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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여섯 걸음창조절 둘째 주일(삼하 6:20-23; 고후 4:5-10; 마 4:12-17)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 승인 2020.09.14 17:00
▲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기뻐 춤을 추었다. ⓒGetty Image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국의 뉴스에도 방송될 정도로 이곳 캘리포니아는 산불로 인한 심각한 공기 오염으로 파란 하늘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분명히 아침인데 해가 뜨질 않는 거지요. 아니 하루종일 불을 켜야 할 정도로 밤낮을 구별하기 어려웠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훨씬 나아졌지만, 지난 주간은 정말 묵시록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제 아들은 좀비가 나올 거 같다고 농담할 정도였습니다. 길가에 세워놓은 차 위에는 까만 잿가루가 앉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잿가루로 인해서 우리는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미래학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얼마 후 올해 2020년을 기억하면서 참 힘들었던 한 해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그래도 살기 좋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계 경제가 휘청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며 죽어나가고 있지만, 우리가 그동안 산업 발전을 위해 화석 에너지를 무차별적으로 쓴 결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경제를 이유로 우리가 그동안 석탄, 석유를 무차별적으로 쓰던 속도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고, 산업 폐기물과 폐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심지어 버리는 일까지 생깁니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각종 방사능 폐기수를 그대로 바다에 버린 것은 아닌지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의심받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지금 당장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일어나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이 오늘을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은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터전인 환경을 파괴하게 됩니다. 먹이사슬의 최고 위에 있는 우리 인간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온 인류가 힘을 모아 환경파괴의 죄에서 돌이켜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이웃인 자연을 지키려 애쓰지 않으면 동식물들은 살 곳을 잃게 될 것이고, 우리 인간 또한 삶의 터전을 잃게 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나무와 풀, 동물들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감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성도들도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나’의 아버지이기를 바라고, 내 아픔, 내 슬픔에 먼저 반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내 욕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바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땅한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무엘하 본문은 무엇이 그릇된 신앙이고,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를 가르쳐주는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사울 가문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여전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지지하던 북부 지파 사람들과 다윗을 지지하던 유다 지파 사람들은 정치적인 연합은 이루어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역 간의 갈등을 넘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의 중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훼 하나님 신앙이었습니다. 종교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religare’는 ‘함께 묶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확인만 된다면, 이제 나뉘었던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리라는 판단이 서자 다윗 왕은 즉시 행동을 개시합니다.

사무엘하 6장 초반을 읽어보니 하나님의 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려 했습니다. 다윗은 군사 삼만 명을 징집하여 그들을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게 하고는,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로 하여금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그 행렬을 호위하고, 악사들은 각종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화려하고 장대한 행렬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는 깜짝 놀라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이 불길한 징조에 놀라 두려워하여 야훼 하나님의 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가게 했습니다.

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왜 소가 날뛰고, 웃사가 죽는 일이 발생했을까요? 사무엘하 오늘의 말씀은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과 똑같은 구절이 역대상 13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에서도 이름이 조금 다를 뿐이지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가 날뛰었고,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붙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기록합니다.

소가 왜 날뛰었는지, 웃사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성경은 웃사가 잘못했다, 깨끗하지 못했다 말하지만, 결국 그 원인은 웃사라기보다는 다윗에게 두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회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으로 동원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회통합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닙니까? 진보와 보수, 동과 서, 가진 자와 없는 자 등 여러가지 분열된 사회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자 말하는 자들.

예, 그렇습니다. 정치가라면 누구나 하는 말입니다. 사회 통합을 이루어야 자기들이 꿈꾸는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떤 정책을 내세우고 발표할 때마다 반대하고, 등을 돌리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없겠지요. 다윗은 통치를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하기 위해 묘수를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하나님 신앙이었고, 이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못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자 다윗은 화도 나고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내 편이라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내 편이 되어서 나를 도와줄 거라 기대했는데 그 하나님이 완전히 남이 된 것이지요.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그 석 달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다윗은 소식을 듣습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여호와의 궤가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복을 내려 주셨다는 것이지요. 다윗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 했던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문제였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나님은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자에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 가둘 수 없습니다. 사회통합이라는 명분에 이용당할 수 없습니다.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고 깨끗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요 객체가 아닙니다.

