체를, 아니 세계 전체를 획일적인 전면통제의 지배의 군화발아래 예속시키려 덤벼들었다.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던 비판이론의 제 1세대에 속하는 학자들에게는 어떻게 지성적임을 자랑해오던 독일국민이 양심까지를 내던져 한 사람의 손아귀에 전적으로 나라를 내맡겨 버리고 그 야수적 만행에 눈을 감을 수 있나 하는 것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그 ‘전체주의’의 발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 검토해 나갔다.

독일 민주사회 건립을 위해

세계 제2차 대전이라는 천인공노할 인류의 대참극을 치룬 뒤의 잿더미가 되어버린 독일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던 오만의 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한 악몽 위에 또다시 예전의 전체주의적 망령이 되살아나리라는 가능성은 아무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망령이 퇴치되었다 해서 곧바로 민주주의가 건립되는 것은 아니다.

사면초가로 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버린 국가의 ‘민주주의 재건’에 온 정열을 쏟고 있는 지성인들에게 이제 최대의 관심사는 한시바삐 굳건한 토대 위에 “이성적 사회”를 건립하는 것이다. 혼란의 와중에 도사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 힘들을 미리부터 색출하여 그 뿌리부터 제거해 버려 이성적 사회건립의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여 비판이론의 제 2세대의 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적 관심을 무엇보다도 현대 ‘민주주의의 작동’에 두고 있다.

하버마스는 정치적 여론의 형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무엇으로 인해 그것이 위험스럽게 되는지를 연구 조사한다. 그는 강력한 대중의 여론(의견)을 활성화시켜 그것을 정치적 결정에서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작용도록 해왔던 옛 유럽의 이상만이, 죄익이나 우익측에서의 권력의 남용에 쐐기를 박아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한다.(1)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폭력의 사용은 피하여야 한다는 것이 ‘비판이론 제2세대’의 공통된 견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에 대한 폭력이건 사물에 대한 폭력이건 ‘폭력사용’은 정치에서 필연적이다시피 반작용적인 제도화된 권력의 향사만을 더 강하게 정당화시켜줄 뿐이다.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권력을 갖고 있는 기관은 좌익계의 선동에 대해 “옳다 이때다”하며 더 많은 진압병력을 투입하여 사회질서유지, 국민권익보호를 앞세워 더 강한 물리적 제재의 행사를 합법화해 버린다. 정보기관에도 더 큰 권한을 주어 공공의 여론조성을 검열하는 조처 등을 취하는 식으로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하버마스가 강조하고 있는 ‘공공의 여론조성’에 대한 주장을 학계 일각에서는 관념론적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는데, 이 비난은 사실 근거가 없는 비난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단순히 정보제공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정치적 결정의 정당성에 대해서까지 논의를 펴기 때문이다. 비판이론의 제2세대, 특히 하버마스에 와서는 이제 이론의 중요성이 인정된다.

그리고 이들 제 2세대의 견해는 그들의 앞세대에 비해 분명히 더 낙관적이다. ‘이론’은 단순히 왜 현실의 전개가 필연적으로 그랬어야했나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론은 또 단순히 보다 나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꿈을 그저 생생하게 유지하게끔 하는 것만도 아니다.

이론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론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관련되고 있는 사항들의 결정에, 보다 더 많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론이 ‘자기반성’이 될 때 정치적 현실의 한 부분으로서의 이론의 면모를 두드러지게 해주고, 따라서 이론과 정치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하버마스에게서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그 아래에서 인간들이 민주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규정과 그것에 대한 변론이다. 여기에서는 민주적 제도의 발전과 보강이 강조된다. 주된 관심거리는 서구에서의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분석하여 그 원인들의 제거를 가능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해”

하버마스의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는 정치적·사회적 관계(제도적 틀)를 개선하여 억압받지 않는 의사소통 속에서 일반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쏟고, 이들의 의사가 여러 방면의 정책결정에 반영되는 “이성적 사회”의 건립에 있다. 이를 위한 한 단계로서 하버마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우리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을 규정하고 있는 요인들은 어떤 것들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을 찾아 나선다.

