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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뿐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19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8.11 19:30

< 1 >

‘전도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코헬렛’(Kohelet)으로서, 히브리어 ‘카할’, 즉 ‘집합하다, 모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여성형 분사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기능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 ‘코헬렛’은 ‘지혜문헌을 모으거나 수집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코헬렛’이 ‘전도서’로 번역된 것은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그리스어에서 다시 라틴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전도를 위한 책’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왜 삶의 허무를 노래하는 전도서가 경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잠언과 아가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솔로몬 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아마 그 이유 중의 하나였으리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유대교 경전인 히브리 성서에서는 전도서가 다섯 두루마리라고 하는 한 묶음 안에 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 등과 함께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들의 저자가 같은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절기에 읽는 책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룻기는 ‘칠칠절’에, 전도서는 ‘초막절’에, 에스더는 ‘부림절’에, 애가는 아빕월 9일 성전 파괴를 기억하는 절기에,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 2 >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전도서 1장 1절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이다’로 시작하여,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임을 암시합니다. 솔로몬을 저자로 돌리는 전통은 솔로몬이 지혜와 총명으로 유명했고, 많은 잠언과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도서의 히브리어가 솔로몬 시대의 히브리어가 아니라는 점, 오히려 아람어에서 들어온 외래어가 많이 들어 있고,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외래어가 더러 들어 있어서, 저작 시기도 포로기 후기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였을까요? 전도서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돈과 경제문제이고, 저자는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투자하는 이른바 ‘큰 손’으로, 당시 상류층 인사로 추정됩니다. 전도서 11장에 의하면 저자는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전 11,1-2)고 권면하는데, 이는 무역과 투자가 활발했던 당시 상황과 저자가 부유한 상류층 인사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합니다.

< 3 > 저작 시기와 사회적 배경

전도서에는 아무런 역사적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저작 시기를 확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사용된 언어의 특징으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페르시아어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 포로기 이후 시대 상업용어로 사용된 아람어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년–331년)에, 보다 정확하게는 기원전 450년-35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대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페르시아 또는 아케메니드 왕조(기원전 539-333년) 시대의 특징은 화폐경제가 활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동산이나 가축, 또는 보석이 아니라 현금이 사적인 경제 거래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제국은 세금을 징수하고,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고, 화폐제도를 표준화하였습니다. 돈은 단지 물물교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필수 물품이 되었습니다.

물론 화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왕궁과 신전들에서 계산단위로 사용되면서 등장했고, 평민들의 일상적 경제는 서로 간의 신용을 통해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과 용병들이 전문직이 됨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급료는 전리품이었는데, 귀금속은 쉽게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종의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리디아(서부 소아시아 지역의 왕국), 인도, 중국의 권력자들이 거의 동시에 용병과 군인에게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동전의 유통은 시장을 활성화시켰고, 동시에 노동도 더욱 분업화시켰습니다. 이자 부과와 부채로 인한 노예의 생산, 토지 소유자와 토지를 담보로 했다가 토지를 잃은 소작농 혹은 상품이 된 노예들이 생겨났습니다. 도시들과 지주들이 부채 구조를 통해 토지를 늘리고 부채노예들을 노동력으로 사용함으로써 대농장의 농업생산을 지배했습니다.

전도서에 ‘은화’, ‘재물’, ‘유산’, ‘흑자, 수입’, ‘선점, 벤처, 경영’, ‘분복, 몫’ 등의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전도서가 포로 이전 남유다의 대체로 궁핍한 농업경제 상황과는 다른 화폐경제와 상업경제의 환경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주전 5세기는 더 이상 왕궁중심의 경제체제가 아니라, 사유화된 상업의 시대였습니다.

소규모 자작농들은 집세와 소득세를 내야 했고 담보에 대한 법적 책임이 있었습니다. 화폐경제는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가 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위험이 되었습니다.