물리학자들은 자연의 현상, 물리 현상을 연구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체의 여러 형태와 원리를 연구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을 연구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무엇을 연구할까요? 신학은 신, 즉 하나님을 연구합니까?

모든 학문들은 연구하는 대상들을 이리 저리 살펴보고 실험하고 예측합니다. 생물학자들이 예를 들어 개구리를 잡아 실험판에 마취시켜 묶어놓고 칼로 배를 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거 아닙니까? 어릴 적 과학실험 할 때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가 어릴 때 과학실험실에서 그렇게 했었지요.

자 그렇다면 신학도 하나님을 이리 저리 살펴보고 실험하고 예측할까요? 하나님을 연구 대상으로 놓고 이리 저리 살펴볼까요? 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신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그 하나님은 결코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험실의 쥐처럼 하나님을 상자에 가둘 수 없습니다. 이리 저리 실험의 제한을 두고 가설을 세우는 과학자들처럼 하나님께 제한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그러는데, 그게 거꾸로 작용해서 오히려 우리가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성경 말씀이 오히려 우리를 읽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운세를 살펴보듯이 성경책을 보고, 그날의 기분이 달라질 게 아니라, 말씀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에 순복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몰라도 얼마나 모르는지, 아니면 목사님들이 잘 가르치시는데 열등생처럼 귀를 막고 안 듣는 것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너무나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건방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지극히 무지한 종교사기꾼들이 시장판에서 헐값에 옷을 떨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창고대방출’ 하는 것처럼 돈 몇 푼 주고 헐값에 사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떨이로 하나님을 팔며 그것을 복음이라 부르고 전도라 부르는 것이지요. 참담합니다. 신성모독이 따로 없습니다.

다윗은 오벳에돔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사회통합의 도구로 사용하려던 그의 원래 마음을 다 거뒀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싶었습니다. 우선 삼만 명이나 됐던 정예 군사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왕의 위엄을 왕의 권세를 드러내는 악기의 연주 소리와 위풍당당한 행렬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상 깊게 읽어야 할 대목이 나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왜 여섯 걸음을 갔다는 표현이 있을까요? 7이라는 숫자, 곧 완전수 하나님의 수에서 하나를 뺀 6. 그 6이라는 숫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들아, 보라! 하나님의 궤를 매고 오는 다윗의 군사들을!’ 풍악을 울리고, 군복입은 긴 행렬을 온 백성에게 보이며 그들을 겁주고 하나님을 소유한 다윗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나타내며 사회를 통합한다 말하는 다윗의 발걸음에 하나님은 제동을 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자신이 내딛는 그 걸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연약한 걸음인지 깨닫습니다. 제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작은 미물에 불과합니다. 영원이신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어찌 감히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오벳에돔의 집에 임했던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자신도 그 복을 받기를 갈망합니다. 최선의 발걸음, 여섯 걸음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 겸손하게 순복합니다.

제사를 바친 후에 다윗은 베로 만든 에봇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신분을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삼만의 군사를 앞세워 왕의 권세를 드러냈던 과거와 달리 이제 하나님의 영이 임한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한 생명으로서 하나님을 모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놓은 후에 주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러고는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들에게 빵 한 덩이와 고기 한 점, 건포도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날은 축제의 날입니다. 화해의 날입니다. 치유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권위를 다 내려놓고 허물없이 춤을 추는 왕을 보며 백성들의 마음도 열렸습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한 백성이요 한 몸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가득 누리길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는 태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양을 반사하여 빛을 비추는 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감히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비춰진 그 빛을 반사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할 뿐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의 그 예수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주님께서 종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섬길 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며,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희생과 사랑을 기억할 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만물을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 온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한 주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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