이렇듯 실천적 의도에서 전개되어 나가는 하버마스의 ‘역사철학’은 인간사회의 진화를 ‘도덕적 의식의 형태들’의 발전이라고 고찰할 수 있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진화는 자유·평등·정의구현에 대한 욕구들을 폭력을 쓰지 않고 해결해 보려는 요청이 형성되어 나가는 발전의 과정이라고 고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간 도덕의식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억압되고 제지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볼 때 그것은 결코 그 타당성을 빼앗길 수도 그 유효성을 거세당할 수도 없다. 간단하게 말해 하버마스의 논제는, 기술적 문제들의 해결은-따라서 자연적 재생산의 테두리 내에서 우리가 자연과 관련을 맺고 있는 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해결은-오직 기술적 문제들과의 대립의 차원에서만 발전을 모색하는-따라서 순전히 도구적 행위에서만 문제해결을 찾아보려는-노력에서는 그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고 그 이상의 능력을 요구한다는 주장이다.

기술적 합리성의 테두리를 벗어난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기술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의 발전을 하버마스는 규범적으로 규제되고 있는 인간 상호행동의 발전에서 보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규범을 따르는 인간 상호행동의 개념과 발생에서부터만이 사회의 작동과 발전을 이해할 수 있지, 노동의 도구적 합리성만 갖고는 해명해 낼 수가 없다.

실제의 사회발전을 살펴보면 두 행위의, 즉 ‘노동’과 ‘상호행동’의 차원들이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회의 재생산의 차원에서는 체계문제가 대두될 수 있으며, 이 문제는 사회적 통합의 형태 속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체계를 위태롭게 하는 문제들의 해결은 사회적 교육과정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는 세 가지 차원에서 배울 수 있다. 첫째, 자연지배의 분야에서 (생산력의 발전, 기술과 기술공학의 발전), 둘째, 사회 정치적 질서의 분야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상호행동의 분야에서이다. 하버마스는 이상의 세 차원에서의 사회의 교육과정이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전개의 논리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려 시도한다.(2)

물론 역동적인 발전의 과정이 주춤하거나 또는 완전히 정지상태에 빠져버리거나 또는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도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퇴보 역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에 따르면 전반적 발전의 목표 같은 어떤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한 목표를 규정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자신의 “의사소통이론”에로 소급해 올라간다.

인간의 의사소통이 성공하기 위해 채워져야 하는 조건들은 하버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행위로 표현되고 있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서, 첫째 발언(언표)은 이해 가능해야 하고, 둘째 명제(발언의 내용)의 진리가 요청되고 있어야 하고, 셋째 대화대상자들은 상호 그들 자신의 진실성을 상정해야 하며, 넷째 규범적 언어행위에서는 그 행위의 올바름이 요청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조건들을 분석하여 이상적 언어상황에서부터 구체적 상호행동의 평가를 위한 가늠기준을 끄집어낼 뿐 아니라, 인간의 ‘의사소통의 이상적 지향점’이 곧 진화적 발전의 목표라는 것까지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3)

자유·평등·정의는, 규범들이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생각될 수 있고 구현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개개인 모두가 그들 모두에게 규범이 어느 때나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이들 모두가 규범과의 일치 속에 행위하기를 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규범에 따라 행위함이 진리척도에 대한 보편적인 시인에 근거하고 의사소통적 언어행위를 보편적으로 뒤따라 행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의사소통적 행위’는 이렇듯 보편성과 자기성찰로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의사소통은, 그리고 그 의사소통 안에서 실시되고 있는 사회의 교육과정은 다른 모든 행위와 교육과정의 표본이 된다. 이러한 주장을 한층 더 심화시켜 언어적 의사소통의 달성을 위한 조건들이 최종적으로는 ‘윤리적 조건들’임을 하버마스는 증명제시하려 시도한다.

그 배후에는 언어의 이해 및 명제적 진리를 위한 조건들이 결국 윤리적 주체들로서의 동료 인간들의 시인을 전제하고 있다는 데 대한 통찰이 깔려 있다.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그리고 근거제시의 문제와 관련해서 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정보의 교환 및 구체적 문제들의 해결뿐만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또한 말함과 행위함의 규율과 규범들의 타당성에 대한 합의에 이르려는 목표이다. 이러한 “가능한 대화의 규범적 타당성의 토대”에서부터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의 비판척도까지를 끌어내고 있다(RHM, 194쪽 볼 것).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하버마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갖고 그가 전개시켜 보려는 사회진화에 대한 규범적 이론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하버마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교조적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것에 반대해 그것을 동시대의 진화이론 내지는 의사소통이론의 범주들의 도움을 빌려 새롭게 해석해 보려 시도한다. 여기에서 그는 “재구성”(Rekonstruktion)을 복구나 재생의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문맥에서 ‘재구성’이란 한 이론을, 그것이 스스로에게 설정하고 있는 목표에 더 잘 도달하기 위해, 분해·해부하여 새로운 형태로 다시 결합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목표는, 여러 측면에서 수정을 필요로 하는, 그렇지만 그 관심을 끄는 소지는 아직도 결코 탕진되지 않은, 그러한 한 이론과의 정상적인(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정상적인) 대면이다.”(RHM, 9쪽)