화폐와 사유재산은 동시에 개인주의를 초래했습니다. 부족사회의 호혜성과 연대성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대와 행정 계급들이 생산과정의 잉여분을 조공으로 가로채거나 집단적 강제노동으로 착취했습니다. 그 후 사유재산과 화폐의 도입으로 한편으로는 토지를 축적할 수 있는 부자와 토지의 상실과 부채로 인한 노예농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 숨 쉬는 사람보다는, 이미 숨이 넘어가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둘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못된 일을 못 본 사람이 더 낫다고 하였다’(전 4,1-3)는 전도서 저자의 증언도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은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부추겼는데, 전도서 저자는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들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전 4,4). 전도서는 바로 주전 5세기의 이런 사회, 경제적 배경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 코헬렛, 전도자는 허무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Getty Image

< 4 > 전도서의 내용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헛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안개’입니다. 안개 혹은 수증기는 가벼워서 공중에 떠 있다가 금방 사라지거나, 손으로 붙잡을 수 없습니다. ‘헤벨’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콘텍스트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헤벨’이라는 단어는 모두 40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 전도서에서만 33회 나옵니다.

반세기 넘게 전도서와 씨름한 프랑스 철학자 자끄 엘륄은 창세기 4장에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의 이름도 ‘헤벨’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아벨은 생존할 수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고, 후손을 가질 수도 없도록 지어졌고, 죄가 없고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형제에게 살해당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❶ 그렇다면 전도자는 인생이 왜 헛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우주의 질서는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인데,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니’(전 1,11),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함께 잊혀짐이 허무의 원인입니다.

둘째,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점에서 삶은 덧없는 것이라고 합니다(전 2,16-17).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은 곳으로 가는데, 모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전 3,20).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어떻게 살았건, 모두 죽는다는 것,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허무의 근거입니다.(전 9,3)

셋째, 세상의 부조리도 허무의 원인입니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전 3,16).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고,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전 4,1)

넷째, 삶의 헛됨은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전 9,1)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전 9,11-12).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 모든 것이 새옹지마(塞翁之馬)같은 현실이 삶의 허무함을 더 가혹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❷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삶이 헛되다면, 전도자는 그러니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일까요?

첫째,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삶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전 5,18-20). 그러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고 욕심에 사로잡혀 헤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전 6,9)

셋째, 극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 7,15-18)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는 충고처럼 들립니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굵고 짧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살지도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지요(전 7,29).

넷째, 전도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도 충고합니다. 귀가 얇아 다른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남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자칫하다가는 네 종이 너를 욕하는 것까지 듣게 된다.”(전 7,21)

다섯째,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 9,4)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그 즐거움은 덧없는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무덤 속에서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하든지 힘을 다해서 하라고 전도자는 권합니다(전 9,9-10).

여섯째, 전도자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라고 합니다. 여러 날 뒤에 이윤을 남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라’고 합니다(전 11,1-2).

일곱째, 젊은이들에게는 젊었을 때 젊은 날을 즐기라고 권면합니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르라고 합니다. 다만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라고 합니다(전 11,9). 인생은 덧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법,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젊을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전 12,1-7).

여덟째,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한 전도자의 마지막 결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 12,13-14)

< 5 >

전도서는 모든 것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비극적으로 선포합니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삶의 효용성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효용성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효용성을 중시하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일이나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미 충분히 부자였고,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저자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헛됨은 구체적인 효용성이나 비효용성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가 묻는 질문은 ‘그 일로 수고하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재물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은 재산을 가져갈 수 없다거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 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 12,13-14)고 자신의 지혜를 끝맺습니다.

과거는 인간에 의해 망각되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한 그 시점에서 전도서 저자가 주는 지혜, 도덕적 교훈은 인간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억의 과거나 영광스런 미래의 나날들로 도피하지 말고, 오늘 현재 그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산다는 것이 헛된 것일지라도, 삶은, 생명은 명령(命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뿐이니, 오직 지금 여기에서 삶을 충만하게 사는 것, 그 길이 삶의 헛됨을 이기는 길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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