통상 “역사적 유물론”하면 “유물론적 역사관”을 이해하기 마련이다.(4) 그러나 하버마스는 애초부터 역사적 유물론은 “이론”으로 다루기를 원하며 그것도 “사회진화에 대한 한 이론으로서이며, 이 경우 이 이론은 그것의 반성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 행위의 목적을 위해서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이론 내지는 혁명전략과도 연결될 수 있다.”(RHM, 144쪽)(5)

이러한 관점에서 하버마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재구성하며 그로써 후대 사람을 위한 보다 나은 가능성의 기회를 감지하려 한다. “마르크스를 그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TuP, 224쪽)(6)이 그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래서 그는 주저함이 없이 “마르크스 자신 이미 역사적 유물론을 사회진화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으로 이해하였다.”(RHM, 41쪽)고 주장한다.

‘재구성’은 수정과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을 기술해 본다. 세 가지 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연구 조사해 본다. 첫째, 우리는 마르크스의 노동견해에 대해 던지고 있는 하버마스의 주된 반대의견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역사의 본래적인 가늠쇠는 그때그때의 생산력의 수준이며, 보다 나은 미래에로 이끌고 가는 계기는 바로 이 물질적 토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언급한다. ‘역사의 주체’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와 하버마스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 점이 하버마스의 마르크스비판에서 다루어야 할 세 번째 주제이다.

그 다음 우리는 어떻게 하버마스가 이러한 마르크스비판에서부터 출발하여 역사적 유물론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결합시키려 시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하버마스의 “사회적 노동”, “종적 역사”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다루어진다. 그 다음 우리는 재구성된 진화 이론의 전개논리에 대한 하버마스의 논거를 뒤밟아 본다. 여기에서는 하버마스의 기본 논증점들과 논제들이 종합 요약될 것이다.

미주

(미주 1) 하버마스는 그의 교수 자격 논문에서 “공공성의 구조변천”(1962)을 연구조사한다. 참조 J. Habermas,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Darmstadt und Neuwied, 1979). Helga Gripp, Jürgen Habermas, (Paderborn, 1984), 20쪽 이하.
(미주 2) J. Habermas, Zur Rekonstrultio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RHM) (Frankfurt a.M., 1976), 30쪽 이하, 170쪽 이하 볼 것. Willem van Reijen, Philosophie als Kritik, Einführung in die kritische Theorie (Meisenheim/Glan), 168쪽 이하.
(미주 3) RHM, 339쪽 볼 것. J. Habermas, “Was heißt Universalpragmatik? (1976)”, Vorstudien und Ergänzungen zur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Frankfurt a.M., 1984), 353쪽 이하.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2Bde (Frankfurt a.M., 1981). Helga Gripp, Jürgen Habermas  (Paderborn, 1984), 72-106쪽.
(미주 4) W. Goerdt와 H. Dahm, “Historischer Materialismus, materialistische Geschichtsauffassung”,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5 (Basel/Stuttgart, 1980), 859-868쪽.
(미주 5) 다른 곳에서 하버마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새로운 사회 진화 이론을 위한 의미 깊은 계획”(RHM, 57쪽)이라고 여기고 있다. A. Honneth는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이러한 하버마스식의 새 해석을 “사회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라고 지칭한다. A. Honneth와 U. Jaeggi, Theorie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Frankfurt a.M., 1977), 11, 17, 453쪽. 그러나 H. Fleischer는 이러한 노력에서 “단지 이차적이고 도출적인 이론 구성만”을, 소위 역사적 유물론II를 볼 뿐이고 그래서 그것을 “진화이론적 백과사전주의”라고 비난한다. H. Fleischer, “Warum eigentlich Materialismus?”, Theorien des Historialismus, 173쪽.
(미주 6) J. Haberma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TuP) (Frankfurt a.M., 1978), 244쪽.